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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뭇별중한별 Jan 25. 2022

나의 집을 찾아서

집에 대한 막연한 관심을 반성한다.

    사회 초년생을 막 벗어날 무렵의 일이다. 강남 사무실 근처에서 자취를 하던 시절이었는데 외할머니 성묘를 다녀오기 위해 가까이 살던 이모 댁의 차를 얻어 탔었다. 서울을 벗어나자 길가에는 판교 신도시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이모님이 아파트 올라가는 광경을 한참 바라보다 혼잣말처럼 한마디 하셨다.  

    “이렇게 집이 많은데 어째 우리 ㅇㅇ(내 이름)이 평생 맘 붙이고 살 집이 한 칸 없을까…….” 

    뒷자리에서 앉아 있던 나는 수치심과 울화가 확 치밀어 얼굴이 삽시간에 뜨거워짐을 느꼈다. 어릴 때부터 쌓여왔던 가난에 대한 열등감을 강남에 집을 두 채나 가진 이모님이 두들겨 깨우는 것만 같았던 것이었다. 물론, 이모님은 순수한 마음으로 조카가 안쓰럽고 걱정되니 하신 혼잣말이라는 것, 또 워낙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언변을 가진 캐릭터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야속한 걸 어찌하랴. 하마터면 화를 벌컥 내며 여기서 그만 내려달라고 말할 뻔한 것을 꾹 참고 차창 밖 아파트 공사장을 말없이 바라봤었다. 지금은 그 아파트가 20억쯤 하려나?


    몇 년간 부동산이 폭등하고 투자 광풍이 불어 너도나도 부동산 공부를 하고, 투자에 성공해 큰돈을 벌었다는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또 한편에서는 금리 인상이 시작되었으니 집값은 하락하고 소위 영끌족은 큰 낭패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걱정들을 한다. 나는 사실 실물경제나 투자 같은 것은 젬병이니 굳이 문외한이 한 마디 보태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점점 집이란 것의 가치에서 경제적 성격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상대적으로 집이란 공간이 가지는 의미는 줄어드는 건 아닐까?




    “홍은동입니다~” 

    수십 년간 대한민국 안방극장을 호령한 김수현 작가님의 드라마를 보면 전화를 받을 때 “여보세요~”를 대신해 “ㅇㅇ동입니다~”라는 대사가 늘 등장했다. ‘홍은동이 다 저 사람 집인가? 왜 전화를 저렇게 받아?’라는 의문도 들었지만 생각해보면 내 어린 시절에는 먼 친척 일가를 다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5촌 이상의 친척들을 ‘동대문 이모할머니’, ‘길동 고모’ 하는 식으로 말이다. 동대문이 다 그분 것은 아니어도 내겐 ‘동대문 이모할머니’라고 하면 정확히 그분을 특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분의 집 주변과 집 안 내부의 풍경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 집의 냄새, 밝고 어두웠던 분위기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니까 그 할머니와 할머니의 집과 동대문이란 동네는 내겐 삼위일체의 아이덴티티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생각해보면 그분들이 나중에 이사를 하셔도 “길동 고모”는 여전히 내게 “길동 고모”였지, “옥수동 고모”로 호칭이 바뀌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지금 서울의 끝자락 ‘ㅁㅁ동’에 10년이 넘게 살고 있다. 신혼집을 구하던 당시의 형편으로 구할 수 있는 집으로서는 출퇴근 사정으로나 생활환경으로나 여러모로 최적의 입지였던 곳이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아내도 근처에 직장을 구하면서 조금씩 집을 넓혀가고는 했지만, 이 동네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특별히 동네에 애착이 있다거나 떠날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있어서도 아니고, 형편이 나아지지 못해 이 동네에 묶인 것도 아니었다. 다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집에 대해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않은데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그런 나를 누군가 “ㅁㅁ동 삼촌”과 같은 호칭으로 부르게 될까? 먼 친척의 조카들이 ㅁㅁ동을 떠올리면 우리 집의 냄새나 풍경 등을 떠올리고, 나와 집을 동일시하게 될까? 그렇지는 못할 것 같다. 내가 아끼고 가꾸지 않은 내 집, 애정을 가지고 살고 있지 않은 집에서 누가 나의 냄새를 맡을 것인가.




    “만약에 로또 1등 당첨되면 뭐 할래?”

    라는 이야기를 아내와 하게 되면 우리 둘 다 “더 좋은 집을 산다”로 의견이 일치할 정도로 우린 좋은 집을 소망한다. 그런데 “좋은 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깊게 고민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마치 선물은 받고 싶은데 뭘 가지고 싶은지는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왜? 어떤 동네에서, 어떤 집에서 삶을 살고 싶은지. 
        어떻게? 그런 집을 마련할 생각인지

에 대한 구체적 생각도 없이 말이다. 그저 막연하게 원하는 것은 절대로 가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많은 수업료를 치르며 살아와놓고서는……. 

    글쓰기를 시작한 건 참 잘한 일인 것 같다. 어떤 이야기를 할까를 고민하다 보면 이렇게 부족한 나를 발견하고 구겨진 내 삶의 주름을 하나씩 펴보게 되니 말이다.

    이제부터라도 사람들이 나를 떠올리면 어떤 동네에서, 어떤 집에서, 어떤 일을 하며,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길 원하는지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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