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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외계인 Feb 27. 2022

절대 머무르지 않는 사람

#기획자부터 디자이너까지 #서울부터 베를린까지

'정체성'이라는 거대한 주제에 언제나 관심이 많은 나는,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지금 나는 내 삶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하지만 명쾌한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나'라는 사람만큼 정의를 하기 어려운 것은 없는 것 같다. 아무리 인생 모른다 하지만, 30여 년을 지켜봤는데도 어떤 사람인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사람인지에 대해 전혀 예측이 가질 않는다.



(현재 혹은 오늘의)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나라는 사람은 한자리에 절대 머무르지 않는, 혹은 머무르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혹은 내가 흥미를 느끼는 것에 따라 스스로를 계속 변화시키는- 한마디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다.



스무 살까지는 그저 세상에 시키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살았다. 학교 가라니까 가고, 대학 가라니까 가고, 등 따신 집 두고 방황이나 가출 같은 것은 왜 하는지 모르겠고, 그저 남들 하는 대로 남들 사는 대로 살았다. 그저 사회가 등 떠미는 대로 살았었다. 그렇게 사회가 시키는 대로 살아온 스무 살의 나는 내가 런던에서 순수미술을 공부할지 몰랐고, 지금 이렇게 베를린에서 디자이너로 살고 있을지 전혀 몰랐다.



디자인을 전공하고, 컨텐츠 기획자로 일하다가 갑자기 일러스트레이션을 하고, 또 순수미술을 하고- 지금은 디자이너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픽부터 웹, 브랜드까지 다양한 분야의 디자인을 하고 있는 나는 어찌 보면 정체성을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 나의 정체성일지도 모르겠다.






* 이것은 나의 인생 역사에 대한 이야기고 참고로 내용이 아주 길다. 누군가에게는 재미없을 지도, 큰 감동이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단순히 나라는 사람이 지나온 시간들에 대해 한 번쯤은 기록하고 싶었다. 영국 어학/유학이나 런던 생활, 베를린 살이에 자리를 잡게 된 과정이나 취업기, 이직기 등등은 각각 자세하게 개별 포스팅이 되어있으니 정보가 필요한 분들은 다른 글들도 살펴보시기를 추천한다.




(c) Freepik





중3 병

10대의 나는 소위 방황을 모르는 '착한 아이'였지만, 그리 성실한 학생은 아니었다. 왜 그리 공부는 재미가 없는지 그나마 인문계 고등학교로 겨우 진학하고 대학을 간 것도 '벼락치기'가 통했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는 그저 학생이니 공부하고, 시험 보라니까 잘 보고 그랬었다. 딱히 좋아하는 것도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하루하루 그저 남들 하니까 나도 했고,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유일하게 좋아하는 혹은 갖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컴퓨터'.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리 컴퓨터가 갖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게임도 좋아하지 않고, 딱히 컴퓨터로 무언가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데, 그저 컴퓨터가 너무 좋았다. 그래서 별 크게 필요치 않는 MS 도스- 그런 방과후 수업도 즐겁게 듣곤 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집채만 한 크기의 데스크톱이 꽤나 비쌀 시기였다. 부모님을 조르고 졸라 중 3, 내 생에 처음 마련한 삼성 데스크톱. 무려 그 당시 가격으로 600만 원 정도 했었다. 그리고 삐삐- 소리를 내며 인터넷을 하는 동안에는 전화는 늘 '통화 중'이 되어버리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속도의 인터넷. 하지만 나는 그저 '컴퓨터'가 가지고 싶었고, 컴퓨터로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즐거웠다.


그러다가 우연히 좋아했던 한 그룹의 팬 페이지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활동을 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팬아트나 홈페이지를 만드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며 자연스럽게 포토샵이라는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서로 엄청난 전화비를 탕진하며 매일 통화하고 관심사를 공유했던 언니는 지금까지 나의 베스트 프렌드이다.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사람을 만나다가, 같은 관심사를 공유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즐거웠고, 그 안에서 자연스레 사진 편집이나 웹 디자인을 스스로 배워가며 그렇게 나는 디자인 혹은 미술이라는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밤새도록, 심지어 학교에서도 노트에 디자인 썸네일이나 스케치들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자연스레 공부에서 관심은 멀어졌고 성적은 떨어졌다. 내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성적표(사실 나에게 충격은 아니었지만 부모님께)를 받은 것도 이때였다. 우리 엄마는 아직도 이때를 나를 '질풍노도의 사춘기'였다 칭하신다.


디자인이라는 것을 공부하려면 미대에 가야 한다 길래 친구 따라 입시미술 학원을 갔다. 그다지 열정적으로 입시를 준비한 것은 아니지만 대학은 갔으면 하는 부모님의 바람도 있었고,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다니 나쁘지 않았다. 소위 말하는 4년제도, 명문대도 아니지만 나는 지금도 내 인생에서 잘 한 결정 중 하나는 미대를 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으니까.




나는 스무 살이다

수능 점수에 비하면 사실 그리 입시를 잘 치른 것은 아니었다. 수능은 어찌어찌 수도권 내 대학 갈 정도로는 봤는데, 나는 시간 내에 무언가를 그려야 하는 입시 미술의 압박을 그다지 즐기는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물론 집중력의 차이겠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소위 미대 입시 미술은 죽을 쑤었는데, 모 대학에서 주최한 미술대회에서 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똑같이 시간 내에 석고상을 그리는 것이었는데, 그 대회에 나온 석고상은 지금까지 내가 한 번도 연습해 보지 않은 석고상과 구도였다. 아마도 집중을 했나 보다, 그리고 생에 처음으로 입시미술로 상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입시는 줄줄이 죽을 쑨 덕분에 나는 서울 소재의 전문대학에 간신히 입학했다. 역시 난 좋은 학생은 아니었다.


대학에 입학하니 즐거웠다. 우선 가장 즐거웠던 것은 취미에도 없는 국영수를 공부하며 내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디자인과 미술 공부에만 집중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내가 원하는 공부만 하니 그것을 즐기고, 즐기는 자는 따라올 수 없다고 했던가? 나는 내 생에 처음으로 전체 수석이라는 것을 해보았다. 아직도 첫 학기 성적을 확인했던 날의 충격이 잊히지 않는다. 평생 1등이라는 것은 모르고 살아왔었는데, 그저 재미있어서 열심히 했는데 수석이라니. 등록금 고지서에 찍힌 0원이라는 금액을 보고 엄마는 동네방네 자랑을 하셨고, 아빠는 친구들에게 한턱내셨다며 거나하게 취해서 귀가하셨다.


그렇게 이름도 없이 조용히 입학했던 내가 수석을 하며 교수님들 사이에 이름이 알려지고, 그렇게 대표직을 맡으며 스스로가 즐거운 재미있는 대학 생활을 보냈다.


2년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을 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 대학을 다니면서 유독 내가 흥미를 느꼈던 과목이 있었는데 바로 '일러스트레이션'. 대학 입학 전에는 그런 직업이나 전공이 있는지 조차 몰랐다. 두 번째 학기가 지나고 어느 날, 일러스트레이션 전공을 담당하셨던 교수님께서 나를 따로 부르셨다. 재능이 있는 것 같다며 유학을 권하셨다. 뉴욕에 있는 모 학교. 당시 일러스트레이션이라는 전공이라는 것이 따로 없었던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해외에는 다양한 전공의 학교가 있다며.


잠시 유학 준비를 했었다. 팔자에도 없는 영어 공부도 하고, 뉴욕에 있는 학교들을 좀 더 심도 있게 알아보았다. 하지만 개인적인 이유로 결국 지원조차 하지 못했다. 당시 반드시 한국에 있어야 할 이유가 있었고, 차선책으로 나는 편입을 준비했다.


졸업 후 그렇게 무언가를 성실하게 준비한 적이 없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편입 실기 준비를 했고, 토익 점수가 필요한 학교 지원을 위해 죽도록 싫었던 영어 공부도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가장 가고 싶었던 대학의 예비 3번. 매년 그 학교는 예비번호가 넉넉하게 빠진다며 모두가 걱정하지 말라 했다. 하지만 결과는 예비 2번까지가 합격이었다.


내 생에 아마 가장 우울한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해본 적이 없는데, 이토록 뼈 쓰린 패배의 충격이라니. 그래도 부모님의 격려와 지원 덕분에 다시 기운을 차리고 이듬해에 다시 편입을 준비했다. 그래도 무언가 다른 경험도 쌓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 우연히 그전부터 좋아했던 '인터넷으로 재미있는 물건들을 판매하는 회사'에 아르바이트 생을 구한다는 공고를 보았다.


장기 아르바이트. 하는 일은 단순히 사진을 보정하고 제품 상세페이지를 만드는 알바였다. 최소 6개월 함께 할 사람을 원한다고- 지원을 했고, 합격을 했다. 나중에 팀장님 말을 들어보니 뭔가 자신감이 넘치고 건방진데, 이유가 궁금해뽑았다고 한다. (ㅎㅎ) 운영팀에서 6개월을 즐겁게 일했다. 젊은 회사, 젊은 팀이었고- 동갑내기 아르바이트생까지 있어 내가 입시생이라는 것조차 까먹을 정도로 즐거운 6개월을 보냈다. 그러던 중 입시 시기가 다시 다가왔고, 나는 알바를 그만두고 다시 입시에 매진했다. 하지만 다시 준비한 편입 결과는 좋지 않았고, 나는 입시와는 연이 없다고 생각했다.


편입에 실패하고 무언가 붕- 뜬 상태가 되었다. 계획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고. 1년간 쉬면서 여행이나 다니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아르바이트를 했던 회사 사람들과 술자리를 갖게 되었고 마침 1년 계약직을 뽑는다며, 팀장님께서 특별한 계획이 없다면 1년만 같이 일한다 생각하고 함께 일해보면 어떻겠냐고 하셨다.


디자이너나 일러스트레이터로 살아갈 줄 알았던 나의 첫 사회 경험은 참으로 엉뚱하게도 컨텐츠 기획자로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회사에서 20대의 절반을 보내게 되었다.




컨텐츠 기획자라 쓰고 멀티플레이어라 읽는다

처음 내가 팀에 들어갔을 때 우리 팀의 이름은 '상품 운영팀'이었다. 상품 사진을 촬영하고 보정하고, 상품 피드 페이지를 관리하고, 고객 이벤트, 홈페이지 내의 커뮤니티와 디지털 매거진을 운영하는 팀이었다. 그러다가 하는 일이 점점 커졌다. 초반에 내 업무는 상품 리뷰 혹은 인터뷰 기사를 기획하고 디자인하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회사 온라인 쇼핑몰 내에 매거진에 이런저런 컨텐츠를 기획하고 만드는 일이었다. 말주변 참 없던 내가 말발도 늘고, 얼굴도 두꺼워진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누군가를 인터뷰하려면 내가 질문을 하고 진행을 해야 한다. 내가 부끄럽다고, 할 말 없다고 가만히 있으면 진행이 되질 않는다. 사회성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던 내가 처음 만나는 타인과 대화를 이어나가는 법을 나는 그때 처음 배웠다.


그 후에 맡게 된 일은 각 시즌에 맞는 이벤트나 컨텐츠를 기획하는 일이었다. 크리스마스 때에는 홈페이지에 올라갈 이벤트 웹 페이지를 기획해 디자이너, 개발자분들과 진행하고- 상품이나 입점 브랜드 관련 일 프로모션을 있을 때에는 MD팀, 마케팅팀과 협력해 진행하고. 그때만 해도 우리 회사는 단순히 디자인 문구, 라이프 스타일에 관련된 것들을 파는 곳이었다. 그렇게 나는 2여 년의 시간을 그 분야에 익숙해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인디뮤직이 붐을 일기 시작했다. 아이돌이 주류를 이루었던 음악시장의 다양함에 목말라있던 대중들에게 '새로운 바람'이 분 것이다. 트렌드에 민감했던 우리 회사는 발 빠르게 움직였고, 그렇게 우리는 전혀 알지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인디뮤직, 그리고 음악 페스티벌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하나하나 인터넷을 검색해서 인디뮤직을 주로 하는 레이블들과 공연장의 목록을 뽑고, 담당자들에게 무턱대고 연락을 해 한 분 한 분 미팅을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인하우스 음악 브랜드/홈페이지 런칭을 위해 사내 디자인, 기획, 개발 팀과 협력해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2년 후 나는 디자이너보다 더 많은 뮤지션을 인터뷰했고, 각종 음악 페스티벌에 때로는 프레스로, 때로는 회사 판매부스의 담당자로 그렇게 음악 세계를 범접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나의 첫 직장에서 무엇을 했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을 것이다. 때로는 나는 에디터였고, 때로는 MD이기도 했고, 때로는 그저 담당자이기도 했고, 때로는 마케터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첫 직장을 오래 다닐 수 있었던 것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 나의 성격과 빠르게 변화하는 그 포지션의 업무 성격을 잘 맞아서였던 것 같다.


아무리 재미있는 직업도 권태기는 오기 마련. 디자인을 전공하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갈증이 생기기 시작했고, 어느 날 재미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기회는 아무도 모르게 찾아온다

사실 그날은 참 짜증 나는 날이었다. 어디서 한소리 듣고 오셔서 기분이 안 좋으셨던 본부장님 눈에 괜히 띈 죄로 느닷없이 욕받이가 된 그런 날. 분노를 참지 못하고 집에 오자마자 이직을 하겠다며 디자인 구인 사이트를 무작정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본 재미있는 공고. 'ㅇㅇ대학교 대학원 일러스트레이션 전공 모집'.


그래 내가 원래 하려고 했던 공부였지. 문득 내 마음에 불이 붙었다. 내가 가고 싶었던 대학의 내가 공부하고 싶었던 전공.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포트폴리오.


이미 상당한 시간 일러스트레이션에 손을 놓았던 나는 포트폴리오는 커녕 가지고 있는 작업의 수도 거의 없었다. 그래도 1차는 우선 서류 지원이고 포트폴리오는 1차 서류를 통과할 시 면접 때 지참하면 된 덴다. 아주 짧지만 그래도 포트폴리오를 준비할 시간이 있었다. 우선 지원하고 보는 거다.


1차 발표날, 회사 스튜디오에 혼자 몰래 들어가 휴대폰으로 대학 홈페이지에 접속해 합격자 발표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확인했다. 결과는 합격. 회사에서 소리 지를 뻔했다.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그날부터 밤낮 없는 포트폴리오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우선 아주 세밀하거나 퀄리티 높은 일러스트레이션 작품을 넣는 전형적인 포트폴리오 방식은 포기했다. 시간이 없었다. 대신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나'라는 사람을 표현할 포트폴리오. 그러다가 문득 대학 때 자기소개를 3단어로 해보라는 교양 수업 과제가 생각났다. 내가 그때 뽑은 단어는 '자유의 여신상', '피사의 사탑', 그리고 '만리장성'이었다. 나라는 사람의 성격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 그리고 아직 완전하지 않는 현재의 나 '피사의 사탑' 하지만 미래에는 우주에서도 보이는 유일한 건축물 '만리장성'처럼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서 빛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었다.


갑자기 떠오른 이 세 단어- 모두 유명한 여행지였고- 여행이라는 큰 콘셉트로 포트폴리오를 작업하기 시작했다. 비행기에서 meal을 담아주는 용기를 구했고, 그 사이즈에 맞는 작은 핸드메이드 책 3권을 만들었다. 나의 사상을 자유롭게 담은 '자유의 여신상' 책, 현재까지 내가 해온 불안하지만 나를 보이는 디자인/일러스트 작업을 담은 '피사의 사탑', 그리고 내가 미래에 담고 싶은 일러스트 작가의 작업을 오마주한 '만리장성'. 사실 지금 보면 내 포트폴리오는 일러스트 작업이라기보다는 순수미술에 가깝지 않았나 싶다.


너무 모험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포트폴리오를 들고 그렇게 떨리는 마음으로 면접을 보았고, 결과는 합격. 나중에 교수님께 여쭤보니 나의 당당함 혹은 건방진 태도가... (왜 항상 나는 뽑힌 이유가 비슷한 걸까) 마음에 드는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여러 사람을 인터뷰하고 내가 쌓은 다양한 경험이 신선한 작업 결과를 가져올 것 같다는 가능성을 보셨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대학원은 일주일 2번 저녁 수업에 출석하면 되는 특수대학원이었다. 그 말인즉슨, 회사에서 일주일에 2번 일찍 퇴근하는 것을 허가한다면 나는 학업와 일을 병행할 수 있는 것이다.


합격과 동시에 팀장님께 면담 요청을 했다. 회사에서 배려를 해준다면 회사를 계속 다니며 공부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학업을 위해 회사를 그만두어야 할 것 같다고. 물론 회사 입장에서는 오래 함께 일한 직원이 나가고 새로운 인원을 가르치느니 병행을 허가해 주는 것이 이득이었다. 조건은 일찍 퇴근하는 시간만큼 수업이 없는 날 보충하여 근무할 것. 그렇게 1년 반 정도 나는 학업과 일을 병행하였다.





내 인생을 바꾼 유럽여행

언제나 유학을 가고 싶었지만 항상 나의 목표는 뉴욕이었다. 처음 대학교수님께서 제안을 해주신 곳이 뉴욕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디자인 유학은 미국으로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회사와 학업을 병행하던 중 논물을 쓸 시기가 다가오자 체력이 한계에 부딪혔다. 선택의 시기가 왔고, 아쉽지만 나는 퇴사를 결정했다. 20대의 절반을 함께 한 회사였기에 나의 송별회는 결국 회사 전체 회식으로 번졌다. 그만두는 놈 뭐가 이쁘다고 내가 결제를 하고 있다-며 이사님께서 시원하게 법카로 1차를 결제해 주셨다. 나의 첫 직장 생활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눈문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마지막 여름 방학. 졸업을 하면 일러스트레이터나 디자이너로서 취업을 하거나 프리랜서로 일을 하려고 했던 나에게는 마지막 방학이었다. 무엇을 할까- 하다가 내 인생에 이렇게 길게 여행을 할 기회가 다시없을 것 같아 여행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때 마침 영국에서 어학을 하며 유학을 준비하고 있던 동창이 있었다. 영국도, 그 친구가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던 순수미술이라는 분야에 대해서도 잘 몰랐지만, 그래 남들 다 하는 유럽여행 나도 한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그렇게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참고로 그 당시 나의 영어실력은 요즘 유치원생보다도 못했다. 참 용감했다.


한 달간 영국을 중심으로 머무르며 다양한 전시를 봤다. 특히 각 미대의 디그리쇼를 하는 시즌이라 많은 전시를 볼 수 있었다. 즐겁고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유학을 하고자 했던 나의 마음에 다시 불씨가 당겨졌다.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왔고, 정확히 1년 뒤 논문을 마친 나는 영국행 비행기에 다시 몸을 실었다.





영어 알레르기와 영국 석사 유학

수능 때도 가장 낮은 등급을 받은 것은 외국어. 마지막까지 개인 과외까지 받았건만, 영어라는 놈은 참 친해지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영국에서 유학을 하려면 영어점수가 꼭 필요했고, 인간이란 본인이 정말 의지를 가지고 원하면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영국 남쪽,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9개월간 홈스테이를 하며 어학을 했다. 떠듬떠듬 영어로 간신히 의사소통하던 내가 그래도 제법 사람처럼 말하는데 꼬박 1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고난의 시간이었다. 그래도 단순히 독해/문법만 공부할 때보다는 '말하기'가 있는 언어 수업이라 즐거웠고, 홈스테이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도움을 받아 영어 실력을 늘려나갈 수 있었다.


원하던 아이엘츠 점수를 받고, 포트폴리오를 제출하고, 면접을 보고, 오퍼를 받고.

물가 비싼 영국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하지만 모두가 사랑하는 도시, 런던에서의 유학 생활이 시작되었다.


사실 나는 석사 코스에서 꼭 이렇게 해야겠다는 명확한 계획이 없었다. 단순히 순수미술이라는 분야에 대해 더 알고 싶었고, 작업을 하고 싶었다. 우리 학교는 1년간의 석사 동안 전 석사생에게 작업 공간을 마련해 주고 각종 세미나나 공개 강의를 제공했다. 세부전공이 나누어져 있는 타 대학과는 다르게 우리 학교의 순수미술 석사과정은 페인팅부터 비디오, 설치까지 다양한 학생들이 함께했다. 학생으로 온 것이니 새로운 작업에 도전을 해보라는 것이 우리 코스 디렉터의 모토였다. 덕분에 나는 그림도 그리고, 사진도 찍고, 오브제로 작업도 하고- 하고 싶은 작업 원 없이 해봤다.


코스 디렉터와의 마지막 면담이 있던 날. 사실 나는 졸업 작품으로 1년간 진행해온 사진 프로젝트를 전시하려고 했었다. 그러다가 문득 교수님께서 1년간 거의 이 작업만 보여준 것 같은데 다른 작업은 없냐?라고 물으셨다. 물론 개인적으로 다양한 작업을 했지만, '연습'이었기에 한 번도 교수님께 보여드린 적은 없었다. 한참 나의 '장난'같은 다른 작업을 보신 교수님께서 재미있다며 학교 내 빈 공간을 직접 빌려 내게 주셨다. 이곳에서 작업하며 그동안 작업한 것들과 새로운 작업들을 원하는대로 설치해 보라며. 그렇게 나는 그곳에 며칠간 작업했고, 교수님의 열혈 홍보(!) 덕에 다른 학생들도 나의 작업을 구경하러 왔다. 그렇게 나의 장난 같은 도전과 교수님의 재미있는 열정이 만나 나의 졸업 작품이 정해졌다.


1년이라는 시간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고, 정말 영혼까지 불사른 나의 2년 영국 생활은 끝이 났다. 다들 영국을 떠나는 것을 아쉬워했는데, 당시 나는 뭔가 다 불살랐다는 느낌이 스스로 들었는지, 몸도 마음도 다 소진되어 하루라도 빨리 한국에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슬기로운 백수생활

한국으로 돌아와 3개월 정도는 정말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먹고, 자고, 티비 보고, 가끔 산책하고- 가 일상의 다였다. 평온하지만 마음은 무거운 시간이었다. 비싼 돈 들여 석사까지 하고 왔는데 백수라니. 우리 집이 재벌도 아니고 부모님께 면이 서지 않았다.


집에만 있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영어라도 잊지 않게 회화학원이라도 다니라는 엄마의 제안에 회화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동안의 작업을 정리해 여기저기 전시 공모에 지원을 하기 시작했다. 경쟁은 치열했고, 이제 막 순수미술계에 발을 담근 햇병아리의 나에게는 무엇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조차 가늠이 되질 않았다.


육체적으로는 매일매일 편하고 즐거운 백수생활이 이어졌지만 정신적인 방황이 시작되었다. 고민이 많았던 시기. 다시 무언가에 '도전'할 목표가 필요했다. 새로운 것들을 찾기 시작했다. 뭘 하면 좋을까. 그러다가 떠오른 것이 런던 유학시절 했던 '베를린 여행'. 디자이너와 예술가에게 핫한 도시, 독일이지만 영어로 어느 정도 생활이 가능한 도시. 최상의 조건이었다. 단지 문제는 '비자'. 예술가 비자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확한 정보를 한국에서 얻기란 너무나 턱도 없었고, 결국 가장 빠른 방법은 워킹홀리데이 비자 혹은 어학연수였다.


독일이라는 나라에서 쭉 살 생각도, 언어나 문화에 그다지 흥미도 없었던- 그저 베를린이 좋았던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조건은 워킹홀리데이 비자였다. 그런데 문제는 나이.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만 30세까지만 지원할 수 있었고, 나의 만 30세는 고작 한 달이 남은 생황이었다.


그날부터 부랴부랴 부모님께 나의 생각을 말씀드리고, 워킹홀리데이 비자에 필요한 각종 서류들을 준비해 나갔다. 그러면서 동시에 재미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지원했던 전시 공모 중 한 곳에서 한 달간 개인전을 열어주겠다고 연락이 왔다. 합격이었다. (이 얼마 만의 긍정적 소식인가!)


그렇게 전시와 비자 준비로 정신없는 한 달을 보냈다. 그리고 불과 만 30세가 끝나는 생일 며칠 전 워킹홀리데이비자를 발급받았다.


개인전을 진행함과 동시에 독일 살이 준비에 들어갔다. 우선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가지만 혹시 베를린이 마음에 든다면 아티스트 비자를 지원할 생각도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필요한 서류들을 미리 뽑아나가기 시작했다. 나보다 먼저 베를린 생활 경험이 있는 친구도 만나 조언도 구하고, 인터넷에서 미리 알아볼 수 있는 자료란 자료는 싹 다 긁어모았다. 마침 영국 석사과정 학위수여식이 7월에 있어 이미 출국할 계획이 있었고, 그렇게 나는 한국 리턴 티켓 대신 베를린 티켓을 끊어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구텐탁 베를린, 프리랜서 혹은 백수

런던에서 학위수여식을 기다리며 3주간 지내고, 한참 무더웠던 7월 베를린에 입성했다. 우선은 베를린도 독일어도 독일이라는 나라도 모르기에 몇 주간 한인 민박집에 머무르며 장기간 살 곳을 구했다. 집을 구해야 거주지 등록도, 은행 계좌도 열수 있으니 우선 집을 구하는 것이 1 순위. 바쁜 와중에도 베를린에 왔다는 사실이 새삼 신나 여기저기 참 열심히도 돌아다녔다.


20대 독일 여자 그리고 고양이 2마리와 함께 살았던 나의 베를린 첫 보금자리. 베를린에서 가장 만나기 힘들다는 베를린 출신의 독일 친구였다. 그 친구의 도움을 받아 거주지 등록도 하고, 베를린 살이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나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기 시작하면서 독일어 수업도 알아보기 시작했다. 독일어가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고 베를린에 무작정 살아보겠다고 갔으니, 참 용감했다.


집에서 가까운 어학원에 등록을 했고, 베를린인 덕분인지 미테라는 지역 특징인지 정말 많은 디자이너, 예술에 종사하는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중 무엇보다 소중한 인연은 같은 어학원 반에 있었던 한국인 언니였다. 예술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 1년간 베를린에 머무른다는 언니는 한국에서 이미 오랜 경력으로 자리를 잡은 선배이자 베를린에서 처음 만든 한국 인연이었다. 사는 곳이 가까웠던 덕에 언니와 나, 그리고 언니와 함께 레지던시를 하고 계셨던 작가분까지- 우리는 전시도 함께 보러 다니고, 저녁도 먹고, 술도 마시며 즐거운 추억들을 쌓아나갔다. 예술 쪽에서 종사하는 사람이라고는 같이 영국에서 석사를 했던 동기들이 다였는데, 언니 덕분에 베를린에서 활동하시는 다른 한국작가분들도 알게 되었고, 다양한 한국 친구들도 만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한 인연이었다. 너무나 고마운 언니.


정말 원 없이 놀았다. 원 없이 전시 보고, 밤늦게까지 어울리며 술도 마시고, 마치 학창 시절도 돌아간 것처럼 어학원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다른 작가분들 작업실에서 함께 게임도 하고, 작업 이야기도 하고- 정말 내 인생에 가장 슬기로운 백수생활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몇 개월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베를린이 마음에 들기 시작한 나는 아티스트 비자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포트폴리오를 정리하도, 추천서들을 받고, 독일 유학 경험이 있는 작가분께서 독일어가 부족한 나를 위해 기꺼이 비자청까지 함께 가주셨다. 정말 많은 사람들과의 소중한 인연과 도움 덕에 나는 무사히 아티스트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이제 나는 프리랜서, 프로젝트를 찾기 시작했다. 우선 전시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았다. 운 좋게도 한곳에서 작게나마 개인전을 하고, 몇 번의 단체 전시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수입이 없었다. 외동의 특권, 나는 점점 부모님의 등골 브레이커가 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께 최후의 통첩을 받았다. 내가 행복하다면 외국에서 사는 것은 찬성, 하지만 내가 정말 외국에서 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면 경제적으로 스스로 자립하라는 것이었다. 수긍이 너무나 가는 제안이었다. 제한 기간은 6개월. 6개월 내에 나는 직업을 구해야 했다.





첫 프리랜스 디자인 프로젝트

종종 프리랜서로 디자인 작업을 해왔지만, 사실 디자이너로서 꼭 커리어를 쌓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처음에는 커뮤니케이션 매니저나 컨텐츠 매니저 포지션도 알아보았다. 하지만 문제는 나는 독일어도 되지 않았고, 독일 시장에 대한 경험이 전무했다. 쉽지 않았다. 영어로 취직이 가능하면서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경험과 기술을 잘 사용할 수 있는 분야, 디자인이 답이었다.


나의 첫 커머셜 디자인 프로젝트는 정말 엉뚱하게도 한국/독일 문화 탄뎀에서 만난 독일 친구로부터 들어왔다. 처음에는 그다지 친한 사이가 아니었는데, 점점 친해질수록 많은 공통 관심사를 발견하였고 무엇보다 이 친구도 커리어 변화를 준비 중이었고- 나도 구직을 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우리의 더욱 가깝게 만들어주었다.


이 친구는 전혀 다른 일을 하다가 IT 쪽에서 일을 해보고 싶다며 작은 디지털 에이전시에 취직을 했다. 디자인 작업도 하는 에이전시인 만큼 나중에 같이 프로젝트를 하면 좋겠다는 말은 했었지만, 이 친구의 회사는 100% 독일어. 나의 독일어 실력으로는 턱도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웹디자인을 하는 프로젝트에 디자이너가 필요한데 나를 추천하고 싶다며 이력서를 달랜다. 나는 이력서와 함께 나의 독일어 실력이 제로에 가깝다는 부분을 꼭 어필해달라고 했고, 그렇게 엉겁결에 면접을 보게 되었다.


대표와 면접인 줄 알고 갔는데, 간단한 몇 가지 질문 후 프로젝트 브리핑이 이어졌다. 그리고 3일간 온 사이트 근무가 이루어졌다. 베를린에서 개인 클라이언트에게 들어오는 의뢰가 아닌 에이전시와 일하는 제대로 된 첫 프로젝트. 금액조차 어느 정도 불러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었는데, 친구가 나의 경력을 잘 어필해 준 덕분에 꽤 많은 금액을 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몇 달간은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겠다- 생각했다. 클라이언트가 내 디자인을 마음에 들어 한 덕에 3일이었던 프로젝트는 길어졌고, 몇 달간 함께 일을 했다. 실질적으로 출근한 날은 20여 일 정도였지만, 내가 벌어들인 수입은 여유롭진 않지만 1년간 일을 하지 않아도 버틸 수 있는 정도였다. 친구에게 너무나 고마웠다. 지금도 이 친구는 나의 베를린 생활을 더욱 슬기롭게 만들어 주고 있는 좋은 베스트 프렌드이다.


그렇게 한숨 돌려도 되겠다. 부모님께 면은 서겠다. 생각하던 중 뜻밖에 연락을 받았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이력서를 종종 넣었는데 그중 한 곳에서 연락이 온 것. 업무도 디자인과 일러스트를 병행할 수 있는- 내가 원하는 방향이었다.


프로젝트 일을 하던 도중에 가서 면접을 보고 디자인 테스트를 보고- 그렇게 베를린에서 디자이너로서 첫 정식 취직을 하게 되었다.





베를린 취업기- 비주얼 디자이너에서 브랜드 디자이너로

첫 직장은 직접 제품을 생산하여 온라인으로 판매하는 D2C 회사였다. 총 4명의 디자이너가 있고, 모든 디자이너가 그래픽부터 웹까지 다양하게 작업을 함께 했다. 물론 다들 주력 분야는 있었다. 나의 주 분야는 제품 디자인. 새로운 제품에 들어가는 일러스트부터 디자인까지 책임을 지는 업무였다.


사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마지막까지 나와 다른 한 후보가 경쟁했는데 당시 본부장이 내가 테스트 때 제출했던 일러스트레이션을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 해 제품으로 꼭 출시하고 싶어 나를 고용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일러스트는 보완하여 결국 제품으로 출시되었다.


입사한지 3개월, 스타트업이다 보니 이미 직장 생활 경험이 있는 나에겐 아직 미흡한 부분도 개선해야 부분도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일 시급해 보였던 것은 브랜딩. 그저 창업자가 소소하게 시작해서 갑자기 성장한 사업 덕분에 이 회사에는 제품만 있을 뿐 '브랜드'라는 것이 없었다. 나는 내가 3개월 동안 느낀 부분과 분석, 그리고 개선점에 대해 정리해 프레젠테이션을 했고, 결과는 모두의 동의를 이끌어 내었다. 덕분에 나는 이제 막 입사를 한 디자이너였지만 아이디어를 최초로 고안한 사람으로서 리브랜딩의 프로젝트를 본부장과 함께 리드하게 되었다.


이전 회사에서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고 웹사이트를 개선하는 일은 수도 없이 했지만, 나 역시 리브랜딩은 처음이었다. 많은 이해관계자가 있었고, 6개월간의 여정은 쉽지 않았지만 결국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후 나의 직함은 비주얼 디자이너였지만 '브랜드'라는 나만의 영역이 생겨 브랜드 관련 업무가 있으면 나에게 주어졌다. 일 년 정도 지난 후 회사가 큰 기업에 인수되면서 새로운 홀딩컴퍼니가 생겼다. 새로운 회사가 생겼으니 당연히 로고 등 CI가 필요했다. 직원 중 브랜딩 경험이 있는 디자이너는 내가 전무했으니 당연히 그 프로젝트 역시 나에게 주어졌고, 나는 새로운 회사의 로고와 그에 필요한 스타일 가이드를 디자인했다. 3년 정도의 직장 생활 중 정말 굵직한 프로젝트를 무려 두 번이나 진행하는 행운을 가지게 되었다.


나의 브랜딩에 대한 관심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회사에서도 브랜드에 대한 업무를 계속할 수 있었지만, 나는 브랜드 디자이너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우리 회사는 당시 브랜드 매니지먼트에 대한 계획도 없었고 인력도 없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커리어에 대해 고민하고, 답답함을 느끼던 차에 나의 첫 이직의 기회가 찾아왔다.


몇몇 회사와의 면접, 디자인 테스트를 통과한 후 최종 두 곳에서 오퍼를 받았다. 그래픽과 웹디자인을 고루 섭렵한 덕에 한 곳은 브랜드 디자이너 또 다른 한 곳은 UX/UI 디자이너 포지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브랜딩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나는 결국 브랜드 디자이너 자리를 선택했다. 주니어 디자이너(인턴) 한 명과 둘이 일하는 작은 부서이지만, 리드 디자이너로서 브랜드의 Look & Feel부터 전략까지 참여할 수 있는 부분이 좋았다. 브랜딩에 관련된 직접적인 업무 관계자가 나밖에 없는 덕에 대표와 디렉트로 일하며 제품부터 마케팅에 이르는 다양한 브랜딩 터치포인트에 관여할 수 있었다.



베를린 이직기- 브랜드 디자이너에서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브랜드 디자이너로써 일하며 조금 더 브랜드 디자인뿐 아니라 브랜딩, 그리고 브랜딩 전략에 관여하여 일을 하며 한창 '브랜딩'이라는 분야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6개월 남짓, 릴렉싱한 회사분위기도 좋고, 자유롭게 시간을 매니징할 수 있는 탄력적인 근무시간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보통 한번 회사에 들어가면 3년 정도는 일하는 터라, 이직 생각도 없었고- 이제 막 들어간 회사에서 한참 열정을 불태우며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링크드인에서 재미있는 모집 공고를 발견했다. 패션 e-commerce에서 시니어 프로덕트 디자이너를 뽑는다는 공고. 현재 직장이 꽤나 만족스러웠지만, 새로운 분야, 새로운 도전! 마음이 끌렸다. 그렇게 지원을 했고- 단 일주일만에 모든 인터뷰, 디자인 과제를 마치고 그렇게 새로운 계약서에 싸인을 했다.


아무리 인생 예측불허라지만 이렇게 브랜디 디자이너 포지션을 뒤로하고 7개월만에 전혀 다른 분야로 이직을 하게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새로운 도전은 늘 나를 설레게 만들고, 나는 그런 설렘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즐기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2022년 나의 '현재'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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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외계인'은 학생 때 처음 그린 일러스트에 적은 단어였다. 지구에 살고 있는 지구인이지만, 늘 방랑하고 방황하고- 남들과 다른 생각으로 다른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가는 나를 누군가는 '이방인'이라는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을까 하는 어린 마음의 고민과 두려움. 스스로가 지구에 살고 있는 지구외계인이라 느꼈던 내가 나에게 주었던 첫 별명.


전공이 각각 다른 3개의 학위.

한 번도 같은 타이틀을 가진 적 없는 커리어 포지션.

그리고 서울부터 바다를 건너고 하늘을 가로질러 경험하게 된 두 개의 나라와 세 개의 도시.


스무 살 이후의 나는 절대 머무르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내가 처음 스스로에게 주었던 별명처럼 나는 지구라는 곳에서 나만의 여행 경로를 찾아 도전하고 모험하는 삶을 살았고,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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