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애정의 영역

사랑의 묘약

by 동녘새벽

3) 애정의 영역 : 사랑의 묘약


우리나라에는 권력자들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더럽게"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이 동네에서는 방귀깨나 뀌는 사람이라면서?”


물론 위의 표현은 방귀를 뀌는 횟수나 방출하는 가스의 양 등 물리적 사실의 적시가 아닌 은유적 표현입니다. 동서고금 남녀노소 모두 방귀는 뀝니다. 그러니까 "방귀깨나 뀐다"는 표현은 남들 모르게 소극적으로 뀌는 방귀가 아니라, 사람들이 있거나 말거나 적극적으로 뀌는 방귀를 뜻합니다. 해석하자면 권력을 가진 사람은 대체로 누구의 눈치도 안 보고, 굳이 예의도 갖출 필요도 없다는 것이지요.

태평양 건너 2026년의 백악관을 한 번 보면, (어리석은) 권력자들은 정말 자기 마음대로 행동합니다. 아, 우리는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들을 권력자라고 부르기도 하죠. 제 생각에 일상의 T 모 대통령도 방귀깨나 뀔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더 더러운 곳으로 흐르기 전에 이 챕터의 주제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왕적 권력자들도 결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대인 관계의 동심원’에서 가장 안쪽에 위치한 ‘사랑’입니다. 사랑을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내 맘 같지 않은 지), 예로부터 손쉽게 사랑을 얻는 ‘사랑의 묘약’에 해당하는 신화들이 존재합니다. 큐피드의 화살부터 과학적으로 검증되었다는 페로몬 향수, 이성의 마음을 100% 얻을 수 있다는 연애 지침서 등등.


바로 반론이 제기될 것입니다. 권력자들에게는 수많은 사람들이 구애를 할 텐데요? 고르기만 하면 되는데 뭐가 마음대로 안될까요?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세계에 존재하는 알파 메일들을 살펴보세요~!

네 분명 그런 면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을 이 책의 주제인 "진정성의 차원"에서 보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심리학 대가의 통찰을 보시죠.


권력의지(지배하려는 의지)가 팽배한 곳에서는 결코 사랑이 충만할 수 없다.

- 칼 융 (벨 훅스, 올 어바웃 러브 중에서)


요즈음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MBTI의 성격 차원들이 바로 칼 융의 이론에서 나왔습니다. 프로이트가 신뢰하던 제자였지만, 견해 차이로 결별을 택하게 됩니다. "저 친구는 컴플렉스가 있는 것 같아~!"라고 할 때 컴플렉스도 융의 심리학에서 비롯된 용어입니다.

저는 융의 이야기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권력을 최우선의 가치로 두는 자기애적 권력자들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다."


앞선 챕터에서 논의한 것과 같이 "대인관계의 진정성은 타인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 정의는 애정의 영역에도 정확히 부합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능력을 잃은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타인을 그 자체로 경애하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대상화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초적인 남성들은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초적인 특성이 적어 보이는 바람둥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희대의 바람둥이들(돈 지오반니, 카사 노바 등)은 자신은 많은 여성을 만났지만, 한 번에 한 사람만 만났고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다고 항변합니다. 그들의 변명을 들어 보면 상대방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여기는 진정한 사랑에 대해 알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 주변의 흔한 마초들과 바람둥이들은 그저 타인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는 어린아이 같습니다. 이들은 진정한 사랑의 능력이 "거세"된 존재들입니다. 물론, 상대방보다는 상대방이 가진 권력이나 부를 더 사랑하는 여성들도 진정한 사랑의 능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진정성의 문제는 결국 이기심(혹은 자기 중심성)과 이타심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진정한 사랑이라면 관심과 이익의 초점이 내가 아닌 상대방에게 있습니다.

실연을 했을 때나, 애절한 구애가 거부 당하는 상황을 살펴볼까요? 우리는 죽을 듯이 괴로운 그 아픔을 해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 즐거이 소통하는 "관계의 단절" 그 자체가 아픔의 원인입니다. 하지만 내가 거부당하는 사실에 대해 자존심이 상해서 아프기도 합니다. 관계의 단절보다 자존심의 훼손이 더 큰 아픔이라면, 나에 대한 사랑(자기애, 자존심)이 상대방에 대한 사랑보다 위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경우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기 힘듭니다. 그리고 그 자기애는 대체로 사랑의 관계가 단절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진정한 사랑을 어렵게 하는 또 다른 문제는 이익과 손해를 따지는 "거래의 관점"이 애정의 영역에도 침투한 것입니다. 결혼 적령기의 회사 후배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들이 연애에서 물질적인 이익과 손해를 엄청나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헤어지는 마당에 내가 사준 가방이나 구두를 다시 돌려줘"하는 이야기는 흔한 유머의 소재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생생한 다큐가 된 느낌입니다.


애정의 영역에서 "거래의 관점"이 퍼져 나간 시점은 자기애가 지나치게 높은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과도 관계가 있을 듯합니다. 자기애가 강해서 상대방을 나를 위한 수단으로 여기면, 당연히 아주 작은 손해도 감당할 수 없을 테니까요.

문제는 이런 자신을 위한 작은 이익에의 집착은 결국 커다란 손실로 돌아온 다는 점입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기본적으로 지능의 차이가 없습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기술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으로 발전했지만, 대인관계의 영역에서의 사회적 기술은 오히려 퇴보했다고도 느낍니다. 우리의 현명한 선조들은 작은 이익을 탐하면서 사랑과 배려의 관계가 주는 거대한 이익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습니다.

돌아가신 선조들이 작은 물질적, 감정적 이익을 탐하면서 스스로를 고독 속에 방치하는 현대의 "소탐대실의 헛똑똑이"들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하실까요? 작은 이익에 집착해서 성별로 나누어 서로를 혐오하는 장면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요?


이익과 손해를 따지는 거래의 관점을 도저히 버릴 수 없다면 거래상의 장점을 현명하게 이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는 방식으로 말이죠. 어떤 애정의 관계에서 한쪽으로 계속 손해가 누적되는 것 역시 정상적인 관계는 아닙니다. 우리는 거래할 때 계약 조건을 철저하게 정하는 것처럼, 자신이 느끼는 불편한 감정을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감내할 수 있는 범위를 정하는 등으로 거래의 기술을 "진정한 사랑"에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성의 관점으로 보면 뒤틀린 애정의 관계는 연인 간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유사한 점이 발견됩니다. 우리는 간혹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여기고,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부모를 봅니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부모는 자신들이 느끼는 사회적 시선에 맞추어 자녀들을 몰아세웁니다.

저는 이렇게 타인을 통제하려는 사람들을 "연을 날리는 사람들"에 비유하곤 하는데요. 가느다란 연줄로 연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하다가, 마음대로 통제가 안 되는 순간이 오면 연줄을 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녀를 온전히 통제하거나 완전히 방임하는 두 가지 극단적인 방법밖에 모릅니다.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태도는 인본주의 심리학자 칼 로저스의 무조건적이고 긍정적인 존중 (Unconditional Positive Regard)이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응석받이로 키우라는 뜻이 아니고, 상대방이 어떠한 상태이든 상관없이 '존재 그 자체'로 귀하게 여기는 심리적 태도를 말합니다.

애정의 영역에서 펼쳐지는 연인과의 사랑, 부모 자식 간의 사랑.

두 관계 모두 어려운 문제를 내포하는 복잡한 관계입니다. 잡지에서 보이는 수많은 연애 관련 칼럼이나 서점에서 찾을 수 있는 엄청난 자녀 양육 서적은 그 관계의 어려움을 반증하는 증거물들입니다.

지독하게 얽힌 실타래를 푸는 실마리는 역시 진정성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수단으로 생각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는 것.


진정성은 가장 효과적인 사랑의 묘약이고, 가장 실수 없는 양육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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