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죽음] H.M.엔첸스베르거
‘공중그네’로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끌었던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남쪽으로 튀어’를 보면 현대를 살아가는 무정부주의자의 모습이 약간 유머러스한 모습으로 나온다. 60년대 일본 학생 운동권의 전설적 인물이었던 우에하라는 국민연금과 세금납부를 거부하고 구청직원에게 “차라리 국민을 그만두겠다”라고 배짱을 부린다. 결국 우에하라 부부는 아무도 찾지 않고 그들을 귀찮게 하지 않을 무인도로 떠남으로써 그들은 무정부주의자 같기도, 로빈슨 크루소 같기도 하게 되고 만다.
국가주의가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치게 된 지금은 무정부주의자로 산다는 것이 희극적인 것이 되어 버릴 정도로 국가의 권력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이 되어버렸다. 어떤 개인이 자신의 아나키즘에 소극적으로나마 충실하기 위해서는 우에하라 부부처럼 세상을 등지는 은자가 되는 방법 외에는 별달리 뾰족한 수도 잘 생각나지 않는다.
아나키즘은 우에하라 부부가 은둔하기 위해 떠나는 전설의 섬, 파이파티로마라는 이름만큼 몽환적으로 느껴진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고 그렇다고 미래에도 실현 될 것 같지 않은 형이상학적인 단어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과거로 눈을 돌리면 아나키즘은 선연히 살아있는 노스탤지어이다. 1920-30년대를 뜨겁게 살았던 많은 혁명가들의 피 냄새가 거기에 스며들어있다. 이 책은 그 중에서도 스페인내전의 노동자와 무정부주의자의 군대를 진두지휘했던, 무정부주의의 역사, 그 자체였던 한 사나이에 대한 이야기이다.
러시아에서의 볼셰비키의 혁명이후 세계에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물결이 일렁였다. 자본가들은 공산주의사상의 전파를 막아보려했지만 공산주의의 이상에 매료된 젊은이와 지식인들은 늘어만 가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이후 권력을 잡게 된 볼셰비키는 자신들 스스로가 정적을 제거하고 관료화되는 변절을 하고만다.
범세계적인 무정부주의운동은 이러한 국제적인 분위기속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어떠한 권력도 인정하지 않고 노동자, 농민만의 공동체적 세상을 만들려는 시도였다. 무정부주의 운동은 1930년대 세계의 혁명가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그 불꽃이 가장 뜨겁게 타오른 곳은 바로 스페인이었다.
스페인내전의 불세출의 영웅, 두루티의 행적을 쫓은 많은 증언들을 토대로 이 책은 모자이크 되었다.
1936년 스페인에 좌파정부가 들어서자마자 프랑코가 이끄는 파시스트들에 의한 반란이 일어났고 이것이 바로 스페인 내전이다. 독일, 이탈리아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는 프랑코 반란군은 우세한 화력으로 정부군을 밀어붙였고 팔짱을 낀 영국, 프랑스, 미국 정부는 이 내전을 수수방관 하는 가운데 전 세계에서 모여든 무정부주의자와 소비에트에서 지원해주는 약간의 무기를 가지고 두루티는 직접 전선에 뛰어들어 게릴라전으로 군대를 지휘한다.
아나키즘과 파시즘이라는 너무도 대조적인 두 가지 이념이 맞붙은 전쟁이 바로 스페인내전이며 이 전쟁의 승패의 결과가 향후 세계질서에 막대한 영향을 주게 되리라는 것은 자명했다.
하지만 무정부주의의 이상적인 이념으로 현실정치의 한 형태인 전쟁을 수행하는데는 너무도 어려움이 많았다. 명령의 체계, 전장의 군기는 무정부주의의 이념과는 잘 맞지 않는 것이었고 효과적인 전쟁수행을 위해 두루티는 볼셰비키를 두둔하는 제스처를 취하게 된다. 그의 죽음이 과실로 인한 죽음인지, 그의 변절을 의심한 동료들의 총에 희생된 것인지 많은 의문을 남기게 된 것이 이 같은 스페인내전의 상황이 정부군쪽에 불리하게 돌아감으로써 무정부주의의 미래가 불분명해지고 그 향방을 가늠할 수 없게 되어버린데 있었다.
두루티의 죽음과 프랑코의 승리는 무정부주의의 완전한 패배를 의미했다. 무정부주의는 현실적인 이념으로써는 너무도 짧은 수명을 다하고 말았다. 이후로 국가주의는 더욱 공고해져서 지금의 무정부주의는 더욱 더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되었다. 하지만 속지주의 속인주의에 의해 개인이 국가를 선택하거나 거부할 권리가 너무도 제한되어진 마당에 보다 큰 차원의 인간 본연의 자유와 권리를 생각함에 있어서 무정부주의자들이 가졌던 그 사상은 너무도 매력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현대의 조직화되고 관료화된 시스템속에서 지쳐버린 사람들은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이상을 꿈꾼다. 더 이상 혁명을 믿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을 지배하는 속박과 권력으로 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의지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위대한 근원적 물음이 사람에게 존재한다는 것은 아무리 역경의 세월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인간의 본능영역에 자리 잡고 있는 아나키즘의 씨앗으로부터 발화하여 모든 쇠기둥을 녹아내리게 할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