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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 샤워

오감을 깨우고 뒤흔든 작품, 그 매혹의 순간에 대하여

by eARTh on view

지난 여름, 오랜 여행 공백기 후 어디든 떠나고 싶은 마음을 지닌 많은 이들처럼 이런저런 여행을 꿈꾸고 계획하던 중 카셀을 비롯해 뒤셀도르프, 프랑크푸르트, 쾰른, 슈투트가르트에 자리한 독일의 유수 미술관을 투어 해보는 예술 여정을 계획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현대 미술 작품을 하나 꼽자면 바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록된 쾰른 대성당 건축물 내 2007년 공개된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의 <돔 펜스터(Dom Fenster)>. 단 72가지 색채의 조합이 자연광과 만나 자아내는 하모니는 그 어떤 작품보다 깊은 울림을 자아냈다.


올해 90세를 맞이한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독일의 대표적인 예술가로 손꼽힌다. 2021년 3월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에서 처음 접한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4900가지 색채의 모티브가 된 원작을 품은 쾰른 대성당을 향한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돔 펜스터는 리히터가 2차 세계대전으로 파손된 쾰른 대성당 남쪽 측랑의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 디자인 작업을 요청받아 진행한 결과물이다. 흔한 스테인글라스 작품이라 여기고 사뭇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을 수도 있을 정도로 수수하지만, 보면 볼수록 빠져든다. 돔 펜스터는 중세 시대 창문에 쓰던 72가지 색채로 제작된 1만 1500장의 수공예 유리면들로 구성됐다.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 게르하르트 리히터.jpg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에서 열린 게르하르트 리히터 4900가지 색채 전시 전경


실제로 돔 펜스터를 마주한 그날은 비가 오는 흐린 날씨였다. 하지만, 작품 앞에 머물던 길지 않은 시간 중 해가 구름 사이를 뚫고 나온 그 짧은 찰나, 다채로운 유리면 너머로 자연광이 벽에 비춘 색채의 조합은 가히 아름다움을 넘어 신비로운 경지였다. 흡사 우리 삶처럼 우연한 만남으로 점철된 다양한 색채의 조합에서 그 어떤 위계질서도 없는 각각의 색의 매력 있는 그대로를 응시하게 된다.


전통적인 회화기법을 교육받은 리히터는 한 세기에 달하는 기간 동안 사진과 회화, 추상과 구상, 채색과 단색의 경계를 넘나들며 방대한 작업을 선보여 왔음에도 이 작품의 색상은 특별히 고안된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해 무작위로 배열했다. 여섯 개의 구획으로 나뉘어진 유리창에 배열된 색채는 데칼코마니와 같다. 우연과 통제가 결합해 빚어낸 정돈된 색채의 카오스 속에 풍요로움을 담고 있다.


돔펜스터.jpg DOM FENSTER (2007), GERHARD RICHTER


리히터는 예술 매체가 현실을 진실되게 반영하거나 표현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결국 예술은 우리 눈에 보이는 부분적이고 불완전하며 덜 객관적인 가시적 세계를 표상하는 것이라 믿었다. 즉, 보는 이가 얼마큼 보는가에 따라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리히터가 추구한 평등한 색채의 언어를 감상하다 보면 색상 하나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역동적인 색의 스펙트럼에서 우연과 즉흥성, 무작위의 미덕을 새삼 깨닫는다.


72가지 다양한 색상이 뒤섞였으나 결코 색채의 소음은 찾아보기 힘든 작품을 앞에 두고 지난 3년간 우리의 삶에 무던히도 큰 영향을 끼친 코로나 19, 우크라이나 사태, 이상 기후 등 끝없는 위기 상황을 헤쳐나가야 하는 인류, 서로 너무도 다른 우리가 한데 모여 살아가는 방식에서도 분명 조화를 이루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는 작은 희망을 품어본다.


Elle Korea 2022년 9월호 아트러버들의 오감을 뒤흔든 작품들 기고를 위해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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