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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뭇별중한별 Feb 17. 2022

기억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손이 얼어버릴 것만 같은 섭씨 14도 물에 60초 동안 왼손을 담그게 한 뒤, 이번엔 오른손을 똑같이 60초간 찬물에 담그면 참가자에게 알리지 않고 물 온도를 1도만 올려서 30초간 더 담그도록 한 실험이 있다.  

이제 참가자에게 앞의 두 실험 중 하나를 골라 반복하게 하라고 한다면 어느 쪽을 선택할까? 

 

이 실험을 한 연구팀은 1도씨의 온도 차이보다는 30초를 더 견디는 고통이 클 것이므로 당연히 대부분 왼손의 실험을 선택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실험의 결과는 반대였다. 참가자들은 오른손의 실험이 덜 고통스럽다고 답했으며, 기꺼이 30초의 추가적 고통을 선택했다. 

이상하지 않은가? 마지막에 고작 1도 따뜻해진 물에 담갔을 뿐인데 더 긴 고통을 다시 경험하겠다는 선택을 했다고? 

 

연구팀은 고통스럽기로 유명한 비수면 대장내시경 검사자들을 통해서도 이를 테스트해보았다. 

환자가 내시경 검사를 받는 동안 1분마다 고통의 강도를 물어본 뒤에, 검사가 끝난 뒤에는 종합적인 고통을 점수로 표현해 달라고 주문하였다.  

연구팀은 참가자들의 종합평가가 1분마다 측정한 고통 강도의 총점과 유사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즉, 검사 시간이 길 수록 고통의 총점이 높을 것이고 자연히 환자는 더 고통스러웠다는 대답을 할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하지만 역시 이 예상도 보기 좋게 빗나갔다. 고통을 받은 전체 시간과 상관없이 사람들은 가장 심하게 느꼈던 고통과 더불어 마지막 순간의 고통 정도를 가지고 전체 고통 강도를 평가했다. 

예를 들어, 10분가량 검사를 한 참가자가 마지막 순간에 7의 고통을 느꼈다면, 40분 검사를 한 참가자가 지속적으로 고통을 느끼다가 마지막에 1의 고통을 느낀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고 답했던 것이다.  

 

또 한 편, 참가자들에게 삶에 대한 만족도를 묻는 설문조사를 시작한다고 말하고, 일부 참가자에게는 설문지가 부족하니 한 장을 복사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때 복사기에 일부러 10센트 동전을 꽂아두고 주워갈 수 있도록 했더니, 이 행운의 참가자들은 삶의 만족도를 전반적으로 훨씬 높게 평가했다고 한다. 

 

<생각에 관한 생각> - 대니얼 카이먼, 김영사-은 위와 같은 다양한 실험들을 통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우리는 사실 [기억하는 자아]에 지배당하는 존재들인데, [기억하는 자아]만큼 왜곡의 전문가는 없다고 말이다. 

 

95%의 고통스러운 순간도 5%의 유쾌한 기억 때문에 좋은 기억이 되기도 하고, 95%의 행복한 경험이 5%의 불쾌함 때문에 망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예전 연애시절에 아내와 여행을 갔을 때 우리는 좋은 경치를 구경하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거의 70시간 동안 즐겁고 행복했으나 돌아오는 길에 사소한 다툼을 했었고 그로부터 한 동안 서로에게 연락하지 않았었다. 몇 년 후 핸드폰을 백업하려고 사진첩을 뒤적이다가 발견한 사진에서 그때 70시간 동안 행복했던 우리의 모습을 다시 보기 전까지 내게 그 여행은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인사이드 아웃> -월트디즈니픽쳐스, 픽사애니메이션스튜디오, 2015-는 주인공인 11살 소녀 '라일리'의 머릿속에서 좋은 기억만으로 자아를 형성하려는 '기쁨이'의 투쟁을 그린다. '라일리'의 기억저장소에는 온통 행복했던 기억들만 저장되어 있었고 이는 '기쁨이'의 자랑거리였는데, 접근이 금지되었던 '슬픔이'의 손길에 의해 기억들이 슬프게 변질되고 급기야 '라일리'의 귀여운 [성격의 성]들은 사라지고 만다. '기쁨이'는 그것들을 회복하기 위해 길을 떠나지만 결국 기쁨과 슬픔, 분노와 까칠, 그리고 소심 등의 다양한 감정이 어우러진 것이 건강하고 진정한 자아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이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여러 번 보았는데,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이 영화의 제목이 [아웃사이드-인]이 아닌 [인사이드-아웃]이라는 점이었다.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 동물이어서 우리의 생각과 감정은 대부분 외부의 영향을 받는다. 그때 우리가 외부의 영향을 [자기] 식대로 해석해내지 못할 때 [아웃사이드-인]의 인간이 되어버리게 된다. 다른 이의 생각에 휩쓸리고, 무리의 일원으로 소속되는 것에 안도하고, 세상이 지시하는 패러다임에 따라서 살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생각과 신념인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왜곡의 전문가인 [기억하는 자아]의 훼방이 더해지면, 좋았던 것들은 잊어버리고 부정적인 생각과 두려움에 휩싸여서 앞으로 나아갈 기회를 날려버리고 스스로를 망치고 만다.  

 

나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는데 1학년 첫 수업 날 바로 알았다.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초등학교 졸업하면 중학교 가고, 중학교 졸업하면 고등학교에 가듯이 대학도 그런 줄로만 알았고, 내가 무엇이 되고 싶은 지나하고 싶은 지와 같은 비전도 없었던 것이다. 

그저 대학이라는 무리에 끼었다는 것 만으로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았다고 안도할 뿐이었다는 걸 나는 그때 알았다. 하지만 나는 그저 알았을 뿐이었다. 머릿속으로 생각만 할 뿐. 

하도 강의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아서 늘 딴생각을 하면서도 꾸역꾸역 강의를 들었다. 

회계학 수업에서 '산포도' 강의를 들으면서 이솝우화의 '신포도를 따 먹으려는 여우'를 생각하는 식으로 말이다. 

'저 포도가 먹고 싶은데 방법이 없구나. 그래 틀림없이 저 포도는 시어 빠졌을 거야. 시어 빠졌을 거야.' 

 

그렇다. 나는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가기로 한 것이다. 

찾아보지도 않은 내 길을 '시어 빠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아웃사이드-인>의 자아를 형성하고 있는 줄도 모르는 채... 

 

다시 영화 <인사이드 아웃>으로 돌아가면 기쁨의 노란색 구슬을 '슬픔이'가 만져서 파랗게 만들었을 때 나타난 슬픈 기억은 없던 것이 창조된 것이 아니다. 단지 편린이었던 순간을 앞 뒤로 확장했을 뿐이다. [기억하는 자아]는 한순간을 스냅숏으로 남기지만 [경험하는 자아]는 비디오 클립과 같다고 볼 수 있다. 하키 우승을 축하받던 '라일리'의 행복한 기억을 조금만 돌려보면 친구와의 다툼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인생은 이처럼 입체적이고 다면적이다. 

 

나는 앞서 말한 시기에 엄청난 자격지심에 빠져서는 친구에게 나를 무시하지 말라고 시비를 걸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그날을 매우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일부러 기억하지 않기 위해 애를 써왔다. 하지만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그 뒤에 숨어 있었다. 그와 술집 옆 골목 바닥에서 뒤엉킨 뒤 내가 비참함을 이기지 못하고 흐느꼈을 때 그가 조용히 내 어깨를 토닥여주었고 우리는 한 동안 서로를 이해하는 친구가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심지어 이 글을 쓰기 전까지 내가 어떻게 그와 친구가 되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여러 번 이야기했듯이 나는 지난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상처를 덮어버리는 방법으로 기억을 지우는 것을 선택한 나의 무의식적인 습관 이리라.  

그래서 한동안 나는 글을 쓰지 못했다. 매일같이 분투를 해보았지만 글을 쓰려는 생각을 할수록 괴로웠다.  

기억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에피소드가 없어서 글감을 짜내느라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글을 써서 우선 나부터 위로해보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참으로 많은 것들이 기억이 나고 감정들이 북받쳐 올랐던 것이다. 

어떤 날은 글 따위 쓰지 않아도 좋으니 차라리 기억하지 못하던 며칠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괴로웠고, 다시 부정적인 생각들에 지배가 될까 봐 두렵기도 했었다. 

애초에 기억을 끄집어내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는 그것들을 마주한 뒤에 홀가분하게 비워버리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이지.... 얕보다가 큰코다치고 있었다. 

 

하지만 [기억하는 자아]가 가리고 있는 입체적인 나의 [경험]들을 떠올리자 기억만이 전부는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늦은 사춘기 때 자기 비하와 자격지심에 빠졌던 나를 돌아보면 내 어깨를 두드려주던 친구가 옆에 있었다. 

급여가 밀리고 퇴직금까지 떼였던 예전 직장생활을 돌이켜보면 처음으로 내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었다. 

쌍둥이를 한꺼번에 앞에 앉고 뒤에 업어 재우느라 늘 피곤했던 기억들 뿐이지만 그 애들이 나를 향해 웃어주고 기어 왔을 때의 행복을 잊었었다. 

 

우주를 날던 소행성이 태양의 중력을 못 이겨 떨어지면 태양의 표면은 그것을 뜨거운 에너지로 녹여 자기 안에 수용한다. 그때 태양은 더 밝게 빛난다. 마찬가지로 [기억하는 자아]에 휘둘리지 않는, <인사이드 아웃>의 자아는 외부의 영향을 녹여 그 사람을 더 밝게 빛나게 할 것이다. 그것이 기쁨이던 슬픔이던 분노이던 소심이든 간에.  

 

하지만 그 아름다운 경지에 이르기 위한 길은 끝을 알 수도 없고 고단하기도 하다.  

종교와 인종을 떠나 수많은 구도자들이 그 길을 찾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서기도 했으며, 내면의 인도자였던 심리학자 칼 융 조차 말년에 스스로 고백하길 자신 역시 아직도 그 길을 가는 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아직도 수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도 그 길을 가는 안내서와 같은 책이기 때문이리라. 

 

영화 <인사이드 아웃>은 11살 '라일리'의 성장기로 끝이 나지만, '라일리'가 16살이 되고 20살, 30살, 40살이 되면 또다시 새로운 성을 만들어 낼 것이다.  

사랑과 이별의 성일 것이고, 실패와 성공의 성이기도 할 것이다. '라일리'가 부디 다양한 색깔의 기억 구슬들로 성을 만들어 나가길 바란다. 그리고 그 다채로운 성을 자랑스러워하길 바란다.  

기쁨과 환희의 스냅숏으로만 장식된 포토월이 아니라, 진정한 <인사이드 아웃>의 성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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