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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뭇별중한별 Feb 26. 2022

아버지와 가자미식해

가자미식해의 맛이 제법 나는 가게가 있기에 주인에게 그것만 조금   있겠냐고 부탁하여 그것을 싸들고 아버지의 집으로 갔었다. 아버지는 반가워하며 그것의 맛을 보았지만 기뻐하시는 정도가 10 만점에 6 정도 되는 걸 보니 이번에도 실패인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고향인 함경도 흥남에서 6살이  무렵까지만 살고 피난 내려오셨다고 했고  이후 미군들이 먹다 남긴 음식들에 익숙해져서인지, 또래들과는 다르게 치즈나 햄 같은 것들을 좋아한다고 하셨으나 비빔냉면과 더불어  가자미식해에 관해서는 특별한 취향을 가지고 계셨다. 어렴풋한 고향에서의 어린 시절 밥상에  오르던 것이었다고 하셨으나 남쪽으로 내려와서는 할머니마저  맛을 재현하지 못하셨다고 했었다. ‘기후 탓인가, 고춧가루나 소금이 다른가, 가자미가 다른가할머니는 가자미식해를 담글 때마다  같은 소리로 고개를 갸웃거렸다고 했다.


한 번은 아버지가 크게 기뻐하며 가자미식해를 한 통 가득 사 온 적이 있어서 나도 아버지가 늘 그리던 그 맛을 경험한 적이 있었는데, 첫맛은 여느 가자미식해들과 다르지 않았으나 텁텁한 뒷 맛이 없이 시원함을 유지하면서 감칠맛이 남아있는 것이 무언가 다르다는 느낌은 들었다. 가자미 살의 삭힌 정도나 조밥의 비율 같은 것도 말 그대로 ‘적절’하여 과연 찾아 헤맬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한 통이 10점짜리 가자미식해의 마지막이었다. 같은 집에서 여러 차례 구입을 했으나 그때의 맛은 나오지 않았다. 그 이후로 나도 여러 군데 가자미식해를 내온다는 집들을 찾아보았으나 아버지를 만족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피란생활 회고는 늘 사람들이 빼곡한 열차의 지붕에 자리를 잡고 사흘 동안 칼바람이 에는 추위와 화통의 매연에 시달린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열차에 매달려가다가 깜빡 졸아 떨어진 사람들 이야기, 열차가 멈추지 않고 달려가는데 그걸 올라타겠다고 뛰어들었던 사람들 이야기, 비좁고 모두 힘든 와중에도 이기심을 드러냈던 얄미운 사람들 이야기, 꼬박 굶는 와중에 계속 매연을 마셔댄 탓에 괴로웠던 이야기 같은 것들을 아버지는 몇 년에 한 번씩 꺼내놓으셨다. 남녘땅에 도착한 뒤에도 더 힘든 일들이 많았지만 아버지는 그 피란길을 이렇게 회상했다.

“땅에 발을 디디는 순간 이제 살았다,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겠다 싶었다고. 그다음엔 뭐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열차 위를 생각하면 괜찮은 거야. 배고파서 수돗가에 가서 물만 들이켜면서 공부할 때도 화통 매연만 마시던 때에 비하면 나았으니까.”


늦게 시작된 회의를 마치고 나서 차에 오르니 어느새 저녁 8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집에는 저녁을 먹고 간다고 말해 두었던 터라 이대로 돌아가면 아내가 투정할 것이 분명했는데, 9시까지 영업제한이 있으니 식당들도 문을 닫을 터였다. 나는 재빨리 차를 골목으로  아들 어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처음 들어선 곳이라 어디로 가야 식당이 있을지 몰라 조바심이 나던  마침 순댓국을 파는 노포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가자미식해가 있었다. 반찬으로 조금 내어진 것을 맛보니 익숙한 감칠맛이 돌았다.   나온 가자미 살을 씹는데 지도 않고 너무 삭지도 않은 것이 적절한 느낌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아버지를 생각했다. 주인이 펄펄 끓는 뚝배기를 내오고는 TV 켰다. 내가 순댓국에 양념을 치는 동안 주인은 채널을 여기저기 돌려댔는데 뉴스 채널에서 “러시아,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빨간 바탕의 글씨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주인은 리모컨을 내려놓고,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뉴스 화면을 바라보았다. 어둠에 쌓인 도시에 화염이 터져 오르고 리포트를 하는 외신기자 뒤에서 사이렌 소리와 폭발음이 연신 들렸다.


아버지는 휴식이 필요할 때면 속초를 즐겨 찾았는데, 가는 길이 독특했다. 뻥 뚫린 고속도로를 마다하고 매번 포천을 지나 김화로 올라가 민통선 구역을 통과하여 원통과 인제를 거쳐서 한계령을 넘는 것이었다. 나도 몇 번 차를 몰고 따라가 보았으나 수 없이 많은 산고개를 구비구비 돌아가야 하고, 민통선 통과하는 절차도 여간 복잡하지 않아 고생길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한결같이 그 길을 고집했다. 그래도 나는 아버지에게 왜 그 길로만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언젠가 아버지 차의 조수석에 앉아 그 길을 지나갈 때, 양쪽으로 늘어선 군부대의 자주포들을 보는 아버지의 얼굴 표정에서 어렴풋이 그 마음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TV에서는 평화를 원한다며 울먹이는 시민의 인터뷰와 국제사회 지원을 호소하는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모습 뒤로 피란길에 오른 긴 차량행렬을 화면에 내보냈다. 식당 주인은 그 장면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

“저렇게 차가 길게 막혀서 어느 세월에 피난을 가나, 그렇다고 서쪽 국경까지 몇 백 킬로를 걸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쯧쯧”


아버지는 피란 열차를 이야기할 때 꼭 끝에 붙인 말이 있었다.

“우리가 비록 배를 못 탔지만 운 좋게 열차는 탈 수 있었다고, 비록 지붕 위의 춥고 위험한 자리였지만. 그 지붕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 내려오는 것을 봤어. 가다가 보면 다리도 끊어져있고, 폭격 맞아 죽어 있는 사람들도 보이는데 아까 봤던 사람들이 여길 어떻게 지나가나 싶은 거야. 나는 내가 열차에 타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 뒤는 늘 불평하지 말고 가진 것에 감사하라는 훈계로 이어졌으므로 어릴 때 나는 그 이야기를 지겨워했었다.


나는 조금 식어버린 순대국밥을 묵묵히 들이켰다. 주인에게 가지미 식해를 따로 팔겠냐고 물으려다가 마지막 손님인 나를 보내고 가게를 정리하려는 주인의 몸짓을 보아 그만두었다. 계산 처리를 기다리는 동안 벽에 걸린 TV를 바라보았다. 화면에는 러시아 대통령이 단호한 표정과 몸짓으로 말하고 있었다.

“우리의 국익을 방해하는 자들은 잔인한 보복 앞에 놓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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