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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뭇별중한별 Feb 19. 2022

여기, 다시 나를 심다


“오늘은 좀 늦게 나오자니까… 밤에 눈은 좀 붙였어?”

점심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야 출근한 K는 까치머리를 한 나를 보고 멋쩍게 말했다. 나는 K가 내미는 커피를 받아 들고서야 간신히 기지개를 켤 수 있었다. 매 분기 말마다 있는 평가 미팅에서 우리 팀의 노력을 어필하기 위해 프로젝트의 수장인 나는 그야말로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어릴 땐 죽을 만큼 노력하면 경험이라도 쌓인다지만, 우리 나이엔 죽을 만큼 하면 진짜로 죽는다니까.”라고 K는 평가 미팅을 준비할 때마다 투덜거렸다. 그럴 때마다 나는 K를 등 떠밀어 들여보내고, 미안한 눈빛을 보내는 팀장들에게 인사를 건넨 뒤에 혼자 사무실에 남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들 모두 함께해주면 좋겠으나 그들의 불만을 다독일 에너지조차 내겐 남지 않았으니 차라리 혼자 남는 게 낫다는 것이었다.


K의 말처럼 이젠 육체가 밤샘 작업을 용납하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밤 11시가 넘어서면 잠이 쏟아지고 극심한 두통이 먼저 찾아온다. 두통과 졸음을 이겨낸다 하더라도 다리에서부터 힘이 빠져서 물 한잔 마시러 가기도 어려워지는 게 아닌가. 그러다 새벽녘이 되면 이러다 어떻게 되는 게 아닐까 겁이 날 정도로 기운이 빠져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런 모습으로 집에 돌아가면 아내는 걱정 어린 잔소리를 쏟아내었다. 요지는 왜 매번 혼자 그 일을 다 하냐는 것이었고 나의 대답은 늘 책임감이었다. 내가 구상한 프로젝트에서 매일같이 성실하게 일해주는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미래를 걱정하지 않고 즐겁게 개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된다는 얘기였던 것이다.




<융의 영혼의 지도> - 머리 스타인, 문예출판사- 에서는 페르소나에 대해 이렇게 소개한다.


페르소나는 ‘나와 관계를 맺는 타인이 나를 이렇게 봐주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모습 또는 역할로, 마치 배우가 연기를 통해 만들어내는 극 중 인물과 같은 존재’이며, 사회의 기대와 요구에 맞춰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의 사회적 목적과 열망에 맞춰진다.


페르소나를 사용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개인과 세상을 이어주는 접점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선한 역할의 페르소나로 살아갈 때 사회 전체적으로 도움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기(셀프 self) 페르소나를 구분할  을 정도록 인지하지 못하거나 혹은 몰입했을 때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페르소나를 ‘자기 착각하다가는 진짜 자신이 누구인지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렇듯 페르소나가 자아를 잠식해 버렸을  그림자(쉐도우 shadow)와의 충돌이 일어난다.

융은 ‘그림자 ‘페르소나로 인해 억압된 다른 자아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자기(셀프) 아닐  있지만 인간의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본능이라고 설명될  있다.


융은 서양 기독교 사회의 특징을 교황이 종교를 특권으로 독점하고 그것을 무기로 개인의 인격을 말살하는 중세 암흑기를 거치면서 사람들이 칠죄종(교만, 인색, 시기, 분노, 음욕, 탐욕, 나태) 그림자 속에 감춘 페르소나를 형성했다고 분석했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인류의  범죄는 시기심에서 비롯되었으며, 시기심은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니 “교만도 자랑도 아니하라라고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았지만, 그림자란 집단 무의식의 발로로써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것이라서 (성경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원죄 한다. 남을 판단하는 , 욕심에 사로잡히는 , 시기하는  등이다.) 페르소나와의 충돌이 어느 시기에던 일어날 것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페르소나가 너무 팽창하게 되어 그림자를 무조건 적으로 억압하고, 나아가서 진정한 자기를 무시하면 심리적 공허감이나 허무함이 찾아올 수밖에 없다고도 그는 설명을 한다.


나는 오랫동안 책임감으로 포장된 내 모습이 나의 페르소나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밤새 일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들어와 잠을 자려고 누웠을 때나 아침에 샤워를 할 때 내 머릿속을 잠식하고 있는 것이 “잘했다는 칭찬을 들을 기대”였어도 나는 그것이 내 본성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었다.  

나는 누가 칭찬을 하면 손사래를 치고, 인정을 해주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 나에 대해 반대의 평가를 하면 참지 못하여 분노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마흔 즈음이 되어서 내 인생의 2막은 철저하게 실패했고, 내가 열심히 노 저어 가려고 했던 보물섬은 이제 박제된 채 전시장 한 구석에 놓인 유물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때 나는 친절, 겸손, 책임감이 나를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가식을 살에 붙여 하늘로 날려 보낸 연등 같은 것이었다. 불이 붙으면 순식간에 재로 흩어지고 앙상한 뼈대만 남아 추락하고 마는.


그때 페르소나를 떠올렸다. 무엇이 진짜 나이고 어떤 것이 페르소나인가.

이른바 제3의 사춘기가 시작된 것이다. (맙소사…)


자기(셀프)는 원형이며 그것은 인식하고 실현하는 대상이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융은 말한다. 다만, 페르소나는 얼마든지 바뀌기도 하고 중첩되기도 한다. 내 안에는 천 개의 페르소나가 있다고도 하고 요새는 또 ‘부캐’의 시대, 멀티 페르소나를 유행처럼 표면화하는 시대가 아닌가.


나는 지금껏 내가 형성했던 페르소나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림자와의 대면을 철저히 무시하여  힘을 조절하지 못하고  삶을 건강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양쪽 날개로 날아야 하는 새가 한쪽 날개를 접은  힘겹게 날고 있는 꼴이랄까.


나는 이제 나를 견디게 만드는 힘이 칭찬받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임을 직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지만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이제부터라도 좀 더 솔직한 삶을 살았으면 한다. 포장하고 꾸미지 않은 진솔한 감정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나의 욕구를 순수하게 드러내는 캐릭터가 되었으면 한다. 사람 냄새가 나고 매력이 느껴지는 생동감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열심히 노력하여 얻은 성과로 칭찬받고 싶은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며, 인정받고 싶은 게 속물근성은 아니잖은가.


우리 아이들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아기 같은 면이 많이 간직되어 있어서 부모로서 기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귀찮기도 하다. 어찌나 주목받고 자랑하기를 좋아하는지 뭘 하든 꼭 아내와 내가 둘 다 보고 칭찬을 해줘야 직성이 풀린다. 아내만 칭찬해도 안되고 나만 칭찬해도 안 되는 것이다. 요새는 겨울 올림픽에서 피겨스케이팅을 보고는 푹 빠져서 미끌거리는 수면양말을 신고 점프를 하고 스핀을 도느라 난리인데, 칭찬을 원하는 만큼 받을 때까지 몇 번이고 그 공연을 하는 것이다. (아파트 1층으로 이사를 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 모습이 나는 한편으로 부러웠다. 얼마나 싱그럽고 생동감이 넘치는가 말이다. 헐떡이면서 “이것 봐봐~ 어때? 어때?”하는 표정 속에 행복할 기대감이 넘쳐흐르지 않는가!


나는 부캐까지 키울 형편은 못된다. 인정하긴 싫지만 힘에 부친다.

하지만 나부터 다시 심어 보련다. 물을 주고 햇볕을 비춰주어 나를 키울 것이다. 그래서 자라난 싹을 보여주고 피어난 꽃들과 넓게 펴진 잎사귀를 보여줘야지.

그리고 우리 아이들처럼 자랑할 것이다.


“이거 봐라~! 이 것도 봐라!!”


그리고 나와 같은 사람에게 다른 길을 안내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소망한다. 그것이 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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