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을 도둑맞아 비로소 쓰인 여행의 짧은 기록들 7
비어가르텐
찐득한 바닷바람이 달라붙는 덥고, 덥고, 덥고, 더운 이탈리아에서 어서 독일로 가기만을 고대했다. 뮌헨 날씨를 검색해 보며 북쪽으로 갈 날만을 기다렸는데, 정말 뮌헨의 깨끗한 거리와 여유 있는 공기, 친절하고 정도 있는 사람들, 숙소의 쾌적한 컨디션이 정말! 정말! 정말 좋았다. 그리고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그 유명한 ‘독일 맥주’를 먹기 위해 폭풍 검색을 했다.
교양 독일어 수업을 할 때 독일에서는 유명한 양조장이 대대로 내려온다는 것을 알았는데, 뮌헨에는 여러 유명 양조장들이 모여있다. 독일의 맥주축제 옥토버페스트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뮌헨의 도시는 깨끗하고 쾌적하고 도시 곳곳에서 예쁜 꽃들을 자주 마주쳤다. 현대식 건물이 많던 프랑크푸르트와 달리 독일식 건물들이 많았다. 특히 시청사가 있는 마리엔 광장의 골격이 튼튼하면서도 장식적인 독일의 건물들, 밝고 여유 있는 분위기, 거리 어디에나 대낮부터 테라스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분위기가 아주 흥겨웠다.
첫 번째로 방문한 아우구스티너는 비어가르텐(맥주+정원)으로 유명한데, 역 근처에 있는 아우구스티너를 방문한 순간 정말 고루한 표현이지만 입이 떡 벌어졌다. 사실 나는 비어가르텐을, 옥토버페스트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는 것을 그것을 실제로 보는 순간 알게 됐다. 내가 생각하던 맥주집이 전혀 아닌 것이다. 서울 시청광장의 반 정도 될까? 정말 커다란 숲 속에 끝도 없이 기다란 테이블이 펼쳐져있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무려 1L짜리 맥주잔을 들고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일행 별로 각자 다른 테이블을 쓰지만 꼭 일행끼리 특별히 맥주를 마시지 않고 일상적이기 때문이라 그런지, 혼자, 둘이 온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자연스레 옆자리에 앉아서 마시는 분위기였다. 나는 셀프 바에서 작은 맥주를 주문하려 했으나 서버는 비어를 달라는 내 말을 듣더니 턱 하고 1L짜리 맥주를 얹어주었다. 쉴 새 없이 맥주를 따라 바에 얹으면 또 쉴 새 없이 사람들이 가져갔고 테이블에 놓인 빈 맥주잔들은 작은 트럭에 담아 운반됐다. 독일 맥주는 라거가 주류라는데 남쪽 지방이라 그런지 아우구스티너의 맥주는 밝은 황금빛을 띠고 있었고 맛은 가볍고 달았다. 실제로 달았다.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나는 픽셀로만 보던 슈바인 학센과 맥주를 주문해 자리에 앉았다. 블론드 머리를 멋지게 뒤로 넘긴 아저씨에게 양해를 구하니 물어보는 게 더 이상하다는 듯 흔쾌히 옆자리를 내주었다.
이 아저씨가 여행 중반이 넘어 처음으로 재미있게 대화를 나눈 알폰소이다. 알폰소는 40대의 룩셈부르크 사람이다. 룩셈부르크에서는 불어와 독어를 사용하고 룩셈부르크어는 방언이라 한다. 이 아저씨는 불어 독어 외에 이탈리아어와 영어, 그리고 약간의 에스파뇰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말을 할 때마다 불어가 툭툭 튀어나와서 내가 응? 하는 표정을 지으면 그걸 영어로 떠올리려고 무진 애를 썼다. 예를 들어 “Jardin”이라고 말해 내가 응? 하니 “A.... Garten?" 했을 때야 비로소 ”아! Garden!"이라고 하는 상당한 혼돈 속의 대화였지만 그만큼 재미도 있었다. 알폰소는 독일에 대해 이야기하며 하지만 독일이 그리 좋은 나라는 아니라고 했다. 왜냐면 룩셈부르크에서는 10대 후반에 독립해 일하기 시작해서 40세면 내 집 마련 가능한데(정확히 렌트를 끝낼 수 있다는 말) 독일은 50세나 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봐도 이렇게 말한 게 맞는데, 나는 내가 제대로 알아듣는 것이 맞는지 어리둥절했다. 40세면 렌트를 다 갚을 수 있다고? 한국은 100살이 돼야 된다고!! 하니 알폰소는 잉?!! 말도 안 돼!!!!! That's crazy!!
알폰소의 아들은 22살인데 19세부터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최근에 차를 사줬더니 음주운전을 했다고 고개를 내저으며 그래도 조금은 괜찮아한다. 나는 한국에서는 고등학생의 90프로가 대학에 진학한다고 했다. 아마 알폰소는 내가 약간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90%는 과장이 좀 심했나 싶긴 하지만.. 그리고 알폰소는 내게 결혼을 했냐 물었다. 아니라고 하니, 하기야 뭐 결혼을 안 해도 동거하며 살아도 되지 라며 네가 남자 친구와 동거를 하든, 여자랑 살든 무슨 상관이겠니? 하는 것이다. 여자와 결혼? 그게 룩셈부르크에서는 가능하냐 물으니 당연히 가능하단다.
40대 중반이 넘은 아저씨가 이런 대사를 하다니?! 뭔가 유럽 선진국의 문화를 실제 체험하니 너무 신기했달까, 사실 이 이야기까지 온 것은 그가 내게 북한 사람인지 남한 사람인지 물으며 시작되었는데 내가 북한 사람을 본 일이 있냐며 한국에서 북한은 아주 접근하기 어렵다고 말한 것에 대해 그 말을 오해했는지, 열변을 토했는데 내용은 '위험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었다. 무슬림도 그렇고 북한도 그렇고 그들도 자기 가족에게 총을 겨누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위험한 사람은 없다고, 위험하다면 자긴 미국 군대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거기서부터 알폰소와의 대화는 미국의 중동정책 비판으로 흘러가며 급 물살을 타기 시작한 것이다.
알폰소도 내가 맘에 들었는지 점점 아주 흥이 나서 이야기했는데, 옆 테이블에 한 이탈리아 가족이 와서 자리에 앉았다. 그들이 이탈리아어로 대화하는 것을 듣자 알폰소가 이탈리아 말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챠오”라고 한다) 그러가 그 이탈리아인들이 반갑고 놀라운 표정을 지었고 알폰소는 주인장 마냥 양팔을 벌리며 이탈리아 말로 환대의 말을 했다. 그런데 그러자 옆 테이블에 있던 한 동양인이 역시 이탈리아 말로 크게 말했다. “나도 이탈리아 말을 해!”라는 반가움의 표시 같았다. 그 여자의 말을 듣고 알폰소는 나를 가리키며 “오 얘는 한국에서 왔어”라고 날 소개했다. 그러자 그 여자는 “나는 이탈리아어를 하는 중국인이야”라고 말했다. 내가 “니 하오” 하고 인사하자 그 여자는 “안녕하세요”라고 화답했다.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알폰소는 흥분해 얼굴에 함박웃음을 띄우며 "It's life!!!"라고 외쳤다. 그리고 내게 말해주었다. 자신은 이런 식으로 언어를 배웠다고, 자신의 학교에서 외국어 스코어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이렇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물건을 집어 올리며) 이건 너희 말로 뭐라고 부르니?라고 물으며 언어를 배웠다고 했다. 알폰소의 따뜻한 마음, 이웃을 환대하는 마음, 그리고 타인을 존중하는 태도들이 참 좋았다. 그리고 걸어서 10분 거리의 호스텔로 들어와 10시쯤 잠 잘 준비를 하는데, 같은 방 프랑스인 언니들은 그 시간에 다 놀러 나가 혼자 편히 잠에 들었다.
뮌헨에서 간 두 번째 맥주집은 슈나이더 바이스 하우스였다. 역시 유명한 양조장인데, 이곳엔 약 10가지 정도 되는 맥주가 넘버링되어 있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Tap 6이라는 말에 6을 주문했는데, 옆에 앉은 남자 둘이 7도 맛있다며 추천을 했다. 전날 너무 폭풍 대화를 나눈 터라 혼자 있고 싶었지만 계속해서 말을 거니 예기치 않게 왕좌의 게임 이야기로 꽃을 피우기 시작해 인구 알아맞히기 게임까지 하게 됐다. 난 노르웨이 인구를 너무 적게 생각해서 틀렸는데, (사실 그런 감이 전혀 없다) 마치 어린아이들을 보면 남아인지 여아인지 헷갈려도 무조건 “딸이 참 예쁘네요”라고 하면 실패할 일이 없는 것처럼 (딸은 딸이라서, 남자애도 딸인 줄 알면 예쁘다는 말이라서 좋아한단다) 인구도 생각보다 조금은 뻥 튀겨 말해주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인구도 국력이기 때문에.
노르웨이 사람 크누트(무려 바이킹의 왕이라는 뜻이라고 한다)가 내게 던진 가장 인상적인 질문은 “너의 겨울 스포츠는 뭐니?”였다. 그런 게 있을 턱이 없잖아!.. 크누트는 뭔가를 말하고 내가 못 알아들으면 위키 백과를 찾아 한국어 지원이 되는지 찾아보는 섬세함까지 가지고 있었다. 크누트의 친구 카이는 조용히 앉아있다 뭔가 결정적인 타이밍에 한 마디씩 하곤 했는데 역시 결정적으로 카이가 내가 마신 맥주까지 계산해주고 떠났다.
피나코텍 미술관 티켓에 쓰인 크누트와 나의 스코어를 첨부한다.
* 일련의 여행기는 2015년 여름 40일간의 여행 후 쓴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