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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화문덕 Sep 25. 2018

#21. 소맥보다 와인

[신동진의 와인에 빠지다] – 1화. 왜 와인인가

얇게 뽑은 물줄기가 글라스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검붉은 광채. 매혹적인 빛깔이다. 글라스를 가볍게 돌린다. 화려한 향이 콧속으로 날아든다. 갈증이 밀려온다. 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간다. 천천히 기울인다. 혀 위로 와인이 흐른다. 달콤함과 매끄러움. 눈을 감고 이미지를 그려본다...

30대 중반까지만 해도 술하면 소맥이 최고라 생각했다. 소맥은 소주와 맥주를 일정한 비율로 혼합해 만든 일종의 칵테일이다. 소주의 알싸함과 어우러진 맥주 홉의 쓴맛, 그리고 꿀꺽 삼킬 때 터지는 맥주의 청량함을 난 정말 좋아했다. 무엇보다 살얼음으로 코팅된 글라스에 말아먹는 소맥은 고단했던 하루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는 느낌이었다.


물론 이런 감성적 접근은 소맥 3잔까지다. 이후에는 ‘부어라 마셔라’로 이어지는 레퍼토리, 술자리에서 나의 삶은 그렇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됐다.

내게 와인은 ‘비싼 술’, ‘분위기 잡을 때 마시는 술’로 기억됐다. 때문에 와인을 마시는 자리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매번 불편했다. 친한 이들이 와인 마시러 가자고 하면 “삼겹살에 소맥이나 말아먹지”라며 투덜거리기도 했다.

<출처 : 부에노스아이레스 잠원점 홈페이지>

그러던 지난해 말 겨울 즈음이었다. 우연히 한 아르헨티나 전문 레스토랑에 가게 됐다. 소주와 맥주는 없었다. 술은 오직 와인뿐이었다. 아르헨티나 말벡 와인이 나왔다. 코르크를 ‘퐁’하고 따니 복잡한 향이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코를 찌를 듯한 성난 알코올 냄새가 아니었다. 기분 좋은 향. 싱싱한 꽃다발을 건네받았을 때의 느낌이랄까. 


그 이후 이 레스토랑을 몇 번 더 방문했다. 다시 맛보고 싶었다. 그렇게 와인에 대한 거부감은 조금씩 무뎌졌다. 한술더떠 가성비 좋은 와인을 파는 가게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어느새 소맥보다 와인을 마시는 횟수가 늘어났다. 지금은 와인에 푹 빠져 산다. 저녁 자리가 일상인 내게 와인은 내 삶의 일부분이 되었다.

와인 예찬론자의 입장에서 와인은 갑(甲)과 을(乙)의 구분이 없는 술이다. 소맥은 갑의 기분에 따라 을의 운명이 결정된다. 갑이 내달리면 을은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미친 듯이 쫓아 달려야 한다. 그날은 아무리 요령을 피워도 장렬히 전사해야 하는 운명의 날, ‘만신창이각’이다. 


하지만 와인을 마신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많은 사람이 와인에 대해 ‘좋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와인을 원샷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몰상식한 행동이다’라는 인식! 드라마, 영화 속에서 본 와인을 마시는 분위기, 이미지가 우리의 무의식 속에 깊게 자리하고 있어서이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다음으로 와인은 ‘우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준다. 내가 느끼기에 소맥은 야망이 넘치는 놈이다. 잔이 몇 차례 돌고 나면 저녁 자리의 주인공은 ‘우리’가 아닌 ‘소맥’이 되기 일쑤다. 대화는 어느새 사라지고 서로의 술잔에 든 소맥에 집착하게 된다. 


와인은 그렇지 않다. 와인이 가진 13~14도의 알코올 농도는 적당한 취기를 일으킨다. 와인은 그날의 우리를 더 가깝게 만들어준다. ?통상 와인 1병은 6잔 정도 나온다. 둘이라면 석 잔, 셋이라면 두 잔가량을 마시게 되는 셈이다. 두어 잔만으로도 경직된 서로의 마음을 풀어주는 것이 와인이다. 주인공을 돋보이게 해주면서 자신의 맡은 역할을 멋지게 해내는, 없어서는 안 될 빛나는 조연이다.

와인은 어색한 이들을 이어주는 유능한 메신저이기도 하다. 술자리에서 어색하거나 대화가 끊기면 어김없이 잔을 들어 입안으로 털어 넣기 마련이다. ‘술자리에서의 어색함=술을 마시자’는 무언의 약속과도 같다. 특히 둘이서 마실 때는 1~2시간 만에 소맥 스무 잔이 돌기도 한다. 내 경험상 저녁 9시가 안 되어 인사불성이 되는 불상사의 원인은 대체로 이런 어색함 때문이다. 


와인은 이런 불상사를 원천봉쇄할 수 있다. 저녁 자리에 가기 전에 마실 와인을 골라, 와인 속 이야기를 미리 파악해 두면 ‘필름이 끊기는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다. 와인 속 숨겨진 이야기를 풀어나가다 보면 금세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진다. 게다가 대화를 하면서 마시다 보면 와인 한 병으로 1~2시간은 거뜬히 버틸 수 있다. 대화 주제가 생기면 와인 이야기는 잠시 멈추고 대화를 나누면 된다.

와인은 알면 알수록 매력적인 술이다. 와인 속에 담긴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중세를 거쳐 근대,현대까지 다양한 세계사 이야기가 숨어 있다. 학창시절 ‘세계사’란 말만 나와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던 나였지만 지금은 와인과 얽힌 이야기를 찾아 읽고 정리하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와인을 마시면서 인생도 배우고 있다. 와인마다 추구하는 바가 다르기에 그 나름의 다양성을 존중해야 하고, 다름을 인정해야 하고 그 안에서 가치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 와인이기 때문이다.


이러니 내가 어찌 와인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출처 : 헤럴드경제 9월 21일 금요일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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