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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뭇별중한별 Feb 03. 2022

돼지가 울 때면 나는...

나만을 위한 첫 번째 위로

 어릴 때 외숙모들은 나를 “한 공기”라고 불렀다. 밥을 차려주면 많게 주나 적게 주나 딱 한 공기 깨끗하게 먹고 일어난다고 붙여 준 별명이었다. 뭘 더 달라는 법도 없고 차려진 것 중에 가려서 안 먹는 것도 없다면서 어쩜 애가 저러냐고들 했었다. 그들 나름대로 애가 순하고 약지 않다고 칭찬을 한 것인데 우리 외할머니는 그 별명을 싫어하셨다. 순한 게 아니라 기가 죽은 거라면서.


 엄마는 누워 있었다. 녹색의 이불을 덮고 모로 돌아누운 엄마의 골반은 언덕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그 언덕 위엔 대나무 자루로 만들어진 총채가 얹혀 그림책에서 본 것처럼 만년설이 덮인 산봉우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 높은 산 아래에 천자문 책을 펴놓고 무릎을 꿇은 채 울고 있는 내가 있었다. 울먹울먹 천자문을 외우다가 틀리면 산봉우리 위의 총채가 날아와 찰싹 나를 때리고는 금세 제자리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엄마는 간 데 없고 엄마의 엉덩이가 만든 산봉우리만이 내 앞에 만년설을 드리우고 있었다. 아마 4살인가 5살쯤 되었을 때인 것 같다.


 엄마는 자주 맞았다. 아빠에게도, 삼촌에게도, 할머니에게도 많이 맞았고 많이도 울었다. 엄마가 도망치듯 나를 데리고 외할머니 집에 외할아버지 돌아오실세라 안절부절못하다가 얼마  있고 쫓겨나듯 가버렸다. 나만  집에 놔두고. 외할아버지가 돌아오셔서 나를 예쁘다고 안아주시면서도 할머니를 노려보면 할머니는 모른   딴청을 부렸다. 그때 엄마가 서성였을 거리가 어디인지 아직도 나는 알지 못한다.


 외가댁에 온 친척들이 모이면 나는 엄마의 눈짓에 맞춰서 천자문을 외웠다. 서예가인 외할아버지는 "네 컴퓨터는 최고 성능"이라고 기뻐했고 그날 엄마는 그 집에서 가장 활발하고 크게 웃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우리 집에 칼라 텔레비전이 들어왔다. ‘네가 천자문 잘 외워서 외할아버지가 선물로 주신 것’이라고 했다. 엄마는 행복해 보였다.


 밖이 시끌시끌하더니 생전 처음 들어보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그게 돼지 잡는 소리라고 했다. 나는 '흰 우유만 밥'을 헛구역질을 해가며 삼키고는 다락방에 올라갔다. 판자로 막아놓은 다락방 창문 사이로 리어카에 무언가를 실어 나르는 남자들이 보였는데 리어카에 실린 그것은 엄청난 괴음을 내며 저항했다. 나는 혼잣말로 “저게 돼지구나”라고 했다. 한 남자가 번쩍이는 식칼을 들고 다가가 돼지의 목에 찔러 넣었다. 동네가 떠나갈 것 같이 큰 돼지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목에서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너무도 많고도 강렬하게 붉은 피에게 나는 압도당하고 말았다. 나는 눈 한 번을 깜빡하지 못하고 그 광경을 바라봤다. 갑자기 구역질이 올라와 억지로 삼킨 '흰 우유 만 밥'이 넘어올 뻔했다.


 그 후 난 시도 때도 없이 돼지의 꿈을 꿨고 그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엄마가 화를 내고 매를 들 때마다 어김없이 돼지 울음소리가 들렸다.


 전철역 앞에는 건널목이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그 건널목에서 노는 걸 좋아했다. 윗동네 아이들과 아랫동네 아이들은 그 건널목을 사이에 두고 돌팔매질을 하며 세력다툼을 했다. 나는 그 놀이판에 끼지 않았다. 끼워주지도 않았지만. 내 아지트는 그보다 조금 더 올라가서 철길 옆 풀숲을 헤치고 덩굴을 엮어서 만든 조그만 공간이었다. 나는 거기에 나무 그루터기를 가져다 놓고 책을 봤다. 그날도 아이들은 건널목에서 한바탕 노는 모양인지 시끌시끌하다가 어느새 조용해졌기에 건널목 쪽을 쳐다봤더니 웬 작은 아이가 홀로 건널목에 남아 있었다. 처음 보는 아이인 걸 보니 아랫동네 애인 것 같은데 누군지 모를 형아를 따라 나왔다가 혼자 남겨진 모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땡땡]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열차가 오는 것이었다. 아직 아이가 건널목에 남아 있는데. 나는 열차가 오는 방향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다. 아직 열차는 저 멀리에 있었다. 내가 얼른 가서 아이를 건널목 밖으로 피신시켜야만 했다. 내가 벌떡 일어나는 순간 열차도 아이를 발견했는지 굉음을 내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목을 찔린 돼지가 내던 단말마의 굉음과 어쩐지 닮아 있는 소리였다.  나는 꼼짝할 수도, 도와달라고 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나는 소리를 지르려 벌렸던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그대로 아이만을 바라봤다. 눈도 깜빡하지 못한 채.


열차는 건널목을 지나쳐서야 멈췄다. 아이가 너무 작고 열차는 너무 커서 그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보지 못했지만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으로는 살아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아이의 엄마가 울부짖으며 나타났고 아이를 데리고 구급차를 타고 떠나면서 상황은 끝났다. 하지만 나는 이후로도 오래도록 그 자세로 계속 있었다. 아무도 내가 그곳에 있는지를 모르는 풀 숲의 공간에서 두 손을 꽉 쥐고 입을 벌린 채.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이 입안으로 계속 밀려들어왔다. 그때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인가 그랬다.




 십여 년 전 엄마는 40일 금식기도를 한 뒤 죽을 고비를 맞았다. 살이 쪽 빠져서는 바짝 마른 입술로 간신히 미음이나 미숫가루나 넘기는데 그마저 족족 토하거나 설사를 해댔다. 그러면서 나를 보고 자꾸 고맙고 미안하다고 울었다. 기도 기간 내내 나를 키우던 날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고 했다. 그땐 당신도 너무 삶이 힘들어서 그 분풀이를 죄 없는 자식에게 했다고 후회했다.

“됐어. 부모 자식 간에 별소리를 다하시네”라고 말하면서도 나는 생각했다.

나는 대면하기를 싫어했다. 그게 사람이던 기억이던. 그래서 엄마의 눈물과 사과가 내겐 불편했다. 튼튼하게 자라라고 엄마가 억지로 먹였던 ‘우유 만 밥’처럼 억지로 잊힌 기억과 대면하라는 것 같아 나는 매우 불편했다. 내겐 과거가 중요치 않았다. 지난 일은 그저 지난 일이 아닌가.


 그런데 나를 위로하기 위한 글을 쓰기로 한 순간부터 잊혔던 모든 기억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나 이렇게 내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대면하기 싫어했던 '지난 일'을 통해야만 내가 잊고 살았던 진짜 내가 누구인지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고통이란 것의 두려움을 잘 알면서도 타인의 고통에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그래서 진심을 주지도 받지도 못하는 지금의 나를 빚어왔던 날들을 말이다.


이제 나는 내가 진심 어린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원하고 있다. 진심을 다해 사랑하고, 진심을 다해 위하고, 진심을 다해 감사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한다. 고통이 두려워 떨지 않기를 원하며, 타인이 고통당할 순간 나설 수 있는 용기가 내게 있기를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아프고도 부끄러운 시간을 맞이하는 것이다. 소독약은 상처에 바로 발라야 하는 것처럼.


 잠깐의 이 고통이 끝나면 결국 나는 내 속의 작은 아이에게 손을 내밀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원하는 걸 원한다고 말해도 되고, 죄책감도 가질 필요 없다고. 고통을 피하는 것은 누구나 가진 본능일 뿐이니까.


 그리고 나와 내면 아이가 손을 잡고 함께 가게 될 곳은 어디였을지 모를, 23살의 어린 엄마가 헤매었을 거리일 것만 같다. 어디에도 몸과 마음 둘 곳 없이 없어서 절망했을 그 어린 여자를 나는 진심으로 보듬어보고 싶다.


 그때의 엄마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진 지금의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현실에 치여 만들어진 각자의 커다란 슬픔을 안고 겨우겨우 살아가던 그들 모두를 나는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더 이상 돼지 울음이 들리지 않지만, 굉음을 울리며 열차가 달려오지 않지만, 여전히 웅크린 채 꼼짝도 못 하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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