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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을 이겨낸 자만이 다시 앉는다

[영화 '승부' 리뷰] 바둑판 앞에 다시 선다는 것

by 광화문덕

오늘도 아들과 노원 롯데백화점 10층, 롯데시네마를 찾았다. 아들과 내게 이곳은 이제 너무도 친숙한 곳이다.


아들과 난 영화관에 오면 항상 주문하는 조합이 있다. 바로 '어니언+치토스' 팝콘이다. 그리고 우리 둘은 콜라를 하나씩 들고 영화관으로 들어선다.



아들이 벌써 초등학교 6학년이 됐다. 요즘은 주말에도 책상 앞에 앉아 과제를 하느라 바쁘다. 예전처럼 마음껏 뛰놀던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걸 느낀다. 그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다.


아이도 이제 ‘시간’과 싸우기 시작한 걸까. 그렇다 보니 스트레스 관리도 신경 써야 하는 나이가 된 듯하다.


그런 아들을 보며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주중에 다 못한 일들이 주말까지 이어질 때, 어느새 내 삶은 피로에 잠기고, 나는 점점 지워져 간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아들은 지금 그 입구에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젯밤, 아들이 조용히 말했다.


“아빠, 내일 ‘승부’ 보러 갈까?”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래, 가자.”


지금 아들에게 필요한 건, ‘할 일 먼저 해’가 아니라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쉼이 필요해 보여서다.


그 덕에 이렇게 아들과 난 오늘도 노원 롯데시네마 맨 뒷좌석 정가운데 앉아있다.


《승부》는 바둑이라는 세계를 배경으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따라간다.
이병헌과 유아인이 각각 조훈현 9단과 이창호 9단을 모티브로 한 인물을 연기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지 바둑 대국의 묘미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영화가 시작되고 배우들의 연기에 몰입하고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이병헌과 유아인, 조훈현과 이창호, 이 두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영화 '승부' 속 진짜 승부는 바둑판 위가 아니라, 마음속에 있었다.


답은 네 스스로 찾아라.
답이 없지만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게
바로 바둑이다.


영화 속 대사는 삶을 곧게 찌른다.


'시련 앞에 섰을 때 어떤 선택을 하는가'가 중요하다.


누구에게나 도망치고 싶은 순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수 있다.

나 역시도 늘 그런 마음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영화 속 이병헌은 다시 바둑판 앞에 앉았다.

처음부터 찬찬히, 그리고 더 겸손하게, 더 낮은 자세로, 용기 있게.

그 장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무엇을 이겼기 때문이 아니라, 그는 이겨내고 견뎌내고 극복했다.


그가 지금도 바둑 세계 안에 있는 이유는, 결코 ‘이겨서’만은 아닐 것이다. 견뎌냈기 때문이다.


상실과 고독, 패배와 좌절을 이겨낸 사람만이 다시 바둑판 앞에 앉을 수 있다.


아들 고마워
덕분에 오늘도 좋은 영화 봤어


영화를 보고 나오며 아들에게 말했다. 아들에게 차마 "집에 가서 이제 서로 할 일 하자"란 말은 덧붙이지 못했다. 그 말이 아이에게 또 다른 무게가 될까, 조심스러웠다. 아이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걸.


그러니 오늘만큼은, 그냥 쉼으로 남아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아들에게 아들의 제안 덕택에 내 마음이 위로받았음을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아들 덕분에 영화 '승부'는 내게도 큰 위로가 됐다.


아들과 난 각자의 자리에서 '승부'중이다


나는 발령받은 지 3개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새로운 부서에서 고군분투 중이다.


전혀 새로운 업무에 적응해야 하는 날들 속에서 스스로의 무능함에 속상한 날들도 많지만 그럼에도 잘 이겨내 보려고 견뎌내 보려고 살아남아야 한다고 매일 나를 다독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들도 6학년이란 새로운 학년이 되어 적응 중일 것이다. 그 마음도 나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 짐작된다.


적응 중인 나, 주말에도 바쁜 아이.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승부’ 중이었다.


아들과 내게 오늘 영화 '승부'를 보는 시간만큼은

서로의 바쁜 시간 틈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었던 작은 멈춤이 있는 소중한 위로의 시간이었다.



영화관을 나서자
눈이 오고 있었다.


하얀 눈발 속에서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


버스를 기다리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 그 모든 승부 앞에서 부디 상처받지 않길... 무너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단단한 마음을 지켜가길... 세상과 맞서 싸우기보단 지혜롭게 걸어가길... 건강하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잘 자라나길...'


내가 아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응원해 주고 격려해 주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아들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험난한 삶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이 아이가 힘들 때 내가 옆에서 동행해주고 싶은 마음뿐이다.


“이기는 것보다 중요한 건, 다시 앉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 마음속에 피어오른 한 문장이다. 이 말은 나를 위한 말이면서도 아들에게 내가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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