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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RTh on view Jan 26. 2024

파리, 미술 수도의 귀환

파리 플러스 아트 바젤

10월 22일, 파리 아트 바젤 주간이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프리즈 서울과 동일하게 올해 두 번째로 개최해 한국에서도 많은 관심을 받은 아트 바젤 파리+(Paris+ par Art Basel)는 전시 구성이나 열기 측면에서 한 주 앞서 열린 프리즈 런던을 압도했다는 평이 우세했다.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지속되고, 세계경제 회복세가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팬데믹 시기 전에 없던 호황을 누린 미술 시장이 경기 둔화의 영향을 받을 것이란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수십억 원대 작품의 완판 행진이 연이은 파리+는 숨은 옥석의 윤곽을 드러내며 볼거리와 즐길 거리로 무장해 미술 수도 재탈환을 위한 발판을 다지고 입지를 굳혔다.


작년에 이어 2회째 아트 바젤 파리+가 열린 그랑 팔레 에페메르 외부 전경. Courtesy of Paris+ par Art Basel.


현대미술 작가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 동시대 미술 흐름을 조망하는 동시에 미술품의 상업 거래를 목적으로 열리는 행사로 단순히 치부하기엔 파리에서 개최하는 아트 바젤의 의미가 남다르다. 아방가르드(전위예술)의 발상지로 문화 예술을 후원하고 장려해 온 파리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세계 미술 수도 자리를 뉴욕에 내주어야 했다. 이후 유럽 미술 시장의 허브로 폭넓은 시대와 장르를 아우르며 명맥을 유지해 왔으나, 그마저도 런던의 21세기 문화 창조 산업 육성 정책의 거센 여파에 밀리는 듯했다. 그런 상황에서 파리와 아트 바젤의 만남은 많은 이들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고, 프랑스의 예술 현장에 한층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제시했다.


유서 깊은 피악(FIAC)이 아트 바젤과 개최 장소인 그랑 팔레 유치 경쟁에서 밀리며 47년 역사의 뒤안길을 걷자, 일부 프랑스 미술인은 세계 3대 아트 페어의 퇴장에 씁쓸함을 내비치기도 했다. 토종 아트 페어의 자리를 차지한 아트 바젤의 첫 파리 에디션을 앞두고 우려와 기대의 목소리가 공존했다면, 두 번째 해에는 세계 1위 관광도시의 위상에 아트 바젤이라는 브랜드를 접목해 더욱 빛을 발했다. 프랑스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61개 화랑을 비롯해 유럽, 미대륙, 아프리카, 아시아, 중동에서 파리로 날아온 갤러리까지 총 154곳에서 참여해 미술 현장의 생생한 파노라마를 펼쳐 보였다.


아트 바젤 측은 니키 드 생팔, 아리스티드 마욜, 알렉산더 콜더, 로버트 라우션버그 같은 20세기 거장의 작품은 물론 마크 브래드퍼드, 트레이시 에민, 볼프강 틸만스, 옌페이밍 등으로 대변되는 블루칩 작가, 강서경, 로르 프루보 등 중견 작가와 신진 작가에 이르기까지 전 부문에서 강세를 보였다고 밝혔다. 갤러리스트 역시 파리+는 다시 한번 기대를 뛰어넘었다고 입을 모았다. 작년 행사도 훌륭했지만, 낙관적 분위기에서 진행한 올해 에디션 수준이 매우 높았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가장 기민하고 정교하며 야심 찬’ 전 세계 수집가들이 모인 만큼 역동적 결과를 도출했다.


작년에 블록체인 네트워크인 테조스(Tezos)가 루이 비통과 더불어 공식 파트너사로 나서 디지털 인터랙티브 NFT, 블록체인을 주제로 대화(Conversations) 프로그램을 이끌었다면, 올해는 퐁피두 센터와 협업해 콘텐츠에 내실을 기해서 눈길을 끌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루브르 박물관, 파리 보자르(Beaux-Arts de Paris) 미술 전문 명문 그랑제콜이나 파리시와의 기관 파트너십도 2회째 이어졌다. 작년에 마크롱 대통령이 직접 현장을 방문해 응원했다면, 올해는 프랑스 문화부 장관 리마 압둘 말라크(Rima Abdul Malak)와 영부인 브리지트 마크롱(Brigitte Macron)이 그랑 팔레 에페메르(Grand Palais Éphémère)를 찾았다.


튈르리 정원에 설치한 자넬레 무홀리 ‘The Politics of Black Silhouettes’(2023) Presented by Galerie Carole Kvasnevski


미술품 구매 여부와 상관없이 미술 애호가와 전 세계 유수의 170여 개 국공립·사립 미술관 관계자의 파리 방문도 쇄도했다. 5대륙에서 이곳을 찾은 주요 미술 관계자들이 어우러져 곳곳에서 네트워킹이 이뤄졌다. 비단 아트 페어를 찾은 이들만이 아니라 파리 시민과 관광객도 두루 즐길 수 있도록 전시장은 물론 튈르리 정원, 방돔 광장, 팔레 디에나 등지에도 무료로 관람 가능한 조각과 설치 작품이 들어서 도시의 풍경에 창의성을 더했다. 아시아 나우(Asia Now), 파리 인터내셔널(Paris Internationale) 등 위성 페어와 처음 개최한 디자인 마이애미도 의미 있는 행보를 이어갔고, 프랑스 출신 부호와 기업의 대규모 문화 후원은 과도한 보험비, 운송비로 일반 미술관이나 재단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마크 로스코 전시를 가능케 했다. 파리+ 첫해 전후로 일찌감치 파리에 진출한 가고시안, 데이비드 즈워너, 콘티누아, 화이트큐브에 이어 가장 영향력 있는 갤러리 중 하나로 손꼽히는 하우저 앤 워스도 파리 지점 오픈 릴레이에 동참했다. 8구에 4층 규모의 옛 호텔을 매입, 개보수를 거쳐 뉴욕 휘트니 미국 미술관과 동시 개최로 더욱 화제를 모은 헨리 테일러 개관전을 파리+ 기간에 맞춰 공개했다.


예부터 문화 예술에 대한 전폭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정부와 예술가를 존중하는 인프라, 미술품에 대한 세금 친화 정책에 힘입어 성황리에 폐막한 아트 바젤 파리+는 자국 미술 시장의 동반 성장을 꾀했다. 이는 지자체와의 시너지가 상대적으로 아쉬웠던 프리즈 서울에도 시사점을 남겼다. 한국 미술 현장을 오롯이 보여주기보다는 하나의 축제처럼 비친 프리즈 서울 개최는 보다 많은 대중이 미술을 즐길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일조했다는 의미에서 긍정적이나, 향후 경쟁력 강화를 위한 개선 방안을 파리+에서 엿봐도 좋을 것이다.


올해 첫 에디션을 칼 라거펠트의 옛 저택에서 개최한 디자인 마이애미 파리. 프랑스 대표 산업디자이너 피에르 폴랑이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 집무실을 위해 디자인한 가구도 선보였다.


아트 바젤은 피악이 진 자리에 파리+라는 태양을 올리는 데 성공했다. 2024년엔 파리 올림픽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을 10월, 기존 전시장 보수 기간에 임시로 마련한 전시장 규모의 7배에 달하는 그랑 팔레로 거처를 옮겨 그야말로 피악의 자리를 대체하게 된다. 2023년 브렉시트 후폭풍에 주춤한 런던에 판정승을 거두며 유럽 미술 수도로 등극한 파리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기념해 건립, 살롱 도톤(Salon d’Automne, 매해 가을 개최하던 프랑스 미술 단체 전시회), 앙데팡당(Indépendants, 프랑스 아카데미즘에 반해 개최한 무심사 미술 전람회) 전 등을 열며 근대미술을 견인해 온 건축물에서 런던과 뉴욕을 제치고 20세기 초반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빛나던 옛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지 혹은 임시 미술 수도로 남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Artnow Issue 44 (Winter 2023) CITY NOW PARIS 기고를 위해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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