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크리스토프] 롤랑
롤랑은 베토벤에 푹 빠진 작가였다. 일찌기 베토벤의 전기를 집필했었고 그의 음악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리고 베토벤의 귀머거리가 된 고통과 그것을 극복한 예술혼은 그에게 작가적 상상력을 듬뿍 불어넣었을 것이다. 고전주의, 낭만주의를 거치는 동안 프랑스 음악계에서는 이렇다할 거장이 나오지 않은 것도 롤랑이 베토벤에 관심을 가진 이유가 될지 모르겠다. 바흐, 모짜르트, 슈베르트, 브람스, 슈만, 베토벤, 바그너 등등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는 음악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거장들이 연속해서 나왔지만 프랑스에서는 이 시기의 음악계를 대표할만한 음악가를 배출해내지 못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번화하고 예술과 유행에 있어서 앞서가는 도시는 파리였지만 음악에서만큼은 예외였다. 음악의 중심지는 오스트리아의 빈이었다. 당연히 롤랑이 선망했던 베토벤도 그의 음악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빈에서 활동했던 것이다.
롤랑은 소설속에서 베토벤을 파리로 데려오는 시도를 한다. 굳이 꼭 음악가가 독일사람이어야 했냐는 물음을 롤랑에게 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의 분위기로 거장이 프랑스에서 난다는 것이 굉징히 비현실적으로 보였을 수 있다. 그리고 음악이라는 것은 독일인 특유의 완고함이나 고집스러움,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관철시켜내려는 자존심이 그 바탕이 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파리 사교계의 나긋나긋하고 위선적인 분위기에서는 위대한 음악가의 출현이 어렵다고 봤을 것이다.
그래서 독일출신의 천재음악가 장 크리스토프는 파리로 오게된다. 크리스토프는 베토벤을 모델로 한것이었지만 롤랑은 여기에 프랑스의 자유사상을 덧입히는 시도를 한다. 자유사상에 물든 독일출신 천재음악가 장 크리스토프는 그래서 탄생하게 되었다. 장크리스토프라는 외국인의 눈으로 당시 파리의 사교계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상류층의 허영과 위선을 폭로한 것이다. 게다가 시민봉기의 제일 선두에 크리스토프를 세움으로써 크리스토프에게는 행동하는 사상가의 임무마저 주어지는 것이다.
고집스럽고, 불의를 참지 못하고, 끝간데 없는 자존심의 소유자였던 크리스토프는 끊임없이 세상과 불화한다. 파리에 망명해 와서도 결국 외톨이가 될 수 밖에 없었던 크리스토프에게 올리비에가 나타나고 크리스토프에게 자유사상을 전파하게 된다. 장대한 대하소설이지만 크리스토프의 음악적 고뇌와 활동에 대한 이야기보다 그의 사상적인 학습과 사람들과의 사랑, 배신, 우정으로 인해 인간으로써 성숙하는 과정에 훨씬 더 많은 분량이 할당되어있다. 크리스토프는 천재음악가이고 음악의 이론이나 해석능력, 자연으로부터 음악적인 요소를 채취해 내는 능력, 그리고 그것의 가치를 꿰뚫어 보는 능력은 이미 구비되어 있는 것이었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고매한 인격을 쌓아가게 되고 그것이 음악적 열정과 합쳐져서 보다 더 원숙한 음악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은 크리스토프의 인간적인 고뇌와 욕망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그리고 베토벤이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바라며 9번 교향곡을 작곡했던 것처럼 인간의 화해와 자유로운 평화가 가장 훌륭한 가치라는것을 크리스토프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파리에 간 베토벤은 귀머거리는 되지 않았지만 완전히 프랑스식으로 개인의 자유와 예술에 대해서 고민하고 그것을 음악으로 승화시키려한다. 빈으로 간 베토벤도 비슷한 사상적 고뇌를 격고 그 결과로 합창이라는 인류 최고의 교향곡을 만들어냈지만 아무래도 빈으로 간 베토벤은 실재했던 인물인 만큼 음악적으로 평가를 받는 것이 보통이다. 롤랑에 의해 창작된 파리에 간 베토벤은 아무래도 소설이라는 형식의 문제 때문에 성장하고 늙어가는 과정과 그 와중에 크리스토프에게 영향을 주었던 그의 사상에 무게가 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것이 또 어쩔 수 없이 프랑스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