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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RTh on view Dec 23. 2023

김구림, 시대에 감응한 전위예술가

구름 떼 팬덤을 몰고 다니는 한국 실험 미술의 대가 다시 보기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특별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1960~70년대 당시 한국 실험 미술을 이끈 청년 작가 중심의 전위적 실험 미술을 다룬 <Only the Young: Experimental Art in Korea, 1960s~1970s> 전이 그 주인공이다. 국립현대미술관과 구겐하임 공동 기획전으로 <한국 실험 미술 1960~70년대>란 제목으로 서울관에서 이미 한 차례 개최한 후, 내년에는 LA의 해머미술관까지 순회하는 전시다. 이번 전시는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를 계기로 단숨에 급부상한 단색화 열풍에 상대적으로 가려져 있던 한국 실험 미술이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대대적으로 소개되어 글로벌 미술 계에서 마땅히 누려야 했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김구림 작가의 전시 전경.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의 재건과 함께 급속한 사회 변화를 맞이하던 1960~70년대, 경제개발이 가져온 물질만능주의와 인간소외, 억압이 압축적으로 수반된 사회 변화는 예술의 의미를 모색해 온 청년 작가들에게 창작의 토대로 작용했다. 한국 실험 미술의 선구자로 꼽히는 김구림 작가에게도 인식의 전환기는 예술의 자양분이 되었다.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의 그룹전뿐 아니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개최하고 있는 김구림 작가의 발자취와 예술관을 직접 들을 수 있었던 11월 초의 아트 토크에서 노장은 새로움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시대와 외부 환경의 변화에 반응해 나 스스로도 변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실험 미술이라는 테두리 안에 갇히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은 채 오로지 전진하며, 사회의 변화에 발맞춰온 작가는 시종일관 거리낌이 없었다. ‘현실에 무관심한’ 주류 예술에 반해 기존의 회화, 조각 영역을 벗어나 영상, 오브제, 퍼포먼스라는 용어 탄생 이전의 해프닝 혹은 이벤트로 불리며, 때로는 우연성을 함유하고, 때로는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기획된 실험 미술 작업에 역동적인 사회 현상을 반영하였다. 얼음이라는 고체가 녹으면 액체, 물이 되고 물이 증발하면 기체가 되듯 ‘현상에서 흔적으로’ 이어지는 김구림 작가의 예술 여정은 음악, 연극, 무용 등으로 한층 스펙트럼을 넓혀 무수히 뻗어 나갔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김구림 작가의 전시 전경.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지 않았던 50~60여 년 전 한국에서 시대를 앞서간 작가는 장르의 구분 없이 여러 경계를 넘나들며, 기존 관습에 지속적으로 대항하는 정신을 견지하며 작품 활동을 전개해 나간다. 자신이 살던 곳에서 멀지 않은 미대에 입학했으나, 이내 배울 것이 없다는 판단 아래 스스로 학교를 떠나 섬유회사에 근무하면서 발견한 공업 재료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연료로 삼았다. 기계 해부를 일삼던 작가는 산업 오브제를 부착한 독창적인 기법의 추상 연작에 핵, 죽음, 무덤 같은 제목을 달아 전후 시대의 실존적 문제를 담아냈다.


헌책방에서 <라이프> <타임스> 같은 월간지를 보며 더 넓은 세계를 접했다. 정규 교육과정을 거치지 않아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었던 작가는 기민한 시대 감성으로 1969년에 한국 최초의 메일 아트 ‘매스미디어의 유물’을 김차섭과 함께 시행했다. 한국 아방가르드협회(AG)의 주요 창립 멤버로 개념과 과정을 강조하는 미술 활동을 펼쳐 나갔고, 한국 실험 영화사에서도 높이 평가받는 <24분의 1초의 의미>를 제작했다.


124초의 의미, 1969, 단채널 비디오, 컬러, 무음, 10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970년 다양한 분야의 젊은 지식인, 예술인과 총체 예술을 추구하며 결성한 전위예술집단 제4집단과 이를 주도했던 작가의 급진적인 행보는 영향력 있는 주간지를 비롯한 언론에 대서특필되었고, 당시 중앙정보부의 레이더망에도 잡히게 된다. 제4집단 궐기대회 직후 교통방해죄로 남대문경찰서 유치장에 갇혔으며, 풀려난 뒤에도 몇 개월간 미행이 따르자 한국에서는 도저히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 힘들다 여겨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일제강점기 때 초등학교를 다녔던 만큼 언어에 장애가 없기도 했지만 정주하지 않기 위함도 컸다.


일본에 머물며 작가는 사물과 시가의 관계성을 오브제와 설치작품, 판화 등을 통해 탐구하였다. 1980년대 들어서는 젊은 시절 헌책방 바닥 구석에 널브러져 있던 미군기지에서 공수한 잡지를 통해 접했던 미국을 방문하여 백남준 등과 교류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양상의 작업을 2000년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까지 이어 나갔다.


그의 세계적인 진가를 먼저 알아챈 것은 국제 미술계였다. 1970년대 전위적인 작품은 파리 비엔날레, 상파울루 비엔날레 등에서 반향을 일으켰고, 1986년 뉴욕에서는 브루스 나우만과 함께 전에 참여하며 두각을 드러냈다. 런던 테이트모던은 2012년 그룹전에서 잭슨 폴록, 이브 클라인, 앤디 워홀, 데이비드 호크니 등 미술사에 주요한 족적을 남긴 거장들과 함께 김구림의 선구적인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번역이 필요 없는 것이 그림이라는 깨달음에 미술가가 되고자 결심했던 어릴 적 꿈은 오늘날 보다 선명하게 가닥을 잡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전쟁, 이념대립, 근대화, 민주화 운동에 이르는 혼란 속에서 권위에 고개 숙이지 않고 억압에 굴하지 않으며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 의미 있는 종적을 남긴 총체 예술가 김구림. 87세의 나이에도 매일 신문과 뉴스를 빠짐없이 챙겨 본다는 작가에게 헌정하는 국내 대규모 회고전은 전쟁과 기후위기라는 또 다른 혼란을 겪는 우리에게 연대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일깨워줄 고찰의 시간을 제공할 것이다. 전시는 2024년 2월 12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다.


Maison Marie Claire Korea 2023년 12월호 칼럼 기고를 위해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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