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광화문덕 Sep 14. 2022

2박 3일 경주 보고서

발에 땀나도록 걸었지만 시간이 부족했지만 후횐없다!

이번엔 당신이
여행 일정을 좀 짜줘

아내가 내게 말했다.


"경주를 한 번 가보는 것은 어떻겠냐"는 나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말이다.


"어....? 어.... 그...래...."


그렇게 이번 경주 2박 3일간의 여행 일정은 수립(?)됐다.


경주여행 2박 3일
여행 안내서

경주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전체적으로 알아둘 게 있다. 바로 지역별 코스 최적화를 위한 동선을 말이다. 참고로 매표소가 있어 입장권을 사서 들어가야 하는 곳에서는 애견동반입장은 불가하니 참고하길 바란다.


내 경우 크게 3곳으로 나누면 좋다고 생각했다.


포석정, 나정➞불국사와 석굴암➞동궁과 월지(구 안압지)

첨성대와 천마총 등이 있는 경주역사유적지구

대릉원지구(천마총, 황남대총, 미추왕릉) ➞ 첨성대 ➞ 국립 경주 박물관(성덕대왕 신종)➞ 월성, 석빙고 ➞ 황룡사 터와 분황사 터(분황사 모전석탑)

감포 등 그 외


일단 2박 3일 일정이라면 실제로 첫째 날은 오후에 도착해서 체크인하는 등의 시간이 소요되는 것을 감안하면, 현실적으로 동선 최적화는 다음과 같다.


첫째 날
오후 도착하면
가장 먼저 나를 반기는 포석정

경주 IC에서 나와서 불국사로 가는 길에 포석정이 나온다. 아래 사진이 전부이지만 입장료를 내야 한다. 애견동반 입장 불가.

-관람시간 : 09:00-18:00(동절기 17:00까지)
-관람료 : 성인 2,000원 /군인 및 청소년 1,000원 / 어린이 500원

포석정에 대해 공부하다 보니 흥미로워 간략하게 정리해본다.

[경주문화관광 공식 홈페이지 내 포석정 설명]

신라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라고 알려진 신라 헌강왕 때에는 바람과 비가 때에 맞게 불고 내려 나라가 풍요로웠다. 또 수도 금성에서는 기와 처마가 줄을 이어 비 맞을 일이 없었다고 전한다. 포석정지도 신라 헌강왕 때 조성된 연회 장소로 전해진다. 신라의 가장 흥했던 시기에 조성되어 신라 쇠퇴까지의 역사가 깃들어 있다.

중국의 명필 왕희지는 친구들과 함께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오는 동안 시를 읊고,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를 마시는 일종의 유희로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였는데, 포석정은 이를 본 따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정자는 없고 유상곡수연을 즐기던 물길 ‘유배거’만이 남아있다.
*반원형으로 둥글게 인공적으로 물길을 파서 위에서 흘러내린 물이 바위를 빙 돌아 아래로 떨어지도록 하였다. 이를 유배거(流杯渠)라 한다. 거(渠)는 도랑이라는 말로 유배거는 술잔이 흐르게 한 도랑이라는 의미이다.

22m의 물길에는 6cm정도의 높낮이 차가 있어 물이 돌도록 했다. 물길의 모양이 마치 전복의 모양과 같아 전복 포(鮑)자를 써서 포석정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포석정은 경주의 유명한 가을 명소이다. 포석정지의 번창했던 초록이 화려한 주홍빛으로 물들었다가 이내 떨어져 겨울을 준비하는 모습이 마치 신라의 흥망성쇠를 보는 듯도 하다.
크기를 다양하게 다듬은 돌 63개가 사용됐고 크기는 길이 10.3 m, 폭 7 m 정도이고, 물길 길이는 약 22m이다. 물길의 폭은 최소 24 cm에서 최대 40 cm로 다양하지만, 평균적으로 30 cm 정도이다. 깊이도 평균적으로 22 cm 정도이며 물길의 입구와 출구의 낙차는 40 cm 정도이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각 위치마다 속도가 천차만별이다.
포석정의 석구는
정말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즐기기 위한 용도였을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삼국사기》를 포함한 여러 기록에서 927년, 경애왕이 후백제의 왕 견훤이 경주를 급습해올 당시에 이곳에서 잔치를 벌이는 중이었다고 전해지며 견훤에게 붙잡혀 자결을 강요당함으로써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을 계기로 그렇지 않아도 국세가 기울어가던 신라의 망국은 사실상 확정되어 버렸다. 경애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경순왕이 이후 고려의 왕 왕건에게 항복하면서 신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여기서 삼국사기를 지은 시대적 상황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고려 인종의 명에 의하여 국가적 지원 하에 1145년, 편찬 책임자 김부식과 그 외 보조 역할을 담당한 참고(參考) 8명 및 행정사무를 전담한 관구(管句) 2명 등 총 11명이 편찬한 관찬 역사서다.

다시 말해,

이름은 《'삼국'사기》이지만 신라가 아닌 고려에서 작성한 것으로, 고려인들의 시각으로 쓰인 역사서라는 얘기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이후부터 고려 초까지에 대한 내용인데, 당연히 고려의 건국 정당성에 대한 고려인의 시각이 과감하게 개입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통일신라의 사실상 최후의 왕인 경애왕이 후백제의 왕 견훤이 수도인 경주까지 침공해왔을 때에도 포석정에 나아가 놀고 있었다는 식의 설명에 거부감이 들었다. 승자의 시각에서 패자의 행위는 뭐든 자신의 승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왜곡되는 것이 역사 속 기록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들과 나의 삶을 기록하는 것에 집착하는 것도 우리 가족의 역사가 왜곡되지 않고 아빠인 내 시각의 이야기가 아들에게 그리고 그 자손에게 왜곡 없이 전달됐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다시 돌아와,

유상곡수연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유상곡수연은 4세기 위진남북조시대의 서예가 왕희지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물이 흐르는 수로의 첫 부분에 술이 담긴 술잔을 띄우면 술잔이 수로를 타고 다른 사람에게 건너가도록 했다는 것. 수로를 기가 막히게 설계하여 술잔이 떠내려가는 중에도 기울어지거나 부딪히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술잔이 떠내려가는 동안 시를 짓고 만약 못 지으면 벌주 3잔을 마시는 식으로 노는 것이 유상곡수연이었단다.


포석정의 경우, 일제강점기 1915년 철거 후 재설치하는 과정에서 없어진 돌은 새로 보충하는 등 임의로 보수되어 수로곡석(水路曲石)의 원형은 잃어버렸다는 얘기도 있다. 다시 언급하겠지만, 일제강점기 철거 후 재설치하는 과정에서 석굴암도 원형을 잃어버렸다는 설명도 나온다. 에잇 나쁜 XX들!!!


포석정에 대한 다른 주장

: 제사공간이었다는 설


제사공간이었는데 놀이공간으로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도 있다. 삼국유사에서 헌강왕은 여기서 춤을 춰서 산신을 만났다고 하고, 특히 경애왕이 여기서 놀다가 잡혀 죽은 부분에서는 정황상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음을 부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적국의 왕이 수도 코앞까지 진격해오는 다급한 상황이었고, 심지어 경애왕 본인조차 이를 알고 고려 태조 왕건에게 구원까지 청하던 판에 포석정에서 놀이를 즐겼다는 기록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는 얘기인데, 나 역시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쩌면, 견훤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하자 본인이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음을 깨닫고 하늘에 제사라도 지냈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고려에서는 '신라는 망할 만했으니 망했다'는 이야기로 멸망을 포장하고 싶었을 수 있다.

역사학자가 아니지만,
포석정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정리해보았다.
불국사와 석굴암

불국사에는 석가탑과 다보탑 그리고 대웅전, 극락전의 황금돼지


무엇이든 아는 만큼 보인다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과거·현재·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淨土), 즉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하여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되었다.

다보탑과 석가탑(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국보 제21호)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29m, 10.75m로 비슷하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基壇)위에 세운 3층 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 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 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으며, 현재 1마리의 돌사자가 남아있다. [출처: 경주문화관광]

'이제 본격적으로 불국사로 들어가서 봐볼까?'하고 호기롭게 들어갔지만... 역시나... 내게 보이는 건 다보탑과 석가탑 그리고 대웅전, 극락전 황금돼지 정도였다... 지식이 야속하구나....

청운교와 백운교를 열심히 쳐다보고 무언가 마음속 깊이 느껴지는 바를 찾아보려 했으나........ 실패....

청운교와 백운교는 불국 정토로 들어가기 위해 건너는 다리로 불국정토를 들어가는 순서는 자하문-청운교-백운교 순이다. 흔히 청운교, 백운교를 좌우로 나눠 생각하기 쉽지만 계단의 윗부분이 청운교 아래 부분이 백운교인 것이다. 두 다리를 거쳐 자하문에 들어서면 대웅전과 석가탑, 다보탑이 나오며 이는 상징적으로 불국정토에 들어섬을 의미한다.

다보탑
석가탑(불국사 3층 석탑)
극락전 황금돼지
극락전 앞에 가면 돼지 동상이 있는데 극락전 글자가 한자로 써있는 편액 뒤에 있는 돼지가 원본이다
불국사에서 도보로 50분
차량 이동 후 15분 거리
석굴암

불국사에서 걸어서 50분 거리라고 한다. 산보를 좋아한다면 모를까 추천하지 않는다. 차로 가도 한참 가는 느낌이랄까.


차량으로 구불구불한 비탈길을 올라가서 석굴암 주차장에 도착한 뒤 거기서 입장권을 끊고 15분가량을 더 들어가야 한다. 그제야 석굴암을 볼 수 있다.


아는 것이 힘이다!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대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 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삼층석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 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 석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4구(軀)씩 팔부신장상을 두고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러운 인왕상, 위엄 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 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특히 주실 안에 모시고 있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의 본존불은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질 듯하다.

석굴암 석굴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더욱 돋보인다.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되었다.

한편, 현재 석굴암은 내부 전면 공개 관람 시 항온항습 등의 문제가 우려되어 1976년부터 유리벽을 통한 외부 관람을 실시하고 있다. [출처: 경주문화관광]

보수 공사 후 다 조립하지 못하고 방치된 석굴암 석재들에 대한 이야기

일제 강점기 시기... 조선 총독 데라우치가 이곳을 시찰한 뒤 석굴암을 보수하기로 결정하면서 유적 복원이 시작됨.

빅토리아 시대에는 '잊혀진' 유적을 발굴해 복원하는 게 국가 위신을 위한 사업으로 크게 유행했기에 당연히 일본도 이 트렌드를 따라 석굴암 복구를 한 것이라고.

1910년 조선통감부는 처음엔 산간벽지에 있는 석굴암을 해체해 경성부로 옮길 계획을 세웠지만 막상 해체를 시작해보니 돌들의 무게가 워낙 무거워서 이전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서 이전을 포기하고, 1913~1915년, 1917년, 1920년~1923년까지 세 차례 전면적 수리를 했다고 함.

일제 강점기 시기에 일본은 조선을 자기들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했기에 석굴암이 어디에 있든 일본 정부의 재산이니 반출할 필요가 없었다고 판단한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1913년 10월부터 뚜껑돌(감개돌)을 고정하기 위한 공사를 시작으로 석굴 천장 부분에 목제 가구(假構)를 설치하였고, 1914년 8월 말 돔형 지붕을 분리하여 완전 해체한 후, 1915년 5월 석굴을 재조립하는 등 1915년 9월까지 석굴을 완전히 해체하고 복원하였다.

그러나 수리 과정에서 불상을 습기로부터 보호하고 석병을 보강하기 위해 콘크리트를 타설 했는데, 이는 나름대로 당대 최신 건축 기법을 이용한 첨단 수리 방법이었지만 문제가 발생함. 콘크리트가 방수에는 탁월해도 방습에는 취약했기 때문이라고.

게다가 시멘트에서 나오는 탄산가스(CO2)와 칼슘(Ca)이 화강암 벽을 손상시킴을 몰랐던 것도 문제였다고 함.

또한 당시 공사를 주도한 것이 석공 전문가가 아니라 철도를 놓던 터널 공사 전문가여서 석굴암에 의도된 설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고, 이들이 방습을 위해 도입한 조치가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는 설명.

특히 석굴암은 지하수 샘물이 솟아나는 암반 위에 있는데, 이것은 냉각 기능을 하는 아주 중요한 설계였다고. 수분은 0.1도 차이만 있어도 차가운 쪽에서 물 분자 이동이 저하돼 결로 현상이 일어나므로, 샘물로 석굴암 바닥을 냉각해 일부러 바닥에 결로를 일으켜 습기를 배출하게 한 것인데 일제의 건축 공들은 이 샘물을 습기의 원인으로 오인해서 아연관을 설치해 배수해버렸다고 함.

그러자 바닥의 온도가 높아져 정교한 조각이 있는 석굴 벽면 표면에 결로가 생기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공사가 끝나자마자 엄청난 결로와 이끼가 출몰했다고 함. 습기에 노출된 시멘트 콘크리트에서 탄산염과 칼슘염이 누출되어 화강암을 부식시키기 시작했다고.

1917년 누수 현상과 습기 등으로 바닥과 천장 위로 물이 스며드는 문제가 나타나자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천장의 방수를 위해 아스팔트를 바르고 석실 지하 아연 배수로의 방향을 바꾸는 보수 공사를 실시했으나, 습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1927년에는 푸른 이끼를 없애기 위해 증기 세척을 했다고 함.

하지만 이후 이끼가 또 생겨 1934년에도 증기 세척을 했는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거친 처리로 본존불을 비롯한 조각들이 많이 마모됐다는 것.

해체 보수를 하기로 했다면, 해체할 때 어느 지점에 있던 몇 번째 석재라는 식의 메모를 해뒀어야 하는데, 일본은 그런 조사기록을 남기지도 않고 주먹구구로 해체공사를 추진했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출처: 나무위키]

에잇 나쁜 XX들!!

보수 공사 후 다 조립하지 못하고 방치된 석굴암 석재들

실내 사진은 경주문화관광 홈페이지에 올라온 사진으로 대신한다.

사진 출처 : 경주문화관광

더 많은 석굴암 내부 사진이 궁금하다면, 작고하신  한석홍 사진작가의 유가족이 기증한 ‘경주 석굴암 석굴’ 사진자료를 보길 권한다. 아래 링크 참조.

저녁 식사 후엔 야경이지!!!
동궁과 월지(구 안압지)

- 옛 신라의 궁궐을 느낄 수 있는 곳, 동궁과 월지(구 안압지)


이름이 참 어렵다는 건 나뿐인 건가?!

궁궐은 신라 때는 수십 개 전각이 늘어서 있었지만 지금은 1, 3, 5호 건물지 3개만 복원한 상태다. 또한 이곳의 심벌은 월지라는 이름의 인공 호수인데, 사실 궁궐의 이미지보다는 과거 통칭이었던 '안압지'라는, 월지 호수와 누각으로서 훨씬 잘 알려져 있다. 이 인공 호수는 신라 왕궁 안쪽의 친수 구역으로 경복궁의 경회루처럼 풍류와 연회 장소로 만든 곳이다.

대중에게 안압지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사실 안압지는 신라 때 명칭이 아니라 조선 초기 동국여지승람과 동경잡기 등에 기록된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미 폐허가 되어 갈대가 무성한 이곳 호수에 기러기와 오리들이 날아들자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1980년에 안압지에서 발굴된 토기 파편 등으로 신라시대에 이 호수를 월지(月池)라고 불렸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월지'란 명칭은 반월성(半月城)(경주 월성)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고, 임해전의 이름도 원래는 월지궁이다.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여 최근 이곳의 정식 명칭도 오랫동안 써 왔던 '안압지' 대신 '동궁과 월지'로 변경되었고 각종 안내문에서도 변경된 명칭을 따랐다. 그러나 워낙 안압지로 알려진 기간이 길어서 아직도 안압지라고 부르고 표기하기도 한다.

다만 신라 시기에도 '임해전'이란 명칭을 일부 쓰기도 한 듯하다. 삼국사기에는 동궁을 임해전(臨海殿)이라고 부른 기록이 있다. '바다와 가까운 건물'이라는 뜻으로 안압지를 상징화했다고 추정한다.[출처: 나무위키]

역사 이야기는 짚고 넘어가야겠지!

문무왕(文武王)이 674년에 궁전 경주 월성의 동쪽에 호수를 만들고, 679년에 같은 위치에 동궁을 별궁으로 짓고 여러 건물의 이름을 새로 지었다.

이 시기는 나당전쟁이 당나라의 도독부 공식 철수와 공격 포기로 사실상 마무리되면서 기나긴 삼국통일전쟁이 마무리되고 평화 시대가 시작되면서 정궁인 경주 월성이 규모가 협소했던 것을 확장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였고, 동궁은 태자가 거처하는 곳이 되었다.

죽어 동해의 용왕이 되었다고 믿어진 문무왕이 만든 곳이라 그런지 용왕에게 제사를 올리는 용왕전(龍王殿)이라는 건물이 있었고 용왕에 대한 제사는 출토된 신심용왕(辛審龍王) 유물로도 증명되었다.

697년과 769년, 881년 등 대신들을 모아 잔치를 벌인 기록이 있으며 804년과 867년에 대대적으로 중수했다. 후삼국시대인 931년에는 고려 태조를 초대해 잔치를 베풀기도 했다.[출처: 나무위키]
2일 차
다 같이 돌자
경주역사유적지구 한 바퀴

경주역사유적지구는 크게 3군데로 나뉜다.

천마총이 있는 대릉원지구

첨성대가 있는 월성지구

분황사와 황룡사 터가 있는 황룡사 지구


나의 추천 동선은 다음과 같다.

대릉원지구(천마총, 황남대총, 미추왕릉) ➞ 첨성대 ➞ 국립 경주 박물관(성덕대왕 신종)➞ 월성, 석빙고 ➞ 황룡사 터와 분황사 터(분황사 모전석탑)

주차는 대릉원지구 공영주차장에 하면 된다.

주차를 마쳤다면, 대릉원으로 쿨하게 들어가면 된다.

신라의 왕, 왕비,
귀족층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고분 밀집지역
대릉원지구

대릉원에는 천마총, 황남대총, 미추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황남대총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찍는 포토존 스팟이 있으니 참고하길 바란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미추 이사금을 대릉(大陵)에 장사 지냈다.'는 글귀에서 따 와 대릉원(大陵苑)이라고 지었다.[출처:나무위키]
릉 사이로 황남대총이 보이고 그 가운데 포토존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잠깐 황남대총에 대해 알아보고 가야겠다.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대릉원에 위치한 대형 무덤이다. 대릉원 내 고분들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다. 남분과 북분을 합치면 120m에 달한다. 단 높이는 가장 높지는 않다. 경주시에서 가장 높은 무덤은 노동동에 있는 봉황대다. 다만 그쪽은 아직까지 발굴된 적이 없어서인지 황남대총에 비해 인지도가 낮다.

황남대총은 남분과 북분 두 무덤을 연결한 쌍릉이다. 피장자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은데, 남분에 묻힌 남성을 보통은 5세기 내물왕, 실성왕, 눌지왕 정도로 추정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그중 황남대총 남분의 연대가 5세기 중엽, 즉 삼국사기 기록상 눌지왕의 사망연도인 458년과 일치해 눌지왕릉설이 다수설로 인정받고 있다.

만약 남분이 눌지왕이라면 여성이 묻힌 북분의 주인은 차로부인이고 실성왕일 경우 북분의 주인은 아류부인, 내물왕일 경우는 북분의 주인이 보반부인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러나 황남대총이 부부의 무덤이 아니라 선후왕의 무덤으로 남분의 피장자는 눌지 마립간, 북분의 피장자는 왕비가 아닌 자비 마립간이라는 주장도 있다.

비슷한 시기에 축조한 신라 고분들처럼 돌무지덧널무덤이다. 대릉원에 있는 고분들의 봉문과 달리 황남대총은 봉분이 표주박(누군가는 엉덩이라고도 한다)모양이라는 특징도 있다. 쌍릉인데 남분이 먼저, 북분이 나중에 축조되었다.[출처:나무위키]
황남대총 남분 발굴 당시를 촬영한 1977년 제작 영상
황남대총

대릉원 지구의 하이라이트!

천마총

대릉원의 고분군 중 유일하게 공개하고 있는 155호 고분 천마총은, 옆에 위치한 황남대총을 발굴하기 위해 시범적으로 발굴한 곳인데, 당시 기술로는 황남대총 같이 거대한 규모의 무덤을 발굴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1973년 발굴 과정에서 부장품 가운데 자작나무 껍질에 하늘을 나는 말이 그려진 말다래(말을 탄 사람의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가죽 같은 것을 말의 안장 양쪽에 늘어뜨려 놓은 기구)가 출토되어 ‘천마총(天馬塚)’이 되었는데, 최근 이 천마가‘말’을 그린 것이 아니라 ‘기린’을 그린 것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천마총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축조된 고분으로 추정되는데 금관, 금 모자, 새날개 모양 관식, 금 허리띠, 금동으로 된 신발 등이 피장자가 착용한 그대로 출토되었다.

특히 천마총 금관은 지금까지 출토된 금관 중 가장 크고 화려한 것이다. 실제 유물들은 경주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니 꼭 한번 들려 보길 권한다.

신라의 대표적인 무덤 형태인 천마총은 목관을 안치하고 그 위에 나무 덧널을 짠 후 주위와 윗부분을 돌로 쌓고, 물이 새어들지 못하게 진흙을 덮어 다지고 다시 그 위에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들어 마무리 한 돌과 덧널을 사용해 만든 ‘돌무지덧널무덤’이다.

발굴 당시 봉분은 마치 화산 분화구처럼 움푹 들어 가 있어서 봉분에 흙을 채워 봉긋하게 복원해 무덤 형태를 알 수 있게 복원한 모습의 내부를 볼 수 있게 유리 전시관 안의 썩은 목관은 그대로 둔 채 덧널만을 복원해 목관 내부를 볼 수 있게 공개하고 있다.

천마도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신라의 대표적인 회화작품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아 국보 제207호로 지정되었다.

긴 혀를 내밀고 꼬리를 추켜세워 마치 하늘을 나는 듯 묘사된 천마가 죽은 사람을 하늘 세계로 실어 나르는 역할을 했음을 짐작케 해주는데 천마도의 동물이 말이 아니라 이마에 뿔이 있는 상상 속의 동물인 기린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천마총 금관은 전형적인 신라 금관의 형태로 앞면에는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이 세 줄이 솟아 있고 뒷면에는 사슴뿔 모양이 두 줄로 그리고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에는 생명력을 상징하듯 돋아나는 싹 모양과 태아 형태의 곡옥 장식들이 달려 있다.

금관 옆으로 금 장신구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새가 날개를 활짝 핀 모양의 화려한 금장식은 신라 사람들이 쓰는 모자에 꽂는 것으로 추측되며, 금 허리띠에는 물고기와 곡옥, 철기를 만들 때 사용하는 숫돌과 집게 모양을 한 많은 장식들이 달려 있다.

각 모양마다 당시 신라에서 중요시되던 상징적 의미가 깃들어 있다고 추측하지만 아직까지 정확한 해석을 하지 못하고 있다.[출처: 경주문화관광]
대릉원지구 아래
신라의 궁궐 터, 월성지구
월성은 신라의 비밀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천년 왕궁이다. 월성은 신라왕들의 주된 생활공간이었다.

 월성〔月城〕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모양이 반달처럼 생긴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월성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등의 역사서에 자주 등장하는데, 파사왕 22년에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 또는 재성〔在城〕이라 불렀다. 이때부터 신라의 궁성 역할을 담당하게 된 월성은 이후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왕궁으로서 제 기능을 수행하였다.

월성에는 여러 개의 문과 연못, 그리고 만파식적을 보관했던 보물창고인 천존고도 있었으나 지금은 옛 모습들을 찾을 수 없다.[출처:경주문화관광]
첨성대로 가는 길 하늘에는 수많은 연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내물왕릉과 고분군

첨성대!!!

한반도 고대 건축물 중 유일하게 후대의 복원이나 재건 없이

창건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된 문화재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 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 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으로 높이는 약 9m이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뒷 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 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자 모양으로 맞물린 기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문학은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관측 결과에 따라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점성술(占星術)이 고대국가에서 중요시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정치와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국가의 큰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는 첨성대 건립의 좋은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출처:경주문화관광]
아들에겐 이번 경주 여행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준 첨성대.

첨성대에 대해서 정리하면 이렇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 여왕이 세운 건축물

첨성대에 관해서는 여러 곳에 기록이 남아 있지만 용도가 명확하게 밝혀진 자료는 없음

첨성대는 월성과 계림 근처 사방이 확 트인 평탄한 곳에 우뚝 서 있음

높이는 9.17m로 우물이나 호리병처럼 생긴 특이한 모습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화강암을 일정한 크기로 잘라 지그재그로 쌓아지었으며, 건물 가운데에는 정사각형의 창문이 있고, 꼭대기에는 우물 정(井) 자 모양으로 긴 화강암이 2단으로 쌓여 있음

창문 아래쪽은 흙이 채워져 있음. 지진이나 자연재해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흙을 쌓은 것으로 추정

일반적으로 첨성대는 별을 관측했던 장소로 알려져 있는데, 창문을 통해 별을 관측한 것이 아니라 가장 높은 꼭대기에서 관측한 것으로 추정. 첨성대 안쪽에는 꼭대기까지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 첨성대가 별을 관측했던 곳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건물의 과학적인 구조를 근거로 제시. 첨성대를 짓는 데 사용된 벽돌의 개수가 362개인데(세는 방법에 따라 365개라는 주장도 있어요) 이 숫자는 1년을 음력으로 사용했던 당시 날짜와 같음

첨성대의 몸통 부분을 27단으로 쌓았는데, 창문의 3단을 빼고 창문 아래쪽까지가 12단, 창문 위쪽이 12단으로, 24절기를 뜻한다고 함

첨성대를 기념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학자는 제례 의식을 올렸던 곳이라고 주장하기도 함

지금까지 밝혀진 사료와 기록에 의해, 별자리를 관측하여 계절과 절기를 알아보고 농사를 짓는 데 필요한 정보를 얻던 천문 관측대라는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음

국립경주박물관

성덕대왕 신종이 있는 곳

월정교

월정교란 이름은 <삼국사기>에 통일신라 경덕왕 19년 “궁궐 남쪽 문천에 월정교, 춘양교 두 다리를 놓았다.”는 기록을 통해 알려졌다.[출처:경주문화관광]
아들과 전동차로 월성지구 한바퀴를 돌며 찾은 월성교

참고로, 유적지마다 스탬프를 찍을 수 있도록 해놓아서 아이들에겐 '경주 역사문화탐방 스탬프 투어'도 하나의 재미요소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불교 국가의 상징을 보여주는 황룡사지구

• 신라 불교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황룡사 터와 분황사 터가 자리한 황룡사 지구

'신라의 땅이 곧 부처가 사는 땅'

황룡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신라인의 불교관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경주 월성의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로 고쳐 짓기 시작하여 17년 만에 완성되었다.

그 후 574년, 인도의 아소카왕이 철 57,000근·금 3만분으로 석가삼존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자, 이것을 재료로 삼존불상을 만들게 되었는데, 5m가 넘는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진평왕 6년(584)에 금당을 짓게 되었다.

선덕여왕 12년(643)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바람의 9층 목탑을 짓게 되는데, 각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하였으며,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645년에 완공되었다.

이와 같이 황룡사는 93년간에 걸친 국가사업으로 조성된 큰 절이었으며, 신라의 3가지 보물 중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제외한 2가지 보물이 황룡사 9층 목탑과 장육존상이었다는 것에서도 황룡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신라의 땅이 곧 부처가 사는 땅'이라는 신라인들의 불교관이 잘 나타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황룡사는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없어져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늪지를 메워서 그 위에 지은 황룡사는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1탑식 배치였다.

그러나 장육존상과 목탑 등이 조성된 후 금당 좌우에 작은 금당이 배치되는 1탑 3금당식으로 바뀌고, 탑의 좌우에 종루와 경루(經樓)가 대칭을 이루어 배치되었다. 또 사방은 복도와 같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독특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종루에는 거대한 종이 있었는데, 몽고가 침입했을 때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1976년부터 시작한 발굴조사에서 금동불입상·풍탁·금동귀걸이·각종 유리 등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높이 182㎝에 이르는 대형치미(고대의 목조건축에서 용마루의 양 끝에 높게 부착하던 대형의 장식 기와)는 건물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금당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다고 전하며, 목탑지에서 발견된 당나라 백자 항아리는 당시의 문물교류를 잘 알 수 있게 한다.[출처:경주문화관광]
엄청난 규모의 터였다

- 황룡사 구층 목탑

황룡사구층목탑은 선덕여왕 12년(643)에 착수하여 645년에 완성되었고, 그 높이는 상륜부 42척(약 15m), 탑신부 183척(약 65m), 전체 225척(약 80m)의 대탑이었다.

창건 후 탑의 중수 내용을 살펴보면, 성덕왕 17년(718)에 낙뢰가 있어 720년에 중수하였으며, 경문왕 8년(868)에 탑이 진동하여 수리하였다.

경문왕 12년에는 탑을 헐고 다시 세웠는데, 이 내용은 경문왕 때 만들어 넣은 사리 외함의 찰주본기에 “신라 문성대왕 때 이르러 이 대탑이 동북으로 기울어지므로 염려하여 재목을 모은 지 30여 년이 지나도 고치지 못하였는데, 경문왕 11년에 이르러 옛 것을 헐고 새롭게 만들도록 하였다.

철반 위에 무구정경(無垢淨經)에 따라 소석탑 99기를 안치하였으며, 그 소탑마다 사리 1과와 다라니 4종을 넣고 다시 경전과 사리 1구를 함께 봉안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경애왕 4년(927) 탑이 북쪽으로 기울어졌고, 고려 광종 5년(954)에 재앙을 입어 현종 3년(1012)에 경주의 조유궁(朝遊宮)을 헐어 그 재료로 탑을 수리하였으며, 현종 13년에 네 번째로 중수하였고, 정종 2년(1036)에 낙뢰로 파손된 것을 문종 18년(1064)에 다섯 번째로 중수하였다.

이후 낙뢰로 파손된 것을 여섯 번째로 중수하였으나, 고종 25년(1238) 몽고병의 침입으로 황룡사 가람 전체가 불타 버렸을 때 함께 소실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황룡사구층목탑(皇龍寺九層木塔))]

- 분황사 터 & 모전석탑

황룡사 옆에는 또 다른 절 분황사 터가 있다. 

분황사 당간지주가 우뚝 자리하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당간지주란,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을 말한다.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이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걸게 되는데, 이 깃발을 꽂는 기다란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을 양 쪽에서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분황사 당간지주는 양 기둥에 별다른 조각을 두지 않은 간결한 모습이다. 기둥 사이에 놓인 당간의 받침돌이 특이하게도 거북 모양이다. 기둥 안쪽면의 아래·중간·윗부분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을 뚫어 놓았다.


양 기둥 사이에 거북받침돌이 있는 특이한 양식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분황사 모전석탑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탑은 널찍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 모양으로 잘라 쌓아 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문을 만들고, 그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仁王像)을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아래 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 장식이 놓여 있다.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 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출처:경주문화관광]

이렇게 우리의 이틀 간의 여정은 마무리됐다.

쉼 없이 돌아다닌
이틀 간의 경주 여행

첫째 날 오후 2시쯤 경주에 도착해 일정을 소화하다 보니 쉴 겨를이 없을 정도였다.


원래는 3일 차에는 감포로 이동해 볼 예정이었지만, 마지막 날에는 쉼을 갖기로 했다. 아들과 전동차를 타고 월성지구를 한 바퀴 돌기도 하고, 황리단길 구경도 다니고 하면서 말이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가 찾은 카페는 두 곳이었다. 스타벅스 경주대릉원점과 어마무시 티라미수 하우스였다.


어마무시 티라미수 하우스

여기가 좋았던 이유는 아이와 함께 온 손님은(YES 키즈존), 연인들은 (NO 키즈존), 애견동반가족은 테라스나 우측에 보이는 폐쇄형 공간에서 카페의 먹을거리를 즐길 수 있도록 해놨다.


주차장도 넓게 잘 꾸며져 있었고, 무엇보다 쉼이 좋았다.

더 많은
여행 정보를 원하신다면

아래는 경주 여행을 위해 사전 조사한 내용들이다. 혹여라도 추가적인 정보가 필요한 분이 있을까 하여 정리한 것을 덧붙여놓는다. 사실 확인이 된 부분이 아니라 사전조사 차원으로 정리한 것이니 참고만 해주시길 당부드린다.


@나정

- 오릉(五陵) 남동쪽 소나무 숲 속 시조유허비(始祖遺墟碑) 옆에 있으며 보호면적은 7,328㎡

- 이곳에는 박혁거세를 기리는 유허비를 비롯하여 신궁터로 추정되는 팔각건물지, 우물지, 담장지, 부속건물지, 배수로 등이 잘 남아 있음

- 특히 팔각건물지는 한 변의 길이가 8m나 되고 네모난 담장을 두른 것으로 보아 신라의 신궁터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곳 나정에 박혁거세를 제사 지내는 신전이 아닌가 짐작할 수 있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나정에 대해

“전한 지절원년 임자(前漢地節元年壬子:BC 69) 3월 1일, 신라 건국의 주역인 6촌(村)의 촌장들이 모여, 군주를 선출하고 도읍을 정하자고 결정한 뒤 일행이 높은 곳에 올랐다. 그런데 양산(陽山) 아래 나정이라는 우물 근처에 이상한 기운이 돌며 백마 1마리가 무릎을 꿇고 있어, 가보니 백마는 하늘로 올라갔고 붉은색의 커다란 알만 남았는데, 이 알을 쪼개자 어린 사내아이가 나왔다. 이상히 여겨 동천(東川)에서 목욕시키자 몸에서 광채가 났고 새 ·짐승들이 춤추듯 노니니, 천지가 진동하며 해 ·달이 청명해졌다. 사람들은 이 아이가 세상을 밝게 한다 하여 혁거세라 이름하고, 알이 박같이 생겼다 하여 성을 박(朴)이라 하였다.”

: 1975년 11월 20일 사적 제245호로 지정됨


@새벽 일출 구경

- 경주 문무대왕릉(신라 문무왕 수중릉)

 : 일출 감상용 및 새우깡 준비해 가면 멋진 사진 가능


@ 감포항

- 감포해국길

-  나정고운모래해변

-  전촌항용굴 : 동굴/전경


@골국사

 - 매일 3시 공연, 밧줄 타고 올라가야 하는 곳 있음

 - 공연 보고 소림사 같은 분들과 같이 사진 찍을 수 있다고 함

(사실 이건 가능할지 모르겠음... 욕심은 내고 싶긴 한데..)


@경주역사유적 남산지구

- 경주 남산은 동서 4km, 남북 10km에 달하는 타원형 모양의 산으로, 커다란 야외 박물관이라고 불리고 있음

- 신라에 불교가 전래되기 전부터 사람들은 남산을 성스럽게 여겼음

- 불교가 전래되자 남산을 불교 성지인 수미산으로 여기며 많은 절과 불상, 불탑을 세우기 시작했고, 그 결과 오늘날과 같은 거대한 야외 박물관이 만들어짐

- 경주시의 자료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지금까지 남산에서 발견된 왕릉은 13기, 절터는 150여 곳, 불상이 120여 점에 석탑은 96개, 석등도 22기나 되고 그밖에도 각종 유적지와 유물이 수없이 많음


ㅇ 남산은 크게 동남산과 서남산으로 나눔


- 빼어난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는 동남산

남산 동쪽 지역은 서쪽에 비해 유적지도 적고 분포된 유물도 적지만, 서남산 지역에 있는 유물보다 세련되고 보존 상태가 뛰어난 문화재가 더 많음


동남산에 남아 있는 주요 유물은 석탑과 불상으로, 작품성과 문화재의 가치가 높은 것으로는 보리사에 모셔진 미륵곡 석불좌상(석조여래좌상), 칠불암 마애석불,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 보리사라는 아담한 절의 왼쪽 언덕에서 세련된 자태로 토함산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미륵곡석불좌상

• 보존 상태가 무척 좋은 불상

• 지그시 눈을 감고 명상에 빠져 있는 듯한 표정을 하고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의 불상으로 신라 불상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작품으로 평가


= 남산에는 많은 유적지와 유물이 있지만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유물은 칠불암 마애석불 하나뿐

• 칠불암 암자 옆 커다란 2개의 바위에 모두 7기의 불상이 새겨져 있음


= 병풍바위라는 곳에 새겨진 3기의 불상은 1~2.7m 크기로 삼존불이라고 하고, 바로 옆 사각형 바위에는 동서남북으로 4기의 사방불이 새겨져 있음


= 칠불암 위쪽에는 남산에서 가장 신비로운 불상인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이 토함산을 바라보고 있음

• 낭떠러지 위의 바위를 깎아 만든 이 불상은 머리에 삼면 보관을 쓰고 있음. 조각이 세련되고 섬세한 것은 물론, 이른 아침과 안개가 많은 날이면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신비한 불상


- 서남산은 발길을 옮기는 곳마다 개성이 강한 유적지와 유물을 만날 수 있는 곳


= 삼릉 계곡의 입구 부분에는 세 명의 왕이 잠들어 있는 능과 초기 불교 미술을 잘 보여 주는 배리석불입상

• 이름도 특이한 배리석불입상은 가운데에 부처님이 있고 양쪽에 보살상이 서 있음. 세련미가 없고 둔탁한 모양새로 보아 신라 초기 불상으로 추정. 신라 초기 불교 미술의 수준을 가늠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물


= 삼릉 계곡과 나란히 이어진 산길을 따라 이동하면 목과 손이 잘린 불상을 비롯하여 마애관음보살입상, 석불좌상, 선각육존불 등과 만나게 됨


= 이 불상들과 눈인사를 마치고 정상을 향해 걷다 보면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삼릉 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을 만날 수 있음

• 마애석가여래좌상은 높이가 6m로 남산에 있는 불상 중 가장 큼. 자연 바위에 새겨진 거대한 불상으로 통일 신라 후기 때 완성한 작품

• 선으로 새겨진 몸은 약간 뒤로 젖힌 모습이고, 얼굴은 입체로 새겨 놓았음. 가느다란 눈으로 가파른 계단을 올라온 사람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지요. 지금도 불심 깊은 사람들이 찾아와 가슴속에 품고 있는 이야기를 마애석가여래좌상에게 전하고 있다고 함


= 마애석가여래좌상에서 능선을 따라 동남쪽으로 이동하면 균형이 잘 잡힌 모습의 삼층 석탑인 '용장사곡 삼층 석탑'

• 옛 신라 장인의 멋과 지혜가 동시에 느껴지는 탑으로 낭떠러지 끝에 세워진 탑인데도 불구하고 안정감이 느껴져 자연과의 조화를 소중하게 생각했던 우리 조상들의 정신이 잘 드러나 있음

• 건너편 산과 절벽을 배경으로 서 있는 자태는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고 함


= 아래쪽에는 마애여래좌상과 아주 특이한 모양의 용장사곡 석불좌상

• 3층짜리 대좌 위에 세워진 1m 길이의 불상은 안타깝게도 머리 부분이 없음. 하지만 신라는 물론이고 백제와 고구려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양을 간직하고 있음


@점심 겸 저녁 식사 리스트

- 낙지마실

: 전국 5대 낙지집, 낙지+곱창+새우 조합 추천

- 기와메밀막국수

: (물 또는 비빔)막국수 & 수육

- 소바카게

: 마제소바 판매점, 일식당

- 빽가네 뒷고기(화요일 휴무)

: 생삼겹, 생돼지고기집 경주 성동시장

- 성동시장 우엉김밥, 잔치국수, 떡볶이

- 토박이할매해장국 묵해장국

- 다인 매운 등갈비찜

- 고향밀면 본점

: 밀면, 찐만두

- 보문뜰(한우가 먹고 싶다면, 보문단지 가기 전)

: 한우불고기, 수제 떡갈비, 물회, 비빔밥, 갈비탕


@카페 및 주전부리 리스트

- 황리단길 노워즈 카페 플랫화이트 & 엑설런트 라떼아이스크림 유명


- 이재원 과자공방

: 수제 케이크


- 황리단길 황금십원빵

: 1966년은 10원 발행 첫 해, 빵안에 치즈, 3천원, 오전 10시부터 ~ 평일(9시), 주말(10시)


- 첨성대 초콜렛


- 대화만두

: 비빔만두, 튀김만두, 고기만두 등 김치만두, 찐만두 등 각종 만두


@점심 및 저녁 식사 리스트

- 서민식당(보문관광단지와 불국사 사이 위치, 11~9)

: 떡갈비, 간장새우밥, 메밀 냉면, 계란찜, 된장찌개, 삼겹살도 판다는 후기도 있음


- 자연애곤드레(보문관광단지와 불국사 사이 위치, 10~9)

: 생선구이, 고등어구이, 곤드레돌솥밥, 제육볶음, 곤드레고등어조림 등


- 카페엘가든(하동저수지 인근, 10:30~21:30, 화요일 휴무)

: 크로플, 생망고빙수, 피자, 샐러드 등 브런치 식당


- 원조떡갈비(하동저수지 인근, 9:30~20::30)

: 한우떡갈비, 치즈한우떡갈비 등


- 늘봄(하동저수지 인근, 9~21)

: 쌈밥집


- 부산식당(불국사 초입에 있음 오전7시반 오픈)

: 차동박이 된장찌개정식+떡갈비, 돈가스, 순두부, 산채비빔밥 등, 아침식사로 괜찮을 듯


- 두부마을(불국사 초입 오전 8시 반오픈)

: 순두부찌개, 청국장, 보쌈 정식, 해물파전, 두부 스테이크 등


- 유수정불고기쌈밥(불국사 초입,월화목 10~14, 금토일 10~20:30 수요일 정기휴무)

: 불고기쌈밥, 해물파전, 도토리묵 등


@화랑의 언덕

  - 명상 바위(이효리 캠핑클럽에서 요가 명상한 곳으로 유명), 양 떼 친구들, 돼지들 등

  : 탁 트인 뷰, 입장료 2천원


@ 보문관광단지

- 보문호수 : 유람선 일반인 4천원/어린이 2.5천원

: 야경이 멋져부러, 멋진 뷰

- 보문 콜로세움


<<숙소 보문관광단지 인근 또는 하정저수지 인근>>

@ 켄싱턴리조트

- 애슐리 퀸즈가 있음

- 프랑제리베이커리 사과빵 유명(?)


@주상절리 전망대

- 저녁 야경


<근처 식당>

- 나정에 가면

 : 홍게라면, 차돌박이라면

- 황포식당(김영철의 동네한바퀴에 나옴, 9~8)

: 회정식, 가자미찌개, 갈치찌개, 도루묵찌개, 참가자미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