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정말 친구일까?
2) 우정의 영역 : 우리가 정말 친구일까?
비즈니스 영역에서의 진정성은 언제나 희소했습니다. 이 영역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면서 협업이나 거래를 통해 가치를 만들어 왔기 때문에 진정성에 대한 기대 자체가 높지 않습니다. 반면, 조건 없는 사랑과 관심이 당연한 애정의 영역에서는 진정성은 기본적인 관계의 구성 요소로 여겨졌습니다.
그 성격이 비교적 굳어져 있는 두 영역 사이에 우정의 영역이 존재합니다. 우정의 영역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관계입니다. 선택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 관계가 유연하고, 다양한 양상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우정은 쉽게 깨질 수 있고, 그렇기에 어렵기도 합니다.
한 사회가 진정성을 지니고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곳도 바로 이 우정의 영역입니다. 비즈니스의 영역이 차가운 계약의 관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애정의 영역은 그 시작부터 진정성이 있는 관계를 전제로 합니다. 중간 영역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는 것이 바로 우정의 영역인 것이죠. 우정의 영역에 진정성이 살아 숨 쉬면, 그 사회는 진정성이 있는 사회입니다. 반대로 우정의 영역의 크기가 협소하고 서로를 수단으로 여기는 관계라면 그 사회는 진정성 없는 사회가 되고 맙니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북유럽의 복지사회는 사회적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신뢰는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겠다는 이기심이 아닌, 서로를 배려하고 양보하는 이타심에서 비롯됩니다. 잠재적 유토피아라고 여겨졌던 북유럽 국가들도 점차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들에 의해 진정성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전 지구적으로도 진정성의 우물은 말라가고 있는 듯합니다.
우정의 영역에서 대한민국 진정성의 전성기를 그린 드라마가 있습니다. 바로 신원호 PD와 이우정 작가의 "응답하라"시리즈입니다. 이제는 잘 쓰지 않는 “이웃사촌”이라는 단어를 이 드라마는 완벽하게 그려 내고 있습니다. 과거 우리는 사촌 정도의 가까운 친척까지는 서로를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목적으로 대하는 진정성이 존재하는 범위라고 가정했던 것 같습니다. 깍두기와 불고기가 담긴 그릇이 오가는 이웃 간의 저녁 시간과 서로를 놀리면서도 진심으로 아끼는 친구들의 우정을 보면서 "가난했지만 풍요로웠던 시절"의 향수를 느낍니다. 하나의 장르가 된 이 드라마의 작가 이름이 우정이라는 것도 재미있는 우연입니다.
놀라운 친화력으로 버스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도 금방 친해지는 할머니들의 행동이 위험해 보이는 세상입니다. 사람 좋은 친절보다 영악한 이익 계산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세상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타인을 수단으로 삼아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사람을 보면 속으로 한마디 합니다.
"너... 친구 없지?"
■ 세 가지 종류의 우정 :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
요즈음 방송국에서는 인지도를 쌓은 연예인들에게 이 시대의 멘토 역할을 맡깁니다. 언젠가 한 연예인이 방송에 나와서 우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친구요? 다 쓸데없어요. 친구들 만나 소모하는 돈과 시간이 얼마나 아깝습니까? 그 시간에 노력해서 성공하면 친구는 다 따라옵니다.”
이 조언은 대한민국 양궁 국가대표 선수들이 쏜 화살처럼 시청자 마음의 과녁 한가운데 명중합니다. 친구들과의 우정을 나누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거나 상처받은 경험이 생생히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고생은 누구나 해 본 적이 있는데, 친근한 멘토가 방송에서 친구 따위는 필요 없다고 말해주니 안심이 되죠. 대인관계를 잘 맺기 위해서 성인군자처럼 행동하라는 교과서 내용보다 훨씬 마음에 와닿습니다.
시청자들이 공감하니, 시청률이 오르고, 시청률이 오르니, 방송에서는 다시 같은 이야기가 반복됩니다. 이렇게 이 시대의 우정의 가치는 점점 낮아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장 듣기 좋은 소리를 의심해야 합니다. 도파민을 자극하는 달콤한 음식을 조심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우정은 필요 없는 것일까요? 우정은 성공해서 얻은 돈이나 명예로 명품 사듯이 쉽게 살 수 있는 것일까요? 그렇게 구매한 우정에는 과연 진정성이 깃들어 있을까요?
인간을 사회적 동물로 정의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의 가치를 매우 높게 평가했습니다.
“우정이란 삶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그 어떤 것을 제공한다. 재산이 산더미처럼 많을지라도 친구가 없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중에서)
2400년 전에도 재산은 가치를 비교하는 수단으로 유용했었나 봅니다. 우정의 중요성을 금은보화의 가치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네요. 생각해 보니, 돈(재산)과 우정은 “사회적”이라는 특성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싹트는 우정과 같이 돈도 주고받을 대상이 있을 때나 효용가치가 있으니까요. (사람을 뜻하는 인간(人間)이라는 한자어에 사회성을 의미하는 "사이 간(間)" 자가 "사람 인(人)자와 동등한 무게로 존재하는 것이 문득 새롭고 그 통찰이 빛납니다.)
이렇게 빨리 변하는 시대에 2400년 전 이야기가 멀게 느껴진다면 2020년대 사회성 분야 최고의 학자가 전하는 이야기도 한번 들어보시죠.
지난 20년 동안의 의학 문헌에서 도출되는 결론들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은 친구가 많을수록 우리가 덜 아프고 오래 산다는 증거가 아닐까 한다.... 놀랍게도 연구 대상자들의 생존 확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사교 활동 수치였다. 특히 심장 발작이나 심장마비를 일으킨 적이 있는 사람들에게 사교 활동 척도의 영향이 컸다. 결과를 가장 잘 예측하는 변수는 사회적 지원을 자주 받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를 나타내는 수치, 그리고 사회적 네트워크와 지역 공동체에 얼마나 안정적으로 소속되어 있는가를 평가하는 수치였다. 이 두 항목의 점수가 높았던 사람들은 생존 확률이 50퍼센트나 높았다. 이것과 비슷한 효과를 나타낸 유일한 변수는 금연이었다.... 나의 주장은 친구의 수와 우정의 질, 또는 금연 여부에 비하면 당신의 친절한 동네 의사가 걱정해 마지않는 다른 변수들의 영향은 사실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열심히 하고, 병원에서 주는 약을 삼키면 당신에게 좋겠지만, 그냥 친구 몇 명과 잘 지내기만 해도 상당한 효과가 있다. (로빈 던바, 프렌즈 중에서 발췌)
옥스포드대의 로빈 던바 교수는 친구가 건강과 행복의 원천이라고 단언합니다. 이 내용도 친구를 수단으로 삼아 얻는 건강과 행복이라는 이익에 대한 것 아닌가라는 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는 이익과 손해라는 수준에서도 우정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발췌였다고 답하고 싶네요.
로빈 던바 교수의 <프렌즈>는 우정에 대한 거의 모든 지혜를 모아 놓은 책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은 밑줄이 긋지 않은 부분보다 많을 정도입니다. 시트콤 <프렌즈> 만큼이나 재미있으니 꼭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정론으로 돌아가 볼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들 니코마코스에게 우정에 대해 더 자세한 설명을 합니다.
기원전 4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우정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첫 번째 우정은 주로 '공동의 즐거움'을 지향한다. 두 번째 우정은 '이익을 먼저 생각'한다. 하지만 모두가 꿈꾸는 진짜 우정, 세 번째는 어떤 계산도 없이 서로의 영혼을 어루만진다. 우정이라고 해서 다 같은 우정은 아니다.
(빌헬름 슈미트 『우리가 정말 친구일까』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을 유용성(이익, Utility), 쾌락(즐거움, Pleasure), 선(탁월성, 인격, Virtue)을 기반으로 한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습니다. 유용성과 쾌락의 우정은 이익과 즐거움이라는 목적이 달성되면 우정도 끝납니다. 하지만,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 자체가 목적인 '선의 우정'은 가장 오래 지속되는 진정한 우정인 것이지요. 진정한 우정은 “상대방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여기는 것”이라는 대인관계에서의 진정성의 정의와도 일치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진정한 우정은 이익과 즐거움의 우정까지 포괄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익과 즐거움으로 시작된 우정도 진정한 우정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처음부터 정해진 세 갈래의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길에서 시작하더라도 상대방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면서 우정을 쌓다 보면, 진정한 우정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우정에 도달하기까지 여러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대 그리스 시대보다 이해관계가 첨예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대한 적응을 위해, 대인관계의 장면마다 자동으로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는 차가운 계산기가 머릿속에 하나씩 자리 잡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자동계산기가 계산을 시작해도 "또 계산하느라 애쓰는구나"하고 시야를 높고, 멀리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낯선 독일어 단어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단어가 자주 쓰입니다. 이 단어는 남의 고통이나 실패를 보면서 기쁨을 느끼는 마음입니다. 독일어로 손해나 고통을 뜻하는 샤덴과 기쁨을 뜻하는 프로이데가 조합되었다고 하네요. 남의 손해나 고통을 보면서 기쁨을 느끼는 것은 악한 마음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샤덴프로이데라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이 마음의 존재를 알고 나서야 우리는 이 마음에서 거리를 둘 수 있습니다.
특별히 선하게 태어난 사람, 특별히 악하게 태어난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양쪽 극단의 5%를 제외한 대다수는 문화적, 사회적 맥락에서 이기심이나 이타심이 발현됩니다. 위의 자동계산기나 샤덴프로이데 같은 마음의 작동 방식에 대해서 알아 두고, 이 사실을 여유 있게 위에서 바라보는 "메타인지"를 가질 때 우리는 진정한 우정으로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