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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뭇별중한별 Jan 06. 2022

아이의 울음

아침 일찍부터 아이가 운다.


말 못 하는 아기들은 울음으로 의사를 표현한다지만 우리 아이는 이미 이른 사춘기에 접어든 12살이다.


사춘기가 되어서 우는 거냐면 그렇지도 않다. 말 못 할 아기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매일은 아니어도 비견될 만큼 자주 이른 아침에 울어댄다.


어떤 특별한 불만이 있어서? 정서적으로 안정되지 못해서? 나도 이유를 잘 모르겠다.


아이를 달래면서 물어보면 매번 그 이유가 다르다.

엄마가 아침에 깨우면서 좀 더 오래 안아주길 원했다거나, 너무 이른 시간에 깨웠다거나, 악몽을 꾸었다거나, 심지어는 아무튼 울고 싶었다고도 한다.


우리 아이들이 감정의 표현을 강렬하게 하는 편이긴 하지만 (작은 아이는 해리포터 퀴즈쇼를 보다가 응원하던 ‘그리핀도르’ 기숙사가 탈락하자 진짜로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유독 한 아이만 아침 잠결에 울어대는데는 근본적인 원인이 있긴 할 것이다.


쌍둥이 자매여서 엄마의 사랑을 쟁취하려는 투쟁의 발로였을지 아니면 특별히 정서적으로 예민하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훌륭한 부모라면 응당 알아챘어야만 하는 다른 마땅한 이유가 있었을지도….




그렇지만 가장 큰 문제는 다름 아닌 나에게 있다. 내가 그 울음소리를 잘 견뎌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침잠이 많은 데다가 밤늦게까지 일하는 직업을 가진 나로서는 출근 준비 전 마지막 10분, 20분의 잠이 하루 컨디션을 좌우하는데, 아이의 울음은 그 마무리 잠에 아주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떠나갈 듯이 울어재끼는 것은 아니지만 “으으으~”라던가 “훌쩍~”한다던가 하는 울음소리가 오래 지속되면 신경이 곤두서고 피곤한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잠에서 깬 보통의 아비라면 본인의 성질은 누르고 아이의 기분과 올바른 성장을 생각해서 먼저 아이를 달래거나 함께 원인을 찾으려 노력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러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아이가 자라온 시간들을 돌아보면 그렇지 않은 순간들도 많았다.

견디지 못하고 짜증을 내거나 “제발 그만 울어~!”라고 외쳤던 시간들….


‘왜 난 보통의 부모도 되지 못하는 것일까?’


‘20분 남짓의 아침잠도 아이를 위해 줄이지 못하는 이기적인 사람인 것일까?’


이런 자괴감에 빠지는 때도 자주 있었으나 오늘 다시 깨닫게 되는것인데, 자각한 만큼의 변화가 내게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나의 가장 큰 문제가 여기에 있다.


아이 울음소리에 또다시 깨어난 아침에 오랜 소망이었던 글쓰기를 실천하기로 마음먹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변화가 없다면 자각했다고 할 수 없다.

행동해야 할 방향을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발걸음을 그쪽으로 내딛지 못하면 방향을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내가 가진 모든 문제가 이와 같다.

머릿속에서만 생각이 많고, 옳은 방향을 캐치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실행하지 못한다.

단 한걸음도 제대로 딛지 못하고 혹여 내딛더라도 꾸준히 걷지를 못한다.


TV의 생활정보 프로그램에서 맛집 사장님이 출연해서 아낌없이 비법을 공개하자 그래도 되겠냐고 걱정하는 진행자에게 사장님이 이렇게 대답했었다.


“예전엔 비법을 들키면 어쩌나 했는데 지나 보니까 어차피 알려줘도 그대로 해보는 사람은 10명 중에 1명 될까 말 까더라. 그래서 그냥 알려준다.”


그 사장님의 말처럼 나 또한 성공할 수밖에 없는 비법을 알아도 그냥 날려 보내는 흔한 사람들 중 하나라는 것을 고백한다.

 

그동안 사실 나는 내가 예외의 1인일 거라 생각하면서 살았다. 하지만 이제와 돌아보면  근거 없는 자신감만큼의 실천과 노력은 없었다.

내가 흔한 99%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된다. 그래야 99%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을 가지게 되고, 그때부터  걸음이라도 내디딜  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그래서 이 글을 쓴다.

아이의 울음이 그친 지금 책상에 앉아 이 글을 쓴다.


제발 오늘의 이 발걸음이 돌아보면 천리길을 이어져온 발자국이 되어 있기를 바란다. 나의 삶이 무언가를 이루는 것이기를 바란다. 내가 죽은 뒤에도 내 이름이 남겨져있기를 바란다. 내 후손들이 그 이름을 자랑스러워하는 삶이기를 원한다.


그 소망을 이루고 난 후 오늘 이 한걸음이 시작의 첫걸음이었음을 회자하게 되기를 바란다.


2021년의 마지막 날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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