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브랜드의 끝은 노브랜드(No brand) 아닐까

진짜 브랜드는 옷이나 가방이 아니라, 그 안에 서 있는 사람이니까

by 광화문덕

아침 공기가 분명 달라졌다.


차갑기는 한데, 어딘가 끝이 무뎌진 냉기였다. 겨울이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지만, 더는 날을 세우지 않는 바람.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골목길, 가로수 끝에 맺힌 작은 물기가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햇살은 아직 낮은 각도에서 서서히 번지고, 사람들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졌다.


코트 자락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머플러를 목에 한 번 더 감으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진짜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네.”


어제 나는 방을 뒤집었다. 책상 위를 가득 채우던 종이 더미와 넓부려져 있는 메모장들, 충전기와 케이블이 뒤엉킨 전선들, 어디에 쓰는지도 모를 작은 박스들. 평소에는 “나중에 정리하지 뭐” 하고 미뤄두던 것들이, 막상 하나씩 꺼내 놓으니 내 삶의 축소판처럼 느껴졌다.


정리되지 않은 것들.
결정하지 않은 것들.
붙잡고 있지만 사실은 필요 없는 것들.


가구를 밀어내고 책상을 옮겼다. 모니터와 컴퓨터를 분리하고, 한동안 외면해왔던 본체를 꺼내 먼지를 털어냈다. 잘 작동하던 컴퓨터가 갑자기 전원이 들어오지 않아 본체를 분해했다. 나사를 풀고, 덮개를 열고, 안에 얽힌 선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 속은 마치 내 마음 같았다.

엉켜 있고, 쌓여 있고,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는 상태.


쓰레기봉투에 옷을 담으며 문득 생각했다. 이 옷들은 단순한 천 조각이 아니었다. 잘 나가던 시절의 기억, 괜히 버리지 못했던 기대, 다시 입을지도 모른다는 미련이 뒤엉켜 있었다.


청소기를 들고 방과 거실을 들락날락했다. 먼지를 빨아들이는 소리가 거칠게 울렸다. 한숨과 뒤섞인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올라왔다.


‘이걸 왜 지금 시작했지.... 그냥 두고 살걸... 괜한 걸 시작해서 사서 고생하고 있구나...’


손끝이 시큰거렸고 허리는 뻐근했다. 끊엄는 푸념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올라와 결국 한 문장을 토하듯 내뱉었다.


“내가 왜 이걸 시작했지…”


바닥에 털썩 앉아 잠시 천장을 올려다봤다. 햇빛 사이로 먼지가 떠다녔다. 그 장면이 마치 오래된 기억처럼 느껴졌다.


‘그냥 이대로 살아도 되지 않았을까. 굳이 구조를 바꾸지 않아도, 굳이 이렇게 힘들게 정리하지 않아도…’


그런데 이상하게도 멈추고 싶지 않았다.


항상 “나중에 해야지” 하고 미뤘던 곳. 계절이 바뀔 때마다 먼지 알러지를 선물처럼 안겨주던 그 공간. 새벽마다 기침을 하며 후회했던 바로 그 자리.


결국 나는 끝까지 했다.


책상을 새로 배치하고, 모니터를 눈높이에 맞췄다. 엉켜 있던 선들을 정리하고, 불필요한 물건을 과감히 비워냈다. 드레스룸처럼 쓰던 작은 공간도 털어내고 정리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공간이 내 마음의 표정을 바꾸고 있다는 것을.
마음의 표정이 하루의 다짐을 바꾸고 있다는 것을.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그 차이를 분명히 느꼈다. 같은 방인데, 시야가 달랐다. 같은 창문인데, 빛이 들어오는 방향이 달랐다. 책상이 단정하게 서 있고, 어지럽던 선들이 사라지고, 바닥은 깔끔해졌다. 숨을 들이마시는 느낌마저 가벼웠다.


‘아, 내가 나를 다시 배치했구나.’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옷장 앞에 섰다. 방 정리 탓일까. 두꺼운 외투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정장을 입고 출근하고 싶어졌다. 특별한 회의가 있는 날도 아니었다. 누군가를 설득해야 하는 날도 아니었다. 그저 내 마음이, 정장 입은 나를 원했다. 앞으로의 나를 조금 더 단정하게 기대하고 싶었던 날이었다.


맞춤정장을 꺼냈다. 어깨선이 과하지 않게 떨어지는 재킷. 허리 라인이 자연스럽게 잡힌 바지. 그 안에는 흰색 라운드 니트를 받쳐 입었다. 넥타이는 하지 않았다. 너무 공식적인 긴장 대신 여백을 남기고 싶었다. 현관 신발장 앞에서 옥스포드 구두를 신을지, 로퍼를 신을지 잠시 망설이다가 새로 산 뉴발란스 878 클래식 라이트 그레이를 꺼냈다.


정장에 운동화. 기자 시절부터 내가 좋아하던 조합이다. 격식은 지키되, 발걸음은 가볍게. 형식은 갖추되, 나다움은 놓치지 않는 방식.

‘그래, 이게 나지.’



코트를 걸치고 머플러를 둘렀다. 아직은 바람이 차니까.

지하철 안, 사람들 사이에 서서 문득 입학식 날이 떠올랐다. 서강대 가상융합전문대학원. 새 기수 9기 입학식. 기존 메타버스전문대학원에서 가상융합전문대학원으로 명칭이 바뀌고 맞는 첫 번째 신입생 기수. 2026년 1학기 재학생 원우회를 이끌 회장님과 인사를 나눴던 그날.


행사장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수트가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브랜드 로고가 보이는 것도 아니었고, 과하게 화려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선이 매끈하게 떨어졌다. 어깨에서 허리로 이어지는 곡선이 자연스럽고 단정했다.

굉장히 고급스러운 실루엣이었다.


나는 무심코 말했다.

“회장님, 수트 멋진데요.”


그는 웃으며 답했다.
“저는 맞춤 수트만 입어요.”


그 말에는 과시가 없었다. 그냥 자신을 설명하는 한 문장 같았다. 그날은 8기 집행부와 입학식 행사를 준비해준 많은 분들 덕택에 화기애애하게 잘 마쳤다. 나는 방학 동안 그리웠던 선생님들과 원우님들을 다시 만나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어색한 듯 반가운 웃음을 나눴다.


그 날에 8기 집행부 회장님과 나눴던 그 단어가, 오늘 출근길에 다시 떠오른 것이다.


맞춤 수트.
브랜드의 이름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내 몸에 맞춰진 옷.
장인의 손길이 보이지 않게 숨어 있는 옷.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브랜드의 끝은, 노브랜드(No brand)가 아닐까.


로고가 커질수록 나라는 사람은 작아질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사람 자체가 브랜드가 되면 굳이 이름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


맞춤정장은 내 가치를 높여주는 보조 장치일 뿐이다. 진짜 브랜드는 옷이 아니라, 그 안에 서 있는 사람.


“결국, 내가 곧 브랜드가 되어야지.”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코트 사이로 보이는 흰 니트, 매끈한 수트 선, 회색 운동화. 전통과 현재가 묘하게 섞인 모습.


완벽하지 않다.
아직 부족하다.
여전히 막막한 부분이 많다.


하지만 어제 방을 정리하며 느꼈다.

정리는 버리는 일이 아니라, 선택하는 일이라는 걸.
공간을 비운다는 건, 다시 배치할 준비라는 걸.


나는 어제 먼지를 뒤집어쓰며 과거의 배치를 해체했다. 그리고 오늘, 새로운 구조 속에서 눈을 떴다.


공간이 달라지니 생각이 달라졌다.

생각이 달라지니 자세가 달라졌다.
자세가 달라지니 걸음이 달라졌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사람들 사이로 걸어 나왔다. 발걸음이 묘하게 가벼웠다. 고단했고, 포기하고 싶었고, 왜 시작했나 후회도 했다. 하지만 끝까지 해냈다. 그래서 오늘 나는 안다.


막막함은 방향을 잃은 상태가 아니라,

아직 배치되지 않은 가능성이라는 걸.


봄은 갑자기 오지 않는다. 방 한켠을 털어내는 순간부터, 엉킨 선을 정리하는 순간부터, 거울 앞에서 나를 단정히 바라보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오늘 나는 정장을 입었지만, 사실은 새로운 마음을 입고 출근했다. 그리고 믿는다.


내가 곧 브랜드가 되는 날은, 거창한 성취의 날이 아니라 이렇게 인내하고 방을 정리하고 마음을 정돈하고 다시 한 걸음 내딛는 아침일지도 모른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