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니 오델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읽기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본 적이 있는가? 실제로 나는 정말 정말 열심히 이것을 시도해본 적이 있다. 초등학생 때였다. 어느 순간 내 뇌 혹은 마음은 무엇인가로 가득 차서 완전히 공백의 상태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정말 안간힘을 써봤다. 네모난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두 눈을 꼬옥 감아보기도 하고 생각하지 않으려 뒹굴뒹굴 굴러보기도 했지만 애를 쓰면 애를 쓸수록 떠오르는 것은 생각하지 말자는 생각뿐이었다.
이 괴로운 시지프스의 노동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으니 자동기술법이라는 것을 고안해 낸 초현실주의자들이다. 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들은 아무 의미를 갖지 않는 언어/이미지 단위들을 되는대로 뱉어내거나 완벽한 우연에 기대 작품을 제작하려 했다. 의식을 벗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것을 의식하는 순간 이는 너무나 괴로운 과업이 되어 버린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이라는 매력적인 제목의 책은 이와 같은 시도들에 해결책을 내줄 것 같지만 표지에 쓰인 영어 원제인 <<How to Do nothing>>에서 Do가 대문자로 강조되어 있는데서 알 수 있듯 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은 열망만큼이나 강렬하게 무엇인가 하기를 촉구하는 책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시도가 기계론적 세계관이 지배하게 된 현대의 초입에서 "이성에 의한 일체의 통제"를 벗어나고자 한 아방가르드(전위)였던 것과 같이 제니 오델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은 관심 경제(attention economy) 사회에서 관심의 포획자들에게 쉴 새 없이 순간을 빼앗기고 있는 우리들이 '일상에 대한 일체의 통제'를 되찾기 위한 급진적인 행동강령이며 사회운동마저 소셜미디어의 해쉬태그로 전락한 현재에 외치는 절박한 안티테제이다. 실제로 원서는 '관심 경제에 저항하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이야기는 장자의 '쓸모없는 나무 이야기'(소요유)에서 시작한다. 이 쓸모는 사실 당연히도 나무가 아닌 인간의 이야기인데 이 문제는 우리가 더 이상 노동자가 아닌 '사업가 되어야 한다'라고 생각하게 되며 발생했다. 생산성과 효율에 대한 압박은 더 이상 산업이 아닌 개개인의 노동을 '식민화'한다.
독일의 사회학자 하트무트 로자는 <<소외와 가속>>에서 현대의 가속화된 시간에 대해 설명하는데, 영원한 삶에 대한 희구가 가속의 사회적 동력 중 하나라고 말한다. 더 이상 내세의 평안을 기도하며 살아가지 않는 세속적인 현대인들은 영원한 삶을 약속받는 대신 '갓생'을 살기를 원한다. 즉 과거의 사람들이 희구했던 영원한 삶은 충만한 삶에 대한 욕망으로 대체되었다. '삶의 풍부함, 충만함, 질은 살아 있는 동안 경험의 총합과 깊이로 측정'되며 이러한 관점에서 '좋은 삶이란 충족된 삶, 즉 경험이 풍부하고 역량이 계발된 삶'이다.
이렇게 정량의 노동이 주는 안정성, 내세로 유예된 행복에 대한 믿음이 이 사라진 시대에 개인의 24시간은 모두 생계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충만한 삶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경제적 자원이 되었다. 관심 경제가 우리의 24시간을 식민화할 수 있게 된 이유이다.
과거의 급진주의자들은 기계를 부수거나 파업으로 생산을 멈추며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에 저항했다. 그러나 노동이 개별화되고 개인이 브랜드가 되어가는 사회의, 샌드위치 가게의 노동자가 아닌 샌드위치 아티스트가 되고 배달 노동자가 아닌 라이더가 된 사람들은 어떻게 이와 같은 생산방식에 저항할 수 있단 말인가?
로자는 사회적 가속이 소외의 잠재 조건이 되며 이 소외에 대한 극단적 형태의 저항이 바로 자살이라고 말한다. 고도로 발전된(=가속화된) 사회의 자살률을 볼 때 동의하기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다. 또한 가속화된 사회는 주체와 세계와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변형시키고 비튼다. 로자는 가속화된 사회에서 비틀린 세계와 나와의 관계를 다시 맺는 대안적 방법으로 Resonanz(공명)을 제안한다. 제니 오델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제안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자 계급이 '즉자적 존재'에서 벗어나 '대자적 존재'로 각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위 운동권은 이 대자적 존재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역사의 발전과정과 사회적 생산구조를 학습하고 학습시켰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의문을 지닐지 모르겠다. (하잘 것 없게도) 지나가다 새의 소리를 듣는 것이,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구분해 내는 것이. 오늘 아침 나에게 불어오는 바람의 온도와 질감을 피부로 느끼고 자각하는 것이. 내가 사는 곳을 행정구역이 아닌 내 지역의 생태로 이해하는 것이. 즉 가속의 반대방향인 감속의 방향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 (로자의 표현으로는 공명하는 것)이 저항의 방법일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그 모든 '큰'일의 시작이 바로 관심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나는 탐조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올 한 해 동안 새를 관찰한다는 사소한 행위가 가져오는 나비효과를 실감했다. 추천글의 김보라 감독은 '인식이 확장되면 더 많은 것들을 온전히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 트라이앵글 소리 정도로 들리던 세상이 실은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합주였음을 깨닫게 된다'라고 썼다. 저자도 탐조가 실은 '보는 것'이 아닌 '듣는 것'에 대한 행위라고 말한다.
제니 오델이 말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다름 아닌 '나'와 '그것'의 데카르트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나'와 '너'로 이루어진 동등한 행위자들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자는 적극적인 저항의 제안이다. 저자는 바틀비의 '안 하는 것을 택하는 것'의 저항성을 고찰한다. 단순한 안티테제가 아닌 제3의 길을 여는 것이다. 관심 경제에 맞서 '거부'를 택하는 것은 일견 직접적인 저항인 듯 보이지만 거부 또한 선택권이 있는 사람들의 특권임을 저자는 잊지 않는다. 대신 '무주의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라는 개념을 통해 새로운 시각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호크니가 '키클롭스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일안 시점의 한계를 지적하며 다채로운 다시점의 회화를 제시했듯 관심 경제 속에 끊임없이 포획당하는 우리의 삶 속에서 그 관심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탐조를 취미로 하는 나는 자연을 관찰하는 것을 예시로 드는 작가의 주장에 완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내게 어떻게 그렇게 새를 잘 찾느냐고 말한다. 그런데 새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순간 있는 줄도 몰랐던 '무주의 맹시' '무주의 맹음' 속에서 마치 팝업처럼 수많은 정보가 튀어 오른다는 것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저자의 표현대로 포켓몬 고를 하듯 체크리스트를 가지고 새의 종류를 '도장깨기'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방향의 맹목성에 빼앗겨 있던 나의 관심을 돌리는 것이다. '그것'이 아닌 '까치'의 존재를 발견하고 그와 나의 평등하고도 동등한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 인류세를 살아가는 인간이 진정으로 인식해야 하는 자신의 위치일 테다.
시각예술가이자 새를 관찰하기를 즐기는 저자의 글은 지구 반대편의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동양의 철학자와 그리스 철학자, 60년대 문화운동과 흑인 민권운동, 소로우의 불복종과 호크니의 방법, 레베카 솔릿과 해러웨이를 둘러가며 차근차근 쌓아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법에 대한 소개가 정성스럽다. 책의 제목을 보고 편안한 에세이를 기대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영문 원제의 뉘앙스를 살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가치를 쫓아가는 이 세계에서 무가치한 것을 하는 법에 대한 책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