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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Apr 12. 2024

3년차 문학전공 PM, IT 이세계 여행기

여행자에서 정착민으로

0. 여행자에서 정착민으로


  IT 스타트업에서 PM으로 일한 지 3년이 지났다. 요새 유행하는 싸구려 양산형 애니처럼 이세계에 온 여행자처럼 20대 후반까지 문과로 살아왔던 낯설기만 세상이었다. 아직도 나는 아직도 이 세상의 이방인일까. 그러기엔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국적 불명 개발자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국어로 꾸역꾸역 바꿔가며 의사소통을 하던 PM (국어국문전공생) 이었는데 말이다.


개발자의 말

“ 여기서 액션 아이템으로 어레인지 할 것은 레거시 코드를 이 케이스에 해당하는 고유 에러코드로 리턴해주고, 프런트단에서 유저에게 어떻게 디스플레이할지 정하면 좋을 것 같아요”

번역결과

“아, 오래된 코드를 고쳐서 이경우에 오류가 나도록 수정하고, 사용자에게 어떻게 보여줄지 정하자는 뜻이죠?”

  3년차에 접어든 PM은 이제 필요하다면 이세계 토착민처럼 그들의 화려한 언변을 구사하기도 한다. 대부분. 설명하기 구차해보일 때 있어보이려 할 때 자주 써먹는 방법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있어보이는 것은 나름 설득에 큰 요소를 차지 하곤 했다.


(상황 : 버튼 위치 가지고 디자이너와 마케터가 싸우길래)

“일단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까, OO님 말대로 하고 나중에 반응보고 결정합시다.”

세련된 이세계 토착언어

“여기서 무엇이 베스트인가 디스커션을 벌이는 일보다는 최대한 미니멈하게 피쳐를 마무리 짓고 애자일하고 린하게 테스트하는게 좋지 않을까요?”

  그래, 올해까지만 문학전공 출신 IT PM 이라는 타이틀을 우려 먹어야겠다. 언제든 기가 내킨다면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의 생활이 즐겁고 마음에 들어 이제는 사뭇 진지한 기분마저 든다. IT 업계의 PM으로 일하는 일이 책을 읽고 쓰는 것만큼이나 스스로의 업이라고 받아들이게 됐다. 뭐라도 해야지, 돈이라도 벌어야지 하는 마음의 안전선으로 스스로를 지켜온 살아온 지난 여정에 마침표를 찍겠다. 서론이 길었다. 겨우, 이렇게, 라는 마음 한켠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도 짧은 몇 마디로 요약짓고 다음 장으로 너머로 가야겠다.


1. 벌써 두번의 이직


  경력이 만 2년 조금 남짓한데 이제 세번째 회사 입사를 기다리고 있다면, 회사가 망하거나, 회사에서 내쫓기거나. 우후죽순 생성과 소멸이 가득한 초기 우주마냥 혼돈의 스타트업계를 보고 있자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다니던 회사 두개 망하지 않고 잘 있고, 쫓겨나지도 않았다. 운이 좋아 좋은 회사를 다녔고, 좋은 사람을 만나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사실이다, 좋은 회사를 다녔고 적절한 경험을 기회삼았다. 하지만, 졸라 열심히 했다. 스스로 일 못한다는 소리가 그렇게 싫어하는 줄 몰랐다. 거기다가 문과 라는 자격지심이 한바탕 작용해서 OO님이 잘 몰라서 그러는데… 라는 누군가의 말에 한마디 해주고 싶어서 개발공부까지 하다가, 이제는 스스로 PG 사 붙인 쇼핑몰까지 만들 수 있게 됐다. 그래, 이냥저냥 일하는 것 딱 질색이다. 가랑비에 옷 젖듯 스며들었다기엔 풀악셀을 밟고 이세계에 정착하려 악을 쓰고 있었다. 몰랐던 건 그만큼 간절했던 스스로의 마음뿐.


  이직 역시 어느샌가 사활을 걸고 했다. 100+개의 회사에게 이력서를 돌렸고 그중 10% 남짓한 회사가 흥미를 보였다. 면접만 두 달에 걸쳐 15번을 봤다. 결국 3군데 정도 오퍼를 받고, 처우 줄다리기한 끝에 이직했다. 이직을 성공했다기 보다 어거지로 성공시켰다, 라는 말이 어울려 보인다.

마음에 들었던 회사의 거절을 받는 날은 정말 쓰디쓴 밤이 되었다. 일 잘한다고 회사에서 칭찬받던 게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하는 마음에 잠이 오질 않았다. 노예시장바닥에 내몰린 노예가 된 기분으로 왜 이직같은 거에 간절해졌을까 후회하는 마음에도 멈추질 못했다. 지난 일은 지난 것이니 좋은 추억이 되기를 바라며, 그 회사들 이름을 지워버리려고 노력 중이다. � 너 이 자식…


2. 마음을 얻는 PM이 되어보자


  처음 뭣모르고 일을 시작했을 때에는 어떤 PM 이 되어야 할까, 라는 공백을 채워나가는 일보다 PM은 무얼 해야 하지 하는 물음표가 앞섰다. 문학 전공이라 스스로를 소개하다 보면 보면 소설은 왜 읽어 같은 머리가 띵한 질문이 따라다니듯. “PM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에요?” 라는 머리 띵한 질문이 PM을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뭘 해야 한다, 할 수 있어야 한다… 로 쌓여있는 커리어서적이나 브런치에 가득히 메워져 있는 주니어를 위한 조언들을 보더라도 한참 모자르기만 하는 스스로는 성장의 방향성이 그런 것들을 해치워나가는 일이 커리어적 성장이라 여겼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이직을 해보니까 알겠더라. 영어도 할 줄 알고요, 일본어도 할 줄 알고요, Figma 도 할 줄 알고요, SQL도 할 줄 잘고요, Jira 로 업무관리, 마케팅툴 등등 할 줄 알아요! (자매품 이것도 저것도 해봤어요…) 라고 말해도 흐음 그렇군요..? 라는 뜨뜬 미지근한 말이 돌아오더라.


  커리어가 할 수 있다, 해 봤어요 의 나열이라고 착각했다. 그걸 통해서 알고 싶은 것은 당신이 우리 회사 들어와서 어떻게 일할지 예측 가능하게 풀어달라는 것이었다. 공감가능하고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달라는 소리다. PM이 할 일은 여러곳에서 여러사람이 정의내렸지만, 스스로 나침반으로 간직할 말을 하나 심어두려 한다.


PM은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의 마음과 지지를 얻지 못하면 비참해지는 자리다. 고객들의 마음을 얻는 일도 회사 동료로부터라도 누구든지 설득할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걸 얻는 힘의 원천은 사람이 가지는 태도가 아닐까. Attitude, 무언가를 바라보는 자세, 는 단발적인 의견 Opinion 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논리적인 사고, 타당한 근거로 결론을 도출하는 능력은 단지 뾰족하기만 하고 방향이 없다. 백날 말을 뾰족하게 가다듬는다고 해봤자 사람의 마음은 오히려 떠나간다는 것을 지난날의 과오에서 배우고 깨달았다.


당신은 적극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는 강한 성격의 사람이군요.

  같은 평판의 사람이 PM이라면 어떨까? 그의 말에 공감하고 지지하며 따라줄 팀원이 있기보다는 그와 말을 섞기 피곤하여 조용히 넘어가길 바라는 팀원들이 있지 않을까? 혹은 그의 그런 태도의 콧대를 눌러보고 싶어 일부러 대립하는 사람조차 생길지도 모르겠다. 기술 Skill과 의견 Opinion 을 가지는 일은 겨우 이 정도에 머물 것이다.


  흥미롭고 매력적인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람에게 흥미를 이끌어내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의견을 뾰족하는 것보다 맥락을 파악하는 세심하고 성실한 관찰이 요구된다. 뭐든 맥락 속에서 뽑아내야 하는 일이 중요하다. 주변 풍경과 같은 속도와 관성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1 정도의 의견을 일정한 방향으로 계속 뽑아내는 게 중요하다. 이제 막 출시된 제품에서 무지막지하게 확장된 형태의 제품 비전을 뽑아내는 경우를 더러 보고 있다. PM은 제품을 무리하게 틀어 일단 갈아엎고 혹은 아직은, 이라는 미실현 잠재태로 밖에 보지 못하는 1차원적 발상에서 머무는 것을 넘어서야한다.. 어떤 경쟁사가 그렇게 하니까, 지금 업무 프로세스 방법론은 이게 좋다니까…. 맥락 Context 과 과정 History 의 현재(As Is)를 보지 못하고 논리와 이상향(To Be) 만 강요하게 되게 된다. 어차피 바꿀건데… 혹은 아직 아직 멀었어, 우리 제품은 아직 미완성이니까. 하는 마음의 안전고리와 말로 때우는 PM이 되지 말자.


  스타트업에서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내는 PM이라 한다면 스스로의 논리보다는 주변을 살피고 그들에게 흥미를 이끌만한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스스로의 말보다는 경청으로, 필요하다면 말보다는 행동과 제품으로 묻어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제대로 된 맥락 속에서 올바른 방향으로 지속적으로 던지기 시작하면 그것이 태도가 되고 많은 말이 없어도 이제 설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당신에 대해서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당신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요.

이런 질문이 PM을 향해 올 때 사람의 마음이라는 거대한 힘을 움직일 기회를 부여받는다.


3. 삶의 깜냥이 필요한 직업이니까


너 자꾸 애매한 말로 할래? 그래서 제대로된 맥락은 뭐고 올바른 방향은 뭐고 그걸 제품에 녹여내는 것은 어떻게 하는건데?

→ 모르겠다.


  그걸 알고 늘어 놓아봤자, 또 뭐해야 하고 뭐 할 수 있어야 하고 하는 이야기로 돌아갈테니까. 마음가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잠깐 왔다 가는 이방인은 그만두기로 했으니까. 이세계에서 누구보다 일잘러가 되고 싶은 마음으로 어떤 방향으로 날아갈지 어느정도 모호함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말은 적게 하고 그런 거 알고 싶다면 세상에 널린 게 지식이니까. 갖고 싶은 것은 지혜의 영역이고 깜냥의 영역이고 그런 PM이 되고 싶다. 모호하고 불확실성의 영역의 바다에서 돛을 피고 항해할 수 있는 뱃사람처럼 억세고 노련한 사람이 되고자하는 마음의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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