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 제전의 열기 속으로
BIENNALE ARTE 2022
1백 년이 훌쩍 넘는 역사와 권위를 지닌 베니스 비엔날레. 전통적으로 홀수 해에는 국제 미술전인 아트 비엔날레가, 짝수 해에는 건축 비엔날레가 열려왔다. 올해는 짝수 해지만 전 지구를 강타한 팬데믹으로 막혔던 하늘길이 다시 열리면서 ‘아트 비엔날레’가 비로소 찾아왔다. 제59회 베니스 비엔날레는 4월 23일 공식 개막하며 11월 27일까지 2백19일간 이어지는 대장정의 시작을 알렸다. 프리뷰 기간부터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어 북적인 베니스의 모습은 ‘엔데믹’에 대한 공식 선언을 방불케 했다. 간만에 활기를 되찾은 운하의 도시는 국제 미술전 본전시와 30개의 병행 전시 외에도 지난 3년간의 공백을 메우려고 작정한 듯 절로 경탄을 자아내는 전시로 넘실거렸다.
제59회 베니스 비엔날레가 4월 23일 공식 개막하며 11월 27일까지 이어지는 219일간의 대장정의 시작을 알렸다. 3년 만에 재개된 비엔날레에서는 무엇보다 여풍의 강세가 돋보였다. 우선 비엔날레 총감독을 뉴욕 공공미술의 모범사례로 손꼽히는 하이 라인(High Line) 아트 프로그램 총괄기획자 체칠리아 알레마니가 맡았다. 국제 미술전의 시초로 여겨지는 베니스 비엔날레가 시작된 1895년 이래 이탈리아 출신의 여성 큐레이터가 총감독으로 발탁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본전시에 참여한 58개국 213명 작가 중 여성 작가는 188명에 달하며, 성비율에서도 남성 작가 수를 압도적으로 앞질렀다. 비엔날레 재단에서 수여하는 황금사자상 또한 여성 작가들이 휩쓸었다. 국가관 부문은 영국관을 대표한 소냐 보이스(Sonia Boyce)가, 본전시 부문에서는 미국관 대표 작가로도 나선 시몬 리(Simone Leigh)가 나란히 수상했다. 특히 흑인 여성 아티스트들이 비엔날레 최고 영예로 여겨지는 황금사자상의 주인공으로 선정돼 유례없는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갔다. 평생공로상 부문 수상의 영광 역시 독일 출신의 카타리나 프리치와 칠레의 세실리아 비쿠냐 두 여성 작가에게 돌아갔다.
문화예술계 석학 안드라스 산토(András Szántó)와의 대화에서 체칠리아 알레마니는 자국 출신 여성이 총감독이 되기까지 왜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는가 라는 질문에 그간의 성차별적이며 억압적인 시스템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고 반감을 숨기지 않았다. (알레마니는 2005년 비엔날레 사상 첫 여성 총감독이 임명된 이래 다섯 번째 여성 총감독이다) 하지만 과거에 연연하고 싶지 않다고 밝힌 그녀는 이번 비엔날레가 후세에 “코비드 비엔날레(Covid Biennale)”라는 별칭 외에도 “여성 비엔날레(women Biennale)”로 기억 남길 바란다며 소회를 밝혔다.
‘꿈의 우유(The Milk of Dreams)’라는 제목을 앞세운 비엔날레를 관통하는 또 다른 키워드는 재탄생과 유대감(rebirth and togetherness)이다. 전시 테마는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작가 레오노라 캐링턴(Leonora Carrington)의 저서에서 따왔다. 상상의 프리즘 너머 신체가 변형하고 삶이 끊임없이 재구상되는 마법의 세계를 묘사하는 책에서처럼 전시는 누구나 서로 다른 생물 혹은 비생물로 변화할 수 있는 세계관 속에서 신체의 개념에 대한 은유를 탐구하고 인류의 정의를 내려보는 상상의 여행 속으로 보는 이를 이끈다. 여기에 개인과 기술 간의 관계, 인류와 지구의 연관성 같은 근원적인 질문이 더해져 과학, 예술을 넘나들고 신화에 만연한 무수히 많은 또 다른 질문들로 꼬리에 꼬리를 물 듯이 펼쳐진다. 그간 개념미술에 주로 천착해온 동시대 현대미술의 흐름을 거슬러 근대미술의 획을 그었던 상징주의(symbolism)와 꿈(dreams)이 이번 비엔날레에서 재부상한 데에는 팬데믹과 기후위기, 전쟁에서 비롯된 종(種)의 생존이 위협받는 말 그대로 초현실적인(surreal) 역사의 순간을 살고 있는 인류의 현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뉴욕 메트로폴리탄과 런던 테이트 모던이 공동 기획해 뉴욕에 이어 현재 런던에서 선보이고 있는 Surrealism beyond Borders 전시나 베니스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Surrealism and Magic: Enchanted Modernity 전시도 이 같은 맥을 함께한다.
공교롭게도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같은 초현실주의 미술 거장들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으며, 스페인 독감이 전 세계를 강타했다. 이번 비엔날레는 스페인 독감 이후 100여 년 만에 찾아온 팬데믹과 전쟁을 겪고 있는 세계정세 격변의 시대를 기록하고 새로운 형태로 현존하는 방식을 고안해내고자 하였다. 무엇보다 1895년 베니스 비엔날레 제1회 당시 참여한 8개국에도 포함되었던 러시아의 국가관에 앞에선 무장경찰과 빗장을 걸어 놓은 모습이야 말로 하나의 설치미술을 방불케 하였다. 야외전시장 한 켠에는 우크라이나 광장(Piazza Ucraina)이 들어서 반전(反戰)과 평화를 호소하고 예술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연대와 지지를 표했다.
이번 비엔날레에는 동시대 활동하는 신진작가는 물론, 1647년 태생의 마리아 시빌라 메리안(Maria Sibylla Merian)을 비롯해 19세기, 20세기에 활동한 작가의 작품도 대거 포함되며, 세대를 아울렀다. 본전시에 참여한 213명의 아티스트 중 지금까지 국제 미술전에서 한 번도 보여지지 않았던 작가도 180여 명에 달한다고 비엔날레 측은 밝혔다. '생물학적 성별 관행을 따르지 않는(gender non-conforming) 젠더' 작가군 역시 참여했다. 작가의 스튜디오 방문 대신 주로 ZOOM으로 작가들과의 대화에 참여한 총감독 알레마니는 오히려 작가들이 보다 개인적인 환경에서 대화에 참여해 편안한 분위기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피력했다고 밝혔다. 일부는 사회적 불안을 언급하기도 했으나 다수의 작가들이 다룬 것은 다가올 희망, 조화, 공존이었다. 벨기에관을 대표한 프란시스 알리스(Francis Alÿs)의 작품은 1999년 시작한 <Children's Games> 연작으로 작가가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 대륙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어린이들이 나라별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놀이를 즐기는 모습을 포착한다. 각각의 놀이의 형태는 다르지만 놀이를 충실히 즐기는 아이들의 모습은 보는 이의 눈길을 오랫동안 사로잡았다.
실존의 심연 속으로: 안젤름 키퍼, 아니쉬 카푸어, 루이즈 네벨슨, 루치오 폰타나/앤터니 곰리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는 현대인의 삶에 아찔하게 침투해왔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과 사회현상에 명민하게 반응하는 예술가들이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도시 전체가 매년 조금씩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베니스에서 펼쳐치는 전시는 실존의 심연 속으로 좌중을 안내하고, 압도하며 각기 다른 방식으로 마음을 울린다. 이번 비엔날레 최대 화제 중 하나는 두칼레 궁(Palazzo Ducale)에서 열리는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 전시다. 베니스 출신 철학자 안드레아 에모(Andrea Emo, 1901~1983)의 철학에서 영감을 받은 키퍼가 에모의 저서 <Questi scritti, quando verranno bruciati, daranno finalmente un po’ di luce(집필한 이 글들이 태워져 비로소 한 줌의 빛을 비추리라)>에서 제목을 가져왔다. 전시가 끝나면 역시 태워서 파기할 예정이라는 공간 맞춤형 작품 앞에서 실존을 너머 존엄성이란 무엇인가 되새겨보도록 만든다. 갤러리 델 아카데미아와 팔라초 만프린에서 개최되는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 전시도 놓치면 아쉬울 광경을 연출한다. 카푸어의 초창기 작품부터 공간을 위해 특별 제작된 2022년 신작에 이르기까지 40년에 달하는 작업 세계를 마주할 수 있다.
두칼레 궁과 지척인 산 마르코 광장 부근에서는 앞서 언급한 두 전시에 비하면 규모는 작지만, 공간 그리고 관람객과 공명하는 두 전시가 열리고 있다.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의 참여로 리뉴얼한 프로큐라티에 베키에에서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미국 작가 루이즈 네벨슨(Louise Nevelso)의 <Persistence> 전시가 한창이다. 본전시에서도 만날 수 있는 네벨슨의 전시는 1962년 베니스 비엔날레 미국관 참여 60년 만에 열린 전시라 더욱 의미가 있다. 옛 안경 전문점에 들어선 작은 전시 공간 네고치오 올리베티에서 개최되는 루치오 폰타나/앤터니 곰리 전시는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던 두 거장이 작품을 통해 빛, 공간, 부재(absence)에 대해서 어떻게 내면의 대화를 이끌어내는지 들여다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도시 곳곳을 수놓은 한국 대표 거장 4인의 전시: 박서보, 이건용, 전광영, 하종현
재료와 물성에 대한 사유, 미술의 본질에 대한 끊임없는 고찰을 다뤄온 한국 대표 거장 4인의 전시도 베니스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 옛 건축물 내 한국 고유의 미감이 어우러지는 전시는 각자 고유의 방식으로 한국 미술 최전방에서 시대와 호흡을 맞춘 실험을 지금까지도 이어가고 있는 이들의 신작과 주요 지점을 관통하는 구작을 아우르며 창의적인 실험 정신과 색조의 변주를 보여준다. 세계 미술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전복의 회화’로 자리매김한 이건용의 ‘Bodyscape’ 연작은 유서 깊은 팔라초 카보토에서 전시되고 있다. 비엔날레 개최 기간 중 2017년 이승택 개인전, 2019년 이강소 개인전을 선보이기도 했던 이곳에서 전위적 퍼포먼스와 서사를 결합한 화업의 신작을 만날 수 있다. 전광영과 하종현의 전시는 제59회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 미술전 병행 전시의 일환으로 꾸려졌다. 삼각형의 작은 입체 조각 단위 하나하나를 고서 한지로 감싸 재배열하고 때로는 강렬한 색으로 염색해 고요하면서도 웅장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집합으로 응고시켜온 전광영의 ‘재창조된 시간들’은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 르네상스 시대 건축물과 어우러지며 동서양의 조우를 이뤄냈다. 박서보는 얀 보(Dahn Võ), 이사무 노구치와의 그룹전에 참가했다.
베니스, 럭셔리 브랜드들의 ‘메세나 무대’
언젠가부터 베니스는 미술 후원의 역사에 있어 남다른 이력을 지닌 럭셔리 브랜드들의 전시 콘텐츠가 돋보이는 무대가 됐다. 이번 비엔날레 기간과 맞물려, 대표적인 럭셔리 브랜드들의 공간에서도 역시 그 어느 때보다 공들인 전시를 속속 공개해 베니스를 찾은 예술 애호가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에스파스 루이 비통 베네치아는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 컬렉션 소장품 전시를 전 세계에 선보이는 ‘미술관 벽 너머(Hors-les-murs)’ 프로그램의 일환이자,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 미술전 병행 전시로 독일 예술가 카타리나 그로세의 새로운 설치 작품으로 <아폴로, 아폴로> 전시를 개최한다. 액자와 캔버스의 경계에서 벗어나 확장적 작업을 시도하며 본인의 주 영역인 회화의 다양한 잠재성을 탐구한다. 액자와 캔버스의 경계에서 벗어나 바닥, 벽, 천장, 물건, 심지어 자연경관 자체를 활용해 입체적인 회화 공간을 창조해내는 작가의 작품은 관객으로 하여금 풍부한 색채에 빠져들게 만들어 기존의 감각적·물리적 지각 방식을 뒤흔든다. 프리뷰를 위해 에스파스 공간을 찾은 카타리나 그로세는 “저는 어떤 식으로든 제 회화 작업과 연관된 이미지를 선택합니다. 어떠한 상황이나 행위를 드러내는 사진들이지요. 제 작업은 표면과 질감, 이미지, 물체, 질서와 무질서, 파괴와 창조, 긴장과 이완, 강제성과 자유로움을 유동적으로 넘나들며 전개됩니다”라고 덧붙였다. 카타리나 그로세의 작업은 5월 4일부터 8월 29일까지 파리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에서 만나볼 수 있는 <색채의 푸가(La Couleur en Fugue)> 전시에서도 선보인다.
팔라초 그라시의 마를린 뒤마 전시, 푼타 델라 도가나의 브루스 나우만 역시 놓치지 않아야 할 백미다. 오랜 염원이자 과업이던 프랑스 파리 내 피노 컬렉션을 전시할 미술관이 1998년 기능이 종료된 옛 증권거래소(Bourse de Commerce) 건물에 마침내 둥지를 틀어 2021년 5월 개관하기 훨씬 전부터 피노 재단은 베니스에 두 곳의 공간을 운영하면서 수준 높은 전시 기획으로 메세나의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다. 작년 5월 일찌감치 개막한 브루스 나우만의 전시는 지난 50년간 사운드, 영상, 네온, 홀로그램과 3D 등 다양한 소재를 활용해 작업해온 작가가 변화와 진화를 거듭하는 과정을 돌아보게 한다. 예전 작품과 신작에서 느껴지는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과 점점 나이 들어가는 나우만의 모습에서 세월을 감지하며 작가가 걸어온 여정을 살펴볼 수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인 마를린 뒤마는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즉 1948년에 법률로 공식화된 인종 분리 정책이 시행된 후 5년 뒤인 1953년,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이 한창 심하던 시기에 나고 자라 현재는 네덜란드에서 활동하고 있다. 남아공에서 백인으로 살아가며 겪은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죄책감, 사회상을 작품에 반영하면서 때로는 단순하지만 역동적인 구도와 거친 붓질 너머 인종차별 같은 불편한 진실을 담아내며 독창적인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했다. 이탈리아에서의 첫 회고전을 오픈하며 뒤마는 자신의 모든 작업을 하나로 아우를 제목이 무엇일지 많은 고민을 거듭한 끝에 폐쇄되었던(lockdown) 세계에 반해 ‘open’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이내 자신의 작품을 보는 이마다 다채롭게 해석한다는 점에 착안해 ‘open-end’라는 제목이 탄생했다. 무엇인가의 끝은 결국 시작이라는 것을 넌지시 암시한 듯한 제목에 뒤마의 작품을 한참 들여다보는 관람객으로 미술관은 붐볐다.
한편 폰다조네 프라다는 고대와 현대, 학제 간 융합을 꾀한 <인간의 뇌> 전시를 내놓았다. 프라다 특유의 연녹색 배경 앞 캐비닛에 신경과학, 고고학, 철학, 심리학, 언어학, 인공지능을 넘나드는 5대륙 석학들의 텍스트를 배치하고 그 옆에는 고대 유물, 서적부터 미술 작품과 해부학 도구를 망라한 오브제를 함께 진열해 주목받았다. 여전히 미지의 분야에 머물고 있는 뇌라는 주제를 학구적으로 풀이한 전시는 다른 기업 공간과 사뭇 차별화된 켜켜이 쌓인 학술적인 내용을 선보였다. 정금형, 이미래 작가의 작품이 초대된 본전시 아르세날레 전시장에서도 다룬 ‘사이보그의 유혹’이라는 주제 아래 신체에 대한 관심과도 맞닿은 지점이 있어 더욱 흥미롭다.
Style Chosun 2022년 Summer Special Art + Culture 에디션 기고를 위해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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