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류] 채만식
초봉이의 불행은 참으로 눈뜨고 못봐줄 정도의 것이다. 죄와벌의 소냐와 라스콜리니코프의 불행을 모두 짊어진 캐릭터인 것이다. 채만식은 초봉이를 매개로하여 원치않는 전쟁에 휩쓸리고 열강들에게 수탈당한 불행한 식민지조선의 역사를 투영시켰다. 미두에 빠져서 재산과 체면을 잃어버린 정주사를 통하여 전통적 지배계층의 무력함을 꼬집고 쾌락에 빠져 스스로 인생을 포기하다 못해 그 짐을 살아있는 사람에게 지우는 무책임한 고태수를 통하여 소위 신식 인텔리의 내용없음을 비판한다.
이 암울한 소설의 희망이라면 게봉이와 승재일 것이나 그들도 초봉이의 자수 이후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르는 송히를 떠안게 되는 것이다. 조선의 식민지 상황은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이지만 이미 더럽혀진 조선의 양심과, 흉터로 오래도록 남을 상처는 독립을 한 후에도 오래도록 한반도에 영향을 미칠 것을 채만식은 내다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매독에 걸린 고태수의 자식이든, 악독한 장형보의 자식이든, 무책임한 박제호의 자식이든 송히는 초봉이의 딸이고 게봉이와 승재에게 맡겨진 초봉이의 미래인 것이다. 식민지조선의 기승전결이 어떠한 것이었던 그것은 한민족의 운명이었고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그 역사를 그대로 안고 가야하는 것이다.
초봉이의 결혼으로 매일 목구멍에 풀칠을 할 걱정을 했던 정주사집은 딸을 짓밟은 자들의 돈으로 조그만 가게를 하나 내게 된다. 정주사 내외는 딸의 비극을 담보로 마련된 약간의 여유에 안주하고 딸의 불행을 애써 무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초봉이가 승재와 결혼을 했다면 그때 당장은 어려웠을지 몰라도 초봉이의 행복과 더불어 향후의 가계의 안정도 보장됐을 것이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구한말 조선이 닥친 상황과 그 상황을 타개할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당시 지배층엔 없었다는것은 무척 안타까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