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첫날이 기억나니 아직 할만하다.
0.
트럭에 치여 이세계에 전송되었다. 일어일문학과로 입학해 단가와, 하이쿠를 읽는 법을 배웠다. 즐거워서 국어국문을 복수전공했다. 삼국유사를 손으로 필사했다. 구운몽을 읽으며 성진이 된 것마냥 꿈에 취해 이상이 박제된 천재를 아냐고 묻는 말에 끄덕여봤다. 그런 변태였다. 시대를 잘 못 골랐다. 4차 산업 혁명이라니. 4제곱으로 가속하는 세상이 야속했고 억울해서 방구석에 스스로만 읽을 글을 끄적이곤 했다. 세상에는 바뀌지 않는 가치가 있다. 사람이 사는 방식은 과학이 발전해도 다르지 않다. 그 말이 맞았다. 밥을 먹지 못하면 살지를 못한다. 밥 먹으러 이세계로 가는 트럭에 무리하게 탑승해 모교 근처의 스타트업에 취직했다.
1.
이세계는 여러모로 달랐다. 역시나 최첨단, 가속하는 세상이여서, 이세계 주민들에게 합리적이지 않은 모든 부속물을 던지고 오롯이 속도를 내려했다. 이세계에는 직급이 없다. 그 대신 내 할 일도 없었다. 상위 직급자가 일을 시키지도 않고 직책도 애매해서(공식적인 직책은 매니저다, 아직도 뭘 관리하는지 잘 모른다.) 컴퓨터를 켜고 브런치에서 스타트업에 대한 글을 읽는 것이 처음 일이었다. 덩그러니 내던져진 세상에서 무얼 어떻게 라는 질문도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막막함이 섰다.
오히려 좋아. 날카로운 논리와 끈덕진 설득이 모든 것인 세상이라고 생각하니 할만해 보였다. 대학 4년 내내 조별과제 조장을 맡았고, 강의가 끝나갈 때 즈음 “질문 있는 학생?”하는 질문에 손을 드는 위인이었으니 말이다. 이제 막 시작한 스타트업에 체계도 프로세스도 없는 이세계에 스스로가 생각하는 대로 일을 진행하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만든다고 생각하니 설렜다.
2.
늘 마음에 담아두는 개념이 하나 있다. 사람을 설득하는 3요소.
로고스(내용의 논리)
에토스(사람의 인격)
파토스(청중의 감정)
이 말은 기나긴 구원이었다. 저 세가지만 갖춰진다면 세상을 내편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 마법의 주문처럼 달콤했다. 달콤한 마법주문에 배신당했다고 착각한 끝에 얻어낸 경험담을 말하자면, 먼저 로고스. 지 말만 맞다고 박박 우기다가 주변 사람들은 질리게 만드는 인간 유형 한번쯤 본 적이 있을까? 그게 나다. 그 인간 유형은 대부분 위선자다. 스스로의 말에 짓이겨 스스로가 위선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다음 에토스. 형이 말이야, 선임한테 아무리 그래도, 어른이 하는 말은 다 이유가… 그런 어구로 설득을 시작하는 인간 유형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제일 싫다. 파토스, 광기의 시대에 어울리는 감정이다. 누구든 그렇게 생각하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느낌과 더욱 나아가 가짜 정의감을 불태우는 감정이 여기에 있다.
3 요소를 갖춘다고 다가 아니었다. 3 요소는 적절해야 한다. 솥의 세 다리와 같이 서로가 팽팽하게 균형을 이뤄야 한다. 이 적절함을 수면 위로 올려 숨겨진 제4 요소를 하나 더 말하자면 뭐든 적당히다(로고스, 에토스, 파토스, 적당쓰). 점심메뉴를 김치찌개로 먹자고 설득하자. 김치찌개를 꾸준히 먹으면 심장병 발병률이 30%로 낮아진다는 포브스의 연구결과가 있어. 한국인이니까, 김치찌개를 먹어줘야지. 오늘은 형이 먹고 싶은 먹자. 이런 3 콤보 써가며 열을 내 설득해봤자 그래 봐야 점심메뉴인데.
첫 번째 주제는 바로 이렇다. 이 세계(IT 서비스 기획)의 주민들을 설득하는 방법에 대해 스스로 배운 게 있더라면 앞으로 소환될, 이미 소환된 동료들을 위해 적어놓고 싶다.
3.
사실 IT 서비스 기획자라는 말을 최근 들어 알게 되었다. 뭘 하는지도 모르고 업무를 진행하며 매번 제일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방법과 수단을 골랐다. 어딜 가든 기획자는 뭘 해요? 하는 말로 시작하는 글은 수없이 많다. 그 말인즉슨 당신이 하기 나름이라는 뜻이렸다. 개발 빼고 뭘 해도 되는 직군이다. 다양한 것을 할수록 좋다. 막막하다. 오히려 좋다. 해결은 뭐든 뒤집는 일부터 시작한다. 이번에는 방법과 수단은 선후관계를 잘 못 파악한 것이다. 먼저 수단을 확보하고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IT 서비스 기획에서 수단은 다음과 같다. Slack, Notion, Figma, Miro, SQL, MUI 다. 이 수단을 얻고 나서야 방법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이러한 전회는 삽질 끝에 얻은 희열이다.
수많은 방법론이 인터넷을 떠돌고 다닌다. 애자일, 워터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의 글을 읽어도 제대로 감이 안 잡힌다면 그게 맞다. 감이 잡히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이래저래 저렇게 하면 돼!라는 말로 설득될 만큼 신중하지 못한 게 아닌가 싶다. 정확한 수단을 가지고 머릿속에 구체적인 실행 계획이 잡히고 나서야 그제야 방법론은 구체화된다. 그렇다고 수단을 얻는 것에만 혈안이 돼 방법론을 등한시하라는 말이 아니다. 뭐든 적당쓰.
글의 두 번째 주제는 Slack, Notion, Figma, Miro, SQL, MUI 같은 이세계를 살아가기 위한 장비들에 대해 설명할 생각이다. 강력한 성검을 손에 쥐고도 제대로 쓰지 못한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답답했던 스스로가 지나왔던 길을 되돌아보며 쓸 예정이다.
4.
세 번째 주제는 스스로의 행방을 적어둘까 한다.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할까. 첫 출근이 아직 기억난다. 대표님과 먹은 첫 돈가스, 키보드 타자음 속의 정적감… 시시콜콜한 충격이 아직도 기억나니 아직 할만한가 보다. 어디서, 어디로 가야 할까, 마저 잊을 수 있게 세상과 함께 가속하고 싶다.
露の世は、露の世ながら、さりながら
이슬의 세상은, 이슬의 세상이지만, 그렇지만.
<小林一茶>
뭐든 사라지고, 바스러질 것만 같은 연약한 세상을 알면서도 한 번 더 마지막 구에 ‘그렇지만’을 적는 용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