VIRGIL WILL BE HERE
2021년 11월 28일 우리는 전도유망한 젊은 거장을 떠나보냈다. 버질 아블로(Vilgil Abloh)의 타계 소식이 전해지자 갑작스러운 이별에 전 세계 패션·문화예술계는 충격에 휩싸였고 언론과 소셜 미디어에는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다. 이번 글은 “천재적인 디자이너였을 뿐만 아니라 선구자였고 아름다운 영혼과 위대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던 버질 아블로가 시대에 남긴 발자취에 보내는 헌사이다.
‘밀레니얼 세대의 칼 라거펠트’, ‘진정한 르네상스맨’, ‘이 시대의 앤디 워홀’, ‘현대판 마르셀 뒤샹’에 이르기까지 버질 아블로를 일컫는 수식어는 무수히 많다. 루이 비통 남성복 아티스틱 디렉터이자 오프화이트(Off-White™)의 창립자 겸 총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간 그는 가구 디자이너, 아티스트, DJ, 건축가 등 여러 직업을 두루 섭렵했다. <시스템 매거진>은 버질 아블로 이슈를 기획하며 ‘버질 아블로는 누구인가(Who is Virgil Abloh)?’가 아닌 ‘버질 아블로는 무엇인가(What is Virgil Abloh)?’라는 타이틀을 앞세워 그의 본질을 파고들었을 만큼, 아블로는 전통적인 범주화의 한계에 도전했으며, 규정된 창의성에 국한되기를 거부하며 끊임없이 영역을 넘나든 인물이다. 그는 패션, 예술, 디자인, 문화 전반에서 활약하며 기존 위계질서의 틀을 깨고 구분 짓기가 무의미한 세상의 토대를 마련했다.
가나에서 이민 온 부모님이 정착한 시카고 인근 록포드에서 나고 자란 아블로는 스니커즈, 후디, 스케이트보드 같은 스트리트 패션의 언어를 컬렉션에 대입해 하이엔드 패션의 혁명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일리노이 공과대학교에서 건축학 석사 과정을 밟던 중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가 수립한 바우하우스(Bauhaus) 디자인 교과목을 공부하며 예술가로서의 폭넓은 원칙을 세우기 시작한 아블로. 이내 카녜이 웨스트(Kanye West)와 인연을 맺고 신생 창작팀에 합류해 앨범 커버, 콘서트 디자인, 굿즈 기획 작업을 맡아 진행했다. 주류에 저항하는 애티튜드를 지닌 스트리트웨어가 현대 문화에 기여한 부분에 찬사를 보내던 그는 다양한 기법을 차용하고 재조합하면서 자신만의 해석을 가미했다. 철 지난 챔피언 티셔츠, 랄프 로렌 셔츠를 할인가에 구매한 후 ‘PYREX 23’ 스크린 프린트를 덧대어 10배 넘는 가격에 되파는 접근법은 전례 없는 시도였다. 2013년 아블로는 밀라노에서 흑인도, 백인도 아닌 탈인종 상태를 제안하는 브랜드 오프화이트를 창립, 상류 패션계 권위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파리 패션 위크 무대에 올랐다. 아블로의 컬렉션은 패션 코드와 규칙 또는 시사적 주제에 대한 그만의 ‘에세이’와 같은 기능을 수행했다. 남성복 및 여성복에 텍스트와 그래픽, 로고 표현 방식을 적용한 수많은 이미지는 그의 건축학적 토대와 도시 디자인 요소를 향한 관심과 연계된 도로와 표지판 등에서 비롯했다. 아블로는 다채로운 영역에 걸친 창조적 결과물에 대해 상업적 성공과 비평가의 호평을 동시에 얻고 마침내 2018년 루이 비통 남성 컬렉션 아티스틱 디렉터로 임명되며 커리어에 정점을 찍었다. 그즈음 그는 “장르나 창조성의 원칙이 있다고 믿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들이 모호한 상태를 즐긴다"며 "이러한 현상을 일종의 르네상스처럼 생각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는 우리 세대가 비장르로 규정되는 형식을 수용할 수 있다고 믿었고 이를 실천했다.
아블로는 현대 미술과 건축학적 지식, 유행하는 음악 등에서 영감을 얻었는데, 활동 초기 파이렉스 비전 제품 라인에 바로크 회화의 거장 카라바조의 회화를 차용하는가 하면 조르조 데 키리코의 초현실주의 작품을 재창조해 의상에 활용하기도 하고 이탈리아 현대 화가 루치오 폰타나의 작업 방식을 끌어다 쓰기도 했다. 캔버스를 칼로 찢는 폰타나의 작업 방식을 본떠 오버코트에 거칠게 재단한 패치를 붙이거나 천 조각을 가방에 덧대는 형태를 시도했다. 개념주의 예술가 제니 홀저 같은 아티스트에게 협업을 요청하기도 했다. 제니 홀저는 쇼 배경으로 곤경에 처한 난민들의 모습을 담은 비디오 영상을 만들었고, 해당 컬렉션에서 아블로는 응급 및 구조 현장에서 사용하는 천을 디자인에 활용해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하며 인권운동가의 면모도 비췄다. 더불어 다다이즘의 대표 작가이자 레디메이드의 창시자 마르셀 뒤샹을 가리켜 자신의 대변인(lawyer)이라고 말하며 재치 있게 비트는 뒤샹 스타일로 의복 양식을 해체하는 패션 코드도 차용했다. 그는 시카고 같은 대도시의 스트리트 패션과 상류 문화에 적절한 파동을 주어 새롭고 신선한 방식으로 내보이는 데 서슴없었다. 또 건축가 출신답게 그의 활동 영역 전반에 걸쳐 20세기 대표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했는지는, 투명한 소재를 활용하면서도 기능성과 디테일을 강조한 그의 디자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작업 프로세스와 발상에 초점을 맞춘 덕분에 전용 또는 유희 기법 등을 적용해 이미지나 구조, 소재 선택에서 새로운 방식을 시도할 때가 많았던 버질 아블로. 비주얼 아티스트, 뮤지션, 디자이너, 건축가와의 심도 있는 협업에도 몰두한 그는 나이키와 컨버스, 이케아와 비트라 등과 동시에 작업하며 기업 간 협업의 공식 역시 뒤집어놓았다. 특히 나이키와의 협업에서 콜라주 요소와 투명한 소재, 자기지시적 라벨, 식별표, 케이블 타이 등을 활용해 신발의 구조를 돋보이게 하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는 곧 나이키와 루이 비통의 협업으로 이어졌고, 아블로의 유작이 된 ‘에어포스 1(Air Force 1)’ 200켤레는 지난 1월 루이 비통 파일럿 케이스와 함께 뉴욕 소더비 자선 경매에 나와 버질 아블로 ‘포스트모던’ 장학 기금(The Virgil Abloh™ “Post-Modern” Scholarship Fund) 기부로 이어지기도 했다.
아블로가 타계하고 바로 며칠 후 예정됐던 루이 비통의 마이애미 스핀오프 쇼는 유가족의 뜻에 따라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VIRGIL WAS HERE’란 문구가 마이애미 하늘뿐 아니라 전 세계 루이 비통 매장을 뒤덮었다. 누구보다도 낙천적이고 따뜻한 심성을 지닌 고인의 루이 비통에서 선보인 여덟 번째이자 마지막 유작인 2022년 가을-겨울 컬렉션이 1월 20일 ‘Dreamhouse’를 주제로 펼쳐졌다. 시대를 앞서간 천재 아티스트 버질 아블로는 그렇게 떠났지만, 그가 남긴 창의적 유산과 포용성은 미래 세대에 희망으로 기억될 것이다. 마치 그가 우리 곁에 있는 것처럼. VIRGIL WILL BE HERE.
Artnow Issue 37 (Spring 2022) CITY NOW 기고를 위해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