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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졌던 킥보드, 무너진 건 마음이었다

지금은 몰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게 인생이다

by 광화문덕

오후 햇살이 유난히 길게 기울던 날이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한 회색 구름이

하늘에 드리워져 있었고,

바람은 이상하게 따뜻하고도

불안정한 냄새를 실어 나르고 있었다.


낮게 내려앉은 하늘 아래,

나는 아들과 함께 작은 무인 편의점에 들렀다.

잠깐이면 될 일이었다.

그래서 아들은 킥보드를 가게 앞에 기대어 놓았다.


“아빠, 이거 초코바 어때?”


“그래, 하나만.”


무인 편의점 앞에 서 있다,

아들의 부름에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단 몇 분.

그 짧은 틈 사이에 세상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킥보드... 없어졌어.”

아들이 멍하니 가게 문을 나서며 중얼거렸다.

처음엔 설마했다. 곧바로 밖으로 나왔다.


정말, 없었다.


바로 문 앞에 있어야 할 은빛 마이크로 킥보드.

아들의 손떼가 묻은 손잡이와 닳은 바퀴.

아들과 내가 함께 보낸 시간의 자취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던 그 물건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빠... 누가 훔쳐간 거야?”

“응...그런 것 같네...”


아들의 눈빛이 일그러졌다.

화와 슬픔,

그리고 이해할 수 없다는 당혹이 뒤섞인 눈동자였다.


나는 그냥 넘기려 했다.

‘재수 없었네’ 하고 웃고 말고 싶었다.

그깟 킥보드 하나, 다시 사면 되는 일이니까.


하지만 아들은 달랐다.

주위를 한참 살피던 아이는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아빠 여기 CCTV 찍고 있어.

경찰서에 도둑 신고하러 가자.

범인을 잡아야 해!”


나는 멈춰 섰다.

그 말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부도덕한 이들에 대한 저항하는 감정이

처음으로 그 작은 몸을 빌려

세상에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나는 아들의 말에 따라,

공공 CCTV 안내문에 적힌

경찰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목소리는 냉정하고 공허했다.
“없는 번호입니다.”

순간, 참으로 이율배반적인 세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도움을 주겠다던 안내문 아래엔, 허공만 메아리쳤다.


'경찰서 번호가 가짜라니...'


우리는 인근 지구대로 향했다.

무언가라도 해보자는 심정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인근 신호등 사거리 모퉁이.


킥보드가, 그 자리에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들은 킥보드를 보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 눈빛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냥 타고 가다 버렸나 봐...”


나는 킥보드를 조용히 들어 올렸다.

무게는 가볍지만,

손끝으로 느껴지는 쓴 감정은 무거웠다.


그 아이들,

분명 우리가 편의점 안에 있을 때 함께 있었던

세 명의 소년들 중 하나였겠지.


그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떠올랐다.
그 시간은 고작 5분 남짓.
아이들은 몰랐을 것이다.
서울엔 촘촘히 깔린 CCTV가 있고,
그 시간에 그 장소에 있었던

소년 셋을 특정하는 건 시간문제라는 것을.


“아빠, 신고하러 경찰서 가자”

아들이 말했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하늘 사이로 금실처럼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 빛이 아이의 뺨에 내려앉았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들아,

세상엔 인성이 바른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몰라.

그래서 우리가 상처받는 일도 많을 거야.

하지만 그런 세상을 탓하느라

우리 마음까지 어두워지면,

결국 우리도 그들과 다를 바 없어질 거야.”


아들은 묵묵히 내 얼굴을 바라봤다.


“경찰 아저씨들도 정말 나쁜 놈들,

큰 도둑들 잡느라 바쁘실 거야.

우리 물건은 찾았으니 오늘은 이쯤 하고,

집에 가서 맛있는 저녁 먹자.

다음부턴 더 조심하고 말이야.”


아들은 여전히 분해 보였다.

나는 아들과 나란히 걸으며 말했다.


“아들, 킥보드를 훔친 아이를 불쌍하게 생각하자.

그 친구는 킥보드를 훔친 게 아니라

자신의 양심의 경계선을 무너뜨린 거거든.

그 경계가 무너지면,

그 다음부턴 아무 것도 그 아이를 멈추지 못해.

왜냐하면, 이 세상엔 그 친구를 제어해줄 사람보다,

방관할 사람이 훨씬 많거든.

‘들키지 않으면 괜찮다’는 착각은

자유가 아니라,

그 아이를 조용히 파멸로 이끄는 문이야.

지금은 몰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그게 인생이란다.”


나는 말을 멈췄다.

그리고 마치 내 자신에게 말하듯 조용히 덧붙였다.


‘아들아,
너는 아직 어려서 모를 수도 있지만,
나는 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작은 도둑질이라고 가볍게 넘기는 마음이
결국 그 사람의 인생을 무너뜨릴 첫 균열이 되는 걸.
나는 너무 많이 봤거든.’


아들은 다시 킥보드에 올라탔다.

바퀴는 바닥을 긁으며 묘한 소리를 냈다.

어딘가 거칠고, 어딘가 쓸쓸한 울림이었다.


나는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따뜻하면서도 싸늘한 바람이 다시 우리 곁을 스쳤다.


아직 세상의 진실을 다 알지 못하는 아이지만,
오늘의 작은 상처가

언젠가는 누군가를 이해하게 만드는 눈이 되길 바랐다.


오늘을 잊지 않기를.
하지만 오늘에 머무르지도 않기를.

그리고 언젠가,
그도 누군가에게 말해줄 수 있기를.


세상은 완벽하지 않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더 따뜻해야 한다고.


“아들, 명심하렴.

부끄러움이 사라지면,

그다음엔 아무것도 자신을 멈추지 못하게 된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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