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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NDWANA Aug 09. 2019

로마제국부터 천년까지

[사생활의 역사 1] 아리에스 外



현대적인 의미의 사생활의 역사를 고찰하자면 근대이후 브루주아적인 생활양식이 나타날때부터나 가능할 것이다. 근대까지 개인 스스로가 공과 사를 구분하고 결정을 하는 상황은 아주 드물었다. 공과 사는 일상에 매우 혼재되어있었으므로 근대 이전 사람들의 사생활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를 둘러싼 사회적인 환경과 가정생활, 개인이 어떤 식으로 사회생활을 영위했나를 고찰하는 당시의 사회상을 설명하는 일이 될 것이다. 아리에스를 비롯한 이 책의 야심찬 기획자들은 시작하자마자 이같은 근본적인 한계에 부딫힐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기로 했다. 게다가 다종다양한 인류전체의 생활상을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몇몇 특징적인 시대의 대표적인 부분들만 발췌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은 일부 유럽인들의 생활상의 변천사를 써 내려갈 수 밖에 없었지만 그런 시도도 매우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역사서 라는 것은 보통 사건과 인물중심으로 나열되는 것이라 당시의 일반인들이 어떻게 살았나를 설명하는 역사서는 참으로 드물다. 블로크의 '봉건사회'나 시오노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가 명저의 반열에 오른것은 그 시대의 사건과 인물 뿐 아니라 일반인들의 생활상을 듬뿍 담고 있기 때문이다. 권당 900페이지에 이르는 두꺼운 책으로 5권이나 되기 때문에 이 책을 끝까지 일독한 사람이 참 드물겠다는 생각을 먼저했다. 1권은 고대로마와 중세초기의 사람들의 생활상을 다루었다.   



일반인들의 사생활의 중심이 되는것은 예나 지금이나 가정이다. 그리고 부부관계와 가족 또는 친족간의 관계일 것이다. 고대로마나 중세초기까지 가정에서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 취급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도 고대로마에서는 여성이 정치엔 참여할 수 없었지만 가정내에서의 위치는 어느정도 확고했다. 여성의 재산이 인정을 받았고 상속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대로마의 가족의 범위는 오늘날의 혈연중심의 개념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양자와 대부가 너무나도 흔했고 노예들도 같은 식구 대접을 받았다. 노예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지배층은 노예를 그림자처럼 옆에 두고 지냈다. 심지어 부부관계를 하는 중에도 옆에는 노예가 눈을 멀뚱멀뚱 뜨고 지켜보다 관계가 끝난 후 씻을 물을 대령할 정도였다. 노예는 사람이 아닌 애완동물이나 가축 같은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노예뿐만 아니라 친척이나 방문자들도 주인의 방이나 부인의 방에 같이 잠을 자는 경우도 예사였다. 벗은 몸에 대한 금기도 별로 없어서 남자나 여자나 필요할 경우 사람들 앞이라도 거리낌 없이 나체가 되었다. 기독교가 국교가 된 후 스토아학파의 금욕주의가 널리 퍼지게 되고 쾌락을 좇는 행위가 죄악시 되면서 남녀가 유별해지고 여자들은 집안의 가장 깊숙한 곳에 꽁꽁 감춰진다. 하지만 이것은 지체 높은 귀족에나 해당되는 이야기였고 하위계층은 오두막에 부부와 자식들, 방문자가 있으면 그 사람을 포함해서, 노예와 가축들이 보는 앞에서 한꺼번에 홀랑 벗고 침대에 들어가야 했다.



고대로마는 돈을 벌기위한 모든 방법이 너그러이 용인되는 시기였다. 뇌물은 일상적인 것이었고 가장 고상한 부류의 철학자도 고리대금업을 했다. 그리고 돈이 될만한 사업이면 그게 무엇이든 닥치는대로 투자가 이루어졌다. 속주의 총독이 되면 속주민으로부터 돈을 뜯어내 부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관직에 있어 공과 사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했고 남의 재산을 어떻게 하면 자기것으로 만들지 호시탐탐 노렸다. 그래서 상속이나 재산권 다툼 문제에 있어 분쟁이 끊이질 않았고 로마의 사법체제가 발달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반면 가문의 명예를 중요시 했기 때문에 부자들이 시민들을 위해 축제를 열거나 건물을 기부하는 행위가 많았다. 나중에는 사람들이 관리들에게 공공연하게 이런 기부를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러서 아무도 그 관직을 맡지 않으려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세로 이행하게 되면서 서유럽은 말그대로 약육강식의 무법천지가 되고 사람들은 공동체를 중심으로 뭉치게 된다. 처음엔 자유민과 노예의 구별이 있었으나 자유민들이 빠르게 장원에 흡수되고 소작농의 신세로 전락하게 되면서 노예와 자유민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장원 특유의 폐쇄성과 배타성으로 인해 로마시대 때보다 개인의 자유는 훨씬 더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의 금욕주의의 확산은 중세를 점점 더 활력없는 것으로 만들어갔고 그런 사회상은 개인의 사생활에도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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