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6강) 단문으로 쓰기

by 현이

“ 또 잔다! 그렇게 잠이 오면 가서 세수라도 좀 하고 오든가. 대체 공부를 하는 거야, 잠을 자는 거야! 시험도 얼마 안 남았는데 그렇게 해 가지고 이번에 성적이 제대로 나오겠어! ”

엄마의 한바탕 잔소리가 이어진다. 내가 시험을 보는데 엄마가 더 시험공부에 신경을 쓰는 모양새다. 사춘기의 쏟아지는 잠을 나보고 어떡하라고. 속사포처럼 날아오는 엄마의 잔소리에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다. 어차피 잘 건데 누워서 편하게 자면 안 되나.

“ 이거 먹고 해. 아이스크림 대신 먹으면 잠도 깨고 너 우유 안 먹으니까 요거트라도 먹어. 비싼 거야. 그러니까 이거 먹고 공부 열심히 좀 해.”

엄마의 기-승-전-공부의 레퍼토리는 계속 이어진다. 간식도 맘 편하게 못 먹는 내 신세가 안쓰럽다. 딸기향이 나는 차가운 요거트를 숟가락으로 떠먹었더니 잠이 깬다. 오싹 추워진 것도 같다.


엄마는 아직도 베란다와 화장실을 오가며 집안일을 하고 계셨다. 매번 수건을 직접 삶은 뒤에 세탁기에 넣다보니 퇴근 후에도 엄마의 일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요거트는 늘 나만 먹고 엄마는 일만 하시니 요거트만큼이라도 집중해야 하는데. 자꾸만 잠이 쏟아진다. 엄마가 활짝 웃게 이번 시험은 잘 좀 준비해 보자. 이제 눈 좀 떠!!


정신을 차리고 공책을 내려다보니 졸면서 공책정리를 하느라 공책에 그림을 그려놓았다. 과학 기호와 볼펜 낙서가 마구 섞여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화이트로 지우기에는 면적이 너무 넓다. 이 장은 뛰어넘어야겠다. 과학 공부를 마무리했으니 이제 수학 공부를 시작해 볼까. 2차 방정식 계산은 연습이 중요하다고 했었지. 몇 문제 풀다 보니 벌써 10시가 다 되어간다. 만세. 드디어 잘 시간이다.


공부하느라 힘들지? 지금 풀기 어려운 문제도 계속 노력하다 보면 잘할 수 있을 거야. 엄마도 처음에는 공부가 어려웠는데 연습을 많이 하니까 쉬워지더라. 우리 딸도 똑똑하니까 금방 익숙해질 거야.


다음 날 학교에 가려고 가방을 챙기다가 연습장을 보니 엄마의 메모가 쓰여 있었다. 꼭꼭 눌러 쓴 엄마의 세로로 긴 글자체가 눈에 들어왔다.

엄마...

잔소리 마구 날리는 카리스마 엄마인 줄 알았는데 이런 면이 있으셨네. 카랑한 어조로 나무라는 말을 들을 때는 우리 엄마가 맞나. 난 이 집 딸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오늘부터 그런 의심은 저 멀리 던져버릴 것이다. 우리 엄마가 맞았다. 나를 사랑하고 격려해 주는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엄마.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엄마를 꼬옥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엄마는 벌써 출근했다.


엄마는 가면이 몇 개 있는 것 같다. 회사에서는 열심히 일하는 직원, 집에서는 잔소리 대마왕 엄마, 요리 천재 아내, 외갓집에서는 살림밑천 셋째 딸.

시골에 살던 엄마는 외할아버지가 고등학교에 보내주지 않으려 하자 단식투쟁을 했다. 그리고는 며칠 뒤 세 자매 중 유일하게 당당히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물론 조건은 있었다. 공부 잘하는 남동생의 학비를 대야 한다는.


공부만 하면 되는데 얼마나 편하니. 가만히 앉아서 공부 열심히 하면 엄마가 다 해주잖아.


엄마의 보살핌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는데 그래서 엄마의 레퍼토리가 듣기 싫었는데. 이제는 엄마의 긴 일상이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이번 시험은 그 어린 시절 외삼촌보다 더더 잘해서 요거트 값을 톡톡히 해야지. 그리고 내가 어른이 되면 엄마가 좋아하는 투뿔 소고기 실컷 사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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