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을 도둑맞아 비로소 쓰여진 여행의 짧은 기록들 6
나는 낯선 이에게 3유로를 건네줄 수 있는가?
바티칸 뮤지엄 예약이9시라 아침 일찍부터 도시락을 싸고 서둘렀다. 약간 익힌 체리토마토와 방울만한 모짜렐라 치즈를 올리브유와 함께 푸실리와 뒤적이기만 했는데, 그것뿐인데도 맛이 엄청났다. 그리고 발사믹 글레이즈와 후추, 올리브유로 샐러드드레싱을 한 도시락을 쌌다. 도시락통이 없었지만 그라탕을 할 때 쓰는 은박용지가 꽤 쓸만했고 뚜껑까지 척척 끼우도록 잘 나와있었다. 만반의 준비를 했다. 로마 패스가 끝난 오늘 어제 표 세장을 사두려다 사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트램을 타고 지하철을 타러 가야되는데 표를 트램 안에서 살수 있다는 말이 생각나 일단 타서 두리번거리다 못찾고 지하철에서 사야지 했다. 로마 무임승차을 검색해보니 벌금이 100유로 라기에 마음이 급해졌다. 지하철역에 도착 할 무렵 비앤비 호스트인 리사에게서 메세지가 왔다. 거실 바닥에서 발견한 내 지갑을 주방 식탁 위에 올려놨다는 메세지였다. 지갑? 봤더니 지갑이 없었다.
9시 예약, 트램이 출근시간 교통체증으로 이미 늦어서 서둘러 가야 하는 시간이었는데, 지금 가야하는데 지금 다시 그 교통체증을 뚫고 돌아가야 한다니. 가방을 탈탈 털어봤다. 1유로 동전 세 개면 다녀올 수 있는데 어쩜 무심하게도 3유로가 없다.
그때부터 절박한 마음에 한국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자 두 팀을 만났는데 둘 다 보기좋게 거절했다. 한 팀(2인)은 동전을 바꾸러 가는 길이라고 했고 한 팀(4인) 은 방금 핸드폰을 잃어버려 자기들도 바티칸을 포기했다니 그래 당황했겠지. 그래도 한국사람 이어야 계좌로라도 돈을 보내 줄 수 있을게 아닌가?
매표소에서 내일 돈 줄 테니 표 두 장만 달라, 택 도 없다. 티켓 머신 앞의 두 이탈리아 인에게 야멸차게 거절당하고 돌아가는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무임승차 100유로의 벌금과 (걸릴 가능성 희박) 20유로의 바티칸 티켓을 저울질 해봤다. 무임승차가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예약 변경이 가능하냐는 메일을 보내고 다시 지갑을 찾아 숙소로 돌아갔다.
다행이 바티칸엔 문제없이 들어갔다. 그리고 바티칸 미술관은 정말 멋진 곳이었다. 사족을 달자면 바티칸에는 당연히 정제된 기독교 미술품만 있을 것이라는 내 예상을 깨고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유물이 굉장히 많았는데 그건 교황 몇세인가가 반대를 무릅쓰고 카톨릭 이전의 역사를 모두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라 한다. 때문에 바티칸은 서양미술사책을 그대로 공간에 펼쳐둔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 멋졌다.
이날 아침의 황당한 기억은 잘 잊혀지지 않는다. 아직도, 그 지하철에서 사람들에게 어렵게 도움을 청하던 나와, 몇 마디 듣자마자 떨떠름하게 나를 보던 시선이 생생하다. 아직도 나는 그것이 어려운 요청이었는지 잘 가늠할 수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도움을 줄 것 같은데,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