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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젤 Jan 06. 2022

[음악] 고강동 / 박소은

영원하지 않음에 대하여

화자는 내 동네 고강동을 전부 살 거라며 단단히 다짐을 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영원과 모든 것을 마음껏 주고 싶은 맘으로, 아득하게 명하는 씩씩한 다짐을.


박소은, 고강동 앨범 커버, 2020. 3.


박소은, 고강동 @온스테이지


나는 아주아주 돈을 많이 벌어서
고강동을 통째로 다 사버릴 거야
할아버지 할머니가 거기 살거든
서울 의원도 마트도 당신들 거예요

나는 아주아주 많이 유명해져서
엄마한테 백화점을 줘버릴 거야
우리 엄만 비싼 것들 좋아했거든
에스컬레이터까지 엄마 거예요

엄청 비싼 나라를 막 살 거야
엄청 비싼 비행기를 살 거야
엄청 좋은 카메라를 살 거야
엄청 좋은 컴퓨터를 살 거야

나는 아주아주 돈을 많이 벌어서
친구들한테 자동차를 선물할 거야
우린 여행 다니는 걸 좋아했거든
얘들아 이제는 따로 출발해도 돼

나는 진짜 지독하게 유명해져서
열한 명이 동시에 날 사랑할 거야
나는 그런데도 한 사랑만 할 거야
자기야 나 좀 봐 대단하다고 해줘

엄청 비싼 나라를 막 살 거야
엄청 비싼 비행기를 살 거야
엄청 좋은 카메라를 살 거야
엄청 좋은 컴퓨터를 살 거야

엄마한테 집을 한 채 줄 거야
거기 안에 백화점을 둘 거야
고강동에 영원을 넣을 거야
아무도 사라지지 않을 거야

나는 아주아주 돈을 많이 벌 거고
또 나는 진짜 지독하게 유명해질 거야


나는 아주아주 돈을 많이 벌어서
고강동을 통째로 다 사버릴 거야

그렇게 성공해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사겠다며 야무지게 다짐하고 있는데, 어쩐지 조금 공허하다. 가장 먼저 사라져 버릴 애정의 대상 - 할아버지 할머니 - 으로 곡을 시작하고, 아무도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말로 곡을 끝내는 시점에서 영원을 넣을 거라는 선언은 이미 이룰 수 없음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공간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영원을 불어넣는 방식을 다시 돌아보자. 아주 돈을 많이 벌고, 진짜 지독하게 유명해져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것을 다 해주고, 열한 명이 동시에 날 사랑하게 만들 거라는 다짐. 왜 그런 생각을 한 걸까.


"다른 친구가 공연 때 제대로 완성된 '고강동'을 듣고는 울더라고요. 네가 너무 간절해 보이는데 그걸 애써 숨기려고 허황된 말을 늘어놓는 것 같다고. 맞아요. 그래서 저도 마냥 신나게만 듣진 않는 노래예요. 여러분들도 '고강동'을 들을 때, 꿈과 현실의 괴리감에 대해 한 번쯤은 생각하며 들어줬으면 합니다. 그렇다고 너무 무겁게만 받아들이잔 건 전혀 아니고요!" / 박소은 인터뷰 중


'동'이 들어간 제목은 대체로 친근한 기억을 불러오고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동'과 '그 시절', 그리고 '기억'을 엮는 노래는 차고 넘칠 만큼 있다. (혜화동/동물원, 소격동/서태지, 아이유, 광명동 시절/제8극장, 대치동 로맨스/그린 등등) '시'는 공간적으로 나와 분리되어 있는 느낌이지만, '동'은 시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더라도 내 것인 기분이 들게 한다. 나의 옛 추억을 불러일으키므로. 또, '도시'의 이름을 이야기하면 어쩐지 공적이지만, '동'은 지명을 그렇게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어느 동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는 순간 그 사람의 사적인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든다.


한자의 뜻도 시(市)는 '저잣거리 시'고, 동(洞)은 '마을 동'이다. 어느 시에서 만나자고 하면 어느 역사 앞이거나, 어느 북적거리는 카페 안에서 중절모를 쓰고 만나는 장면을 상상하게 되는데, 어느 동에서 만나자고 하면 어느 담벼락이나 가로수길 앞에서 친구야 놀자 하면서 친구를 부르는 장면이 상상된단 말이지.


그러니까 시(市)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이자 내가 상품화 - 혹은 타자화 - 가 되는 장소라면, 동(洞)은 내가 확장된 곳이자 '함께' 사는 삶의 터전이다. 시와 동의 지리적 범위 - 그러니까 면적 - 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범위 내에 적절한 랜드마크가 각각 다르다는 것이 너무 감각적으로 명확한데, 지칭어에서도 그 심상이 명확히 드러난다는 게 조금 신기하다. 학교에서 '시'는 번화가고, '동'은 동네라고 배우는 것도 아닌데,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이미지가 그려진다는 것이.


동은 아직 나의 것이다. 나의 나와바리, 나의 동네. 아직 내가 나를 찾아 헤매고 있는 그때.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나 자체.


어릴 적 나의 동네에서 대단한 사람이 될 줄 알았던, 대단한 것을 꿈꾸던 인생이 사실 돈도 시간도 없는 시시한 인생 - 이라기보단 평범한 인생이지만 -  이라는 걸 처음 깨닫는 순간은 인생이 박살나는 기분이 들 것이다. 타이틀곡 고강동과 같은 이름의 고강동 앨범 커버를 보자. 싸구려 나무무늬 장판 위에 폴리에스터 담요를 깔고 누워, 지구본에 비행기를 올리며 세계 여행을 꿈꾸고 기타를 치지만 현실은 굴러다니는 소주병과 부루마불 게임 속 지폐뿐. 결핍은, 소망을 낳는다. 화자는 시간도 돈도 부족하고, 쉽게 그 부족함이 메꿔지지 않을 것도 알고 있다. 예컨대, 고강동 앨범 속 다른 곡의 가사처럼.  


<인생이 박살나던 순간> 가사 중 

주머니에 돈이 없을 때
뭘 어떻게 살아가는 건지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네


모두들 이렇게 성공해서, 저렇게 살아라 하는 꿈을 보여주었을 뿐, 대부분의 평범한 삶을 보여주지 않는다. ('노력해도 성취할 수 없을 것 같을 때'의 불안감에 대하여: 링크) 기실 평범한 삶이 박살난 삶은 아닌데도, 거대한 꿈은 현실을 초라하게 만들고, 상실감은 결핍을 만든다.


인생이 박살나는 순간, 내가 가장 특별해질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나를 특별하게 보아주는 누군가 앞에 서는 것이다. 내가 내 안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을 때, 내 안에서 의미를 찾아주는 사람.


자기야 나 좀 봐 대단하다고 해줘


화자는 나의 '자기'가 스스로를 인정해 주길 바라고 있다. 인정의 주체는 사실 나를 멘토로 여기는 후배가 될 수도 있고, 언제나 나를 우쭈쭈해주는 가족이나 친구일 수도 있고, 예전의 나를 모르고 지금의 나만 알고 있는 연인일 수도 있다. 후자가 가장 쉽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의 나로부터 시작되는 관계이므로 허풍선이 같은 자아가 탄로 날 염려가 적다. 원래 모자라고 못난 나를 아는 애정 어린 사람들의 동정 어린 눈빛을 받을 염려도, 미래의 대단한 나를 과장해서 증명해줄 필요도 없다. 연애란 원래 좀 비현실적인 시공간이고 우리는 연애의 그러한 속성을 어느 정도 용인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러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많고. 화자는 내가 아닌 대상에, 감정에, 술에 취하기를 택한다. 도피처. 내가 나를 잃었을 때, 나를 찾아주는 사람을 찾아 헤매는 그런 관계. 다린 노래에서 말했던 정서와 같다. 고강동 앨범 속 다른 곡들을 보자.


<눈을 맞춰 술잔을 채워> 가사 중

얼마 안 가 우린 죽을 거야 더럽게 누울 거야
여길 좀 봐 시간은 쉬는 법을 모르고 뛰잖니
그러니까 나는 도망칠 거야

나는 누군가랑 춤을 출래 잠깐만 지금이 제일 좋아
눈을 맞춰 술잔을 비워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눈을 감고 순간을 채워 아무런 상처도 내고 싶지 않아

<너만 있으면> 가사 중

너랑 있으면 그러면 더 살아봐도 좋을 것 같아
너랑 있으면 그러면 더 버텨봐도 좋을 것 같아

<위성에게> 가사 중

너의 모습이 허상이어도 돼
혼자 남은 새벽 두려워 웅크리면
네가 언제나 나를 지키잖아
나는 별을 찾아 헤매고 있었어


화자는 도망쳐서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화자는 내가 아닌 다른 것 - 너 - 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있다. 네가 허상이어도 상관없으니 나를 지켜달라고. 화자는 너에게로 도망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로의 도피와 골몰은 계속될 수 없다. 화자도 그걸 알고 있다. 고강동 앨범 속 노래를 보자. 계속 계속 너를 읽다가, 닳아 없어지고, 해져 찢어질 것이라는 걸. 가사에 나오는 책도 모두 주인공이 삶의 의미를 찾고 도망쳐 헤매다 혼란스러워하고 고통받는 내용이 아니던가.


<너는 나의 문학> 가사 중

너는 나의 노르웨이의 숲 너는 나의 데미안 너는 나의 설명할 수 없는 책
나는 너를 나는 너를 계속 읽고 싶어
닳아 없어질 때까지 계속 읽고 싶어
해져 찢어질 때까지 계속 읽고 싶어


그리고 관계는 끝난다. 인디 음악에 대한 소고에서와 같은 레퍼토리의 반복이긴 한데, 결국 이 시대의 정서가 그렇다. 사회가 연성에서 경성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쉽게 극복할 수 없는 갭을 눈앞에 둔 가장 교육받은 세대는 혼란스럽다. 고단한 삶 속에서 기댈 곳을 찾고, 우울하고 불안한 존재끼리 기대다가 공의존을 하다가, 의미를 찾다가 허무해지고, 그러다가 헤어지고, 그걸 반복하고.


<보통의 연애> 가사 중

저기 비행기엔 기대를 품고
앉아 있는 우리가 보여
울기도 지쳤는데
불안해하지 말고
약은 꼭 챙겨 먹고


나는 아주아주 돈을 많이 벌 거고
나는 진짜 지독하게 유명해질 거야


어쩌면 영원히 거대한 꿈을 꾸고 그 꿈과 현실의 낙차를 느끼며 살아야 격변하는 감정 속에서 창작에 대한 갈증이 나오는 걸까. 위대한 예술가보다는 행복한 사람이 낫다고 생각하는데 - 나는 유달리 법륜 스님의 이 말씀이 오래 남았다: 나무아미타불 -  이조차 나의 삐딱함일 수도 있고. 아무도 채워줄 수 없는 공허함은 스스로 채울 수밖에 없으니, 채우지 않기를 택하는 것 또한 자신의 선택이다. 인간의 선택이 꼭 의지로 되는 것만은 아니긴 한데, 선택하고자 하지 않으면 선택의 기회조차 없는 것도 사실이니까.


이렇게 창작으로 풀어내는 것 또한 공허함을 해소하는 방법일 수도 있겠지. ..만서도, 소비자로서는 요즈음 조금 피와 등이 끈적해지는 느낌이 있어 당분간은 인디음악을 멀리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다음 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 어른이 되었답니다, 그래서 흔들리면서도 오래오래 살았답니다,' 하는 얘기를 써야지.


기실 평범한 삶이 박살난 삶은 아닌데도, 이걸 깨닫는 데에는 좀 시간이 걸린다. 깨달아도 아마 끊임없이 우리는 어느 정도는 꿈을 꿀 거고. 아주아주 많이는 아니어도 여유 있게, 지독하게는 아니어도 그럭저럭을. 혹은 계속 큰 꿈을 꿀지도. 지독하게 유명해지던 아니던 상관없이. 평범하건 시시하건 대단하건 훌륭하건 상관없이. 영원하건 찰나이건 상관없이. 멀리 바라보아도 지금의 현실이 초라하다고 느끼지는 않기를. 씩씩하게.


D. 그래서인가, 스스로에게 약을 처방하듯 노래를 만들었다고.

“맞아요. 즐겁다가도 당장 살아가야 할 내일이 지겹고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하잖아요. 그럴 때마다 저는 스스로 약을 처방하듯 노래를 만들었어요. 그것들이 모여 ‘고강동’이 되었고요. 음악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제 노래가 좋은 처방전이 되길 바라요. 제가 제 노래를 듣고 위로를 받은 만큼, 다른 사람들도 위로를 받았으면 해요”

D. 노랫말이 제법 거칠고, 우울한 부분이 많은 것 같은데.

“외로움이나 우울함, 그리고 무기력함은 평생 사람을 쫓아다니는 숙제 같아요. 저는 그 숙제를 딱히 미뤄놓거나 숨겨놓고 싶지 않아요. 그 자리에서 다 풀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것 봐요, 별로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어요’라고 말해주고 싶었고요. 그러다 보니 어두운 감정들에 대해 많이 노래하게 되네요”

- 박소은 인터뷰 중.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좋아한다. 씩씩함이 공명하더라도, 공명하는 소리의 반사에서 다시 씩씩함을 충전하기를. 끈적하게 달라붙어오는 우울이 그 씩씩함을 흡음하지 않기를. 그래서 부디 모두 다시금 씩씩하기를. 


모두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 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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