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한잔 하자'란 말이 미안한 요즘...

상대에게도 미안하고... 가족에게도 미안하고... 내 자신에게도 미안하다

by 광화문덕
여보세요

연말이라 전화를 하거나, 전화를 받는다. 대게 안부를 묻는 인사도 있지만, 한 번 보자는 연락도 있다.


오늘도 그랬다. 고등학교 동창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하도 본 지가 오래돼서 목소리나 들을 겸해서 전화를 걸었다. 단순 안부 전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전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늘 피로에 절어 있는 목소리. 친구의 눈은 볼 때마다 토끼처럼 충혈돼 있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 친구다.


잘 지내지?

상투적인 인사를 건넸다. 전화기로 안부를 묻는 말은 이것 말고는 잘 모르겠다.


너무 무겁거나 너무 가벼운 인사가 혹시나 친구가 처한 상황과 맞지 않아 실례가 될까 두려운 탓도 있다.


"잘 지내니" 이 말 안에는 수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니, 가장 무난한 것 같다.


언제 술 한잔 해야지?

친구가 먼저 운을 뗐다. 늘 피곤함에 절어 있는 친구가 한 말이라 믿기 어렵다. 난 친구에게 말했다.


"나 만날 시간에 집에 가서 좀 쉬어. 그리고 아내랑 아이랑 놀아줄 시간도 부족할 텐데......"


솔직히 남의 가정사에 개입하는 것 같아서...

내가 감히 친구에게 충고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그래도 친구가 나와 술 한잔 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은 진심이었기에...

마음을 담아 핀잔을 줬다. 친구는 머쓱해 했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나중에 여유 시간이 생겼을 때,
그리고 아내랑 아이와 충분히 놀아준 다음에
그런 다음에 시간이 나면 그때 보자.
그때 봐도 늦지 않으니까

우린 친구다. 1년에 한 번도 못 본다 해도 상관없다. 목소리만 들어도 반가운 친구. 우린 그런 친구다.


내가 일과 가정에서의 균형을 중요시하듯 친구도 그러하리라 생각한다.


연차가 올라갈수록 주어지는 일의 양과 책임은 무거워진다. 가정에서의 역할 비중도 커진다. 아내와 아들을 위해 아빠로서 해야 할 일은 늘어만 간다. 하루 24시간은 그대로지만, 내가 일과 가정을 위해 할애해야 하는 시간은 점점 많아진다.


술 한잔 속에 담긴 개똥철학

내게 술 한잔을 함께한다는 것은 참 많은 의미가 있다. 난 사실 처음 알게 된 취재원과는 저녁 자리를 섣불리 하지 않는다. 보통 6개월 정도 점심을 먹고 난 뒤에 저녁 식사 자리를 한다. 상대가 원할 경우에만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차피 서로를 알아나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사람과 내가 인간 대 인간으로 친해지는 시기. 서로가 바빠서 연락하지 않는다면 인연이 아닌 것이다.


홍보 또는 기자를 만나려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기자들과의 저녁 자리를 의무감에 하는 이들이 많다. 출입하니까, 기자니까 "술 한잔 합시다"라고 하는 이들이 많다.


난 기본적으로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좋은 사람과의 술자리는 좋아한다. 서로 알아가면서 가치관을 공유한다는 것, 같이 늙어가며 함께했던 추억을 공유한다는 것, 그 자리에 술 한잔이 곁들여 지면 더 깊은 마음을 나눌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술 마시면 간이 상한다.
태어나서 평생 마실 수 있는 술의 양은 정해져 있다.
내게 술을 함께 마신다는 것은
내 수명을 함께 나눈다는 의미다.


논리적으로 비약일 수 있다. 하지만 난 이렇게 생각하며 술자리에 임한다. 다만 예외도 있다. 팀 회식이나 부회식 자리. 이 자리는 나 역시 직장인으로서 의무감에 마신다.


흔히 기자들 사이에 '자폭'이란 용어가 있다. 취재원이 아닌 회사 사람들과 마시는 술을 이렇게 부른다.


외부로 나가서 취재원들과 전투를 하면서 정보를 취합하기도 바쁜데... 내부 사람들끼리 술을 죽어라 마시는 것은 아군끼리 전투를 벌이며 사상자를 발생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콧속에 피딱지

지난주 아내가 처가댁에 내려갔다. 내가 야근이 많아서 처가댁에 가 있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난 이 시기에 그동안 못 봤던 지인들과의 약속을 잡았다. 매일 저녁 자리를 했다.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았지만, 집에 12시쯤 도착해서 씻고 하다 보니 1시쯤이 됐다. 평소보다 늦게 잠이 들었다.


그 결과....


코가 너무 열심히 일했다고 내게 신호를 보냈다. 콧속에 피딱지가 생겼다. 2주째 피딱지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콧속 모세혈관이 터진 것처럼 같기도 하다...


오늘도 몇 통의 전화를 받았다. 연말과 연초 안부 전화다. 난 그들에게 먼저 '술 한잔 하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상대에게도 미안하고...

가족에게도 미안하고...

내 자신에게도 미안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