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출근하려는데 털모자가 보이지 않았다. 걸려있어야 할 옷장 고리에는 당연히 없었고 아무렇게나 벗어놨나 싶어 찾아본 집안 곳곳에서 보이지 않았다. 나는 몇 해전 발견한 뇌혈관 질병의 악화를 막기 위해 꾸준히 약을 복용하고 있고 날씨가 싸늘해지면 털모자를 써왔다. 이제 올 겨울 추위도 한 풀 꺾여가는지 스마트폰의 날씨 어플에서는 영상의 기온을 알려주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아쉽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여 그 털모자를 언제 마지막으로 썼고 어디다 벗었는지를 곰곰이 되짚어봤다.
기억 속 마지막 장면은 교회 갔다 오는 길에 차 안 온도가 높아서 아내에게 벗겨달라고 했던 것이었다. 아직 출근길 위일 아내에게 전화를 해보니 자기도 벗긴 건 기억이 나는데 어쨌는지는 모르겠으니 차에 가보라는 것이 아닌가.
일단 가방을 둘러매고 나와 차가 주차된 곳을 향해 걸었다. 날씨 어플이 거짓말을 한 건지 영상 1도 치고는 제법 쌀쌀한 것이 괜히 머리가 더 시린 것 같았다. 몇 주전 -14도를 기록하던 맹추위의 날들을 기억도 못하고…. 주차된 차에 다가가면서 나는 너털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내가 탔던 조수석 옆 아스팔트에 뒹굴고 있는 회색의 작은 물체. 그것은 내가 즐겨 쓰고 다니는 털모자가 틀림없었다. 아내가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다가 아무 생각 없이 내린 것이 분명했다. 나는 얼른 뛰어가 모자를 주워 들어 젖은 데나 더러워진 데가 없는지 살폈다. 용케도 육안에서 발견되는 이상은 없었지만 하루 밤을 한 데 떨어져 있었으니 빨지 않고 다시 쓸 도리는 없어 보였다. 털모자를 가방 안쪽에 넣어놓고 발길을 떼려는데 바람이 휙 불어오고 머리가 시원해졌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내 차. 어서 타라는 듯 유혹하는 자태.
몇 해전까지 판교 IT밸리에 회사가 있었을 때는 차를 운전해서 출퇴근을 했다. 여러 번 지하철을 갈아타는 수고와 신분당선의 엄청난 요금, 그리고 인파 속에서의 고생을 감안하면 비슷한 비용과 시간이 걸리는 자차의 이용은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물론 엄청난 교통정체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지만 낯선 이들 사이에 끼어서 흔들리는 것보다는 무릎과 엉덩이의 그 정도 통증은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나는 운전하는 것을 꽤나 즐기는 타입이다. 길 위에서 운전에 집중하다 보면 잡생각도 사라지고 가끔 차창밖에서 불어오는 산뜻한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길을 달릴때면 행복감에 젖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목적지가 강남 한복판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잠시의 즐거운 드라이빙 구간도 없이 빡빡하게 줄지어 실려가는 교통정체, 조금이라도 빨리 가겠다고 도로질서를 흙탕물로 만들어놓는 얌체 운전자들, 간선도로 출구에서 단속도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부터 들이밀어 끼어드는 막무가내들, 꽉 막힌 강남 한복판에서 다른 세상에 사는 듯 자유로운 무브를 선보이는 초고가의 외제차들, 그리고 일일 2만 원에 육박하는 뜨악할만한 주차요금.
그런 걸 다 잊고 자길 타라고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저놈의 차가. 나는 서늘해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내 손이 차 문을 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김유신이 애마의 목을 치던 심정이 이랬을까?! 나는 내 손의 행동에 소스라치게 놀라면서도 조수석에 가방을 벗어놓고 운전석에 앉았다. 허허 참나. 그런데 입가에는 왜 웃음이 번졌을까? 얼굴도 주인 말을 안 듣는 놈이 틀림없었다.
걱정대로 출근길은 대 지옥이었다. 속도 30km 이상을 내 본 구간은 1km도 채 안되었을 정도로 엄청난 교통정체였으며, 평소 1시간 걸리던 출근길이 40분이나 더 걸려 하마터면 지각을 할 뻔하였다. 그리고 회사 옆 빌딩에 주차요금 1만 9천 원도 선불로 지급하였다. 무엇보다 주차를 한 빌딩에서 회사까지 걸어오는 2~3분 동안 놀랍게도 전혀 춥지 않았다. 날씨 어플로 확인해보니 영상 5도였다. 헛짓거리의 등급을 매길 수 있는 지표가 있었다면 최고의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올해의 헛짓거리"가 될 지도...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욱신거리는 무릎이 들을 수 있다면 화를 낼 만한 말이지만 회사에 정기주차 신청을 할까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반복된 일상에서 벗어난 일탈의 즐거움이지 이것이 일상이 되면 더 고통스러울 것을 아니까. 그래도 가끔 반복에 지쳐 기분이 가라앉을 때면 괜찮지 않을까?
물론 아내에게는 절대 비밀이어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