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싸다고 나쁜 건 아니다
[신동진의 와인에 빠지다] - 5화 와인의 잔
"과장님 그러다 관절 나가요"
매일 아침 걷는다. 새벽 공기를 마시며 광화문에서 서대문, 그리고 서촌을 둘러본다. 약 50분에서 1시간 정도. 걷다 보면 알게 된다. 무얼 그리 바쁘게 지냈는지,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들이 많았음을.
이른 아침 출근길 사람들의 모습은 각양각색이다. 옷차림새부터 걸음걸이까지 저마다 개성이 묻어난다. 찬바람이 '쌩'하고 분다.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스포츠웨어가 인상적인 이가 런닝화를 신고 빠르게 내 옆을 스쳐 지나간다.
걸음을 멈췄다. 상가 건물 쇼윈도 앞에 서 있다. 내 모습이 비친다. 출근 길 교복인 정장에 운동화를 신고 있다. 이는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산책을 하기 위해 최소한의 장비만 착용한 것이다.
그러다 문득, 지금 내가 맞닥뜨린 상황이 와인 잔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와인 잔이 있다. 다이소에서 파는 천 원짜리부터 전문 와인 가게에서 파는 10만 원이 넘는 고가의 와인 잔까지. 마치 세상에 무수히 많은 운동화가 있고, 축구화, 골프화 등 특정 스포츠에 특화된 운동화도 있듯이 말이다.
우리는 운동하기 위해 집에 사놓은 일반 운동화를 이용하기도 하고, 조깅에 특화된 런닝화를 사서 신기도 한다. 물론 런닝화를 신었다고 일반 운동화를 신은 사람보다 반드시 달리기를 더 잘한다고 볼 수 없다. 와인 잔도 마찬가지다. 비싼 와인 잔을 가졌다고 해서 싼 와인 잔을 가진 이보다 와인을 더 잘 알 것라고 장담할 수 없다.
출처: https://winefolly.com/tutorial/the-importance-of-a-proper-wine-glass/그렇다면 "와인 잔은 무엇인가". 와인 잔의 본질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와인 잔은 와인의 향과 빛깔, 그리고 와인이 지닌 맛의 특성을 잘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하나의 도구다.
와인 잔은 크게 ▲레드 ▲화이트 ▲스파클링 이렇게 크게 3가지 종류로 구분된다. 우리가 가장 쉽게 접하는 와인 잔이 바로 레드와인용 보르도 잔이다. 와인을 마시는 것은 어디에서나 싸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이 잔으로 시작하면 된다. 이 잔으로 레드와인을 마시든, 화이트와인을 마시든 누가 뭐라 할 사람은 없다. 와인이 지닌 향과 빛깔, 맛이란 본질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어서다.
출처: https://winefolly.com/tutorial/the-importance-of-a-proper-wine-glass/그러다 와인을 더 깊게 알고 싶다면 와인 잔을 와인에 맞게 고르면 된다. 좀더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레드와인은 다시 보르도 잔과 부르고뉴(버건디) 잔으로 나뉜다. 부르고뉴 잔은 보르도 잔보다 와인을 담는 공간인 볼이 더 넓다. 볼 모양에 따라 향이 피어오르는 방식이 달라지고, 와인이 입안으로 흘러들어갈 때 혀에 닿는 부위와 면적에 따라 맛의 인상도 차이가 나서다.
출처 : https://winefolly.com/tutorial/the-importance-of-a-proper-wine-glass/화이트 잔은 레드 잔보다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다. 차게 마셔야 하니 와인 온도가 빨리 올라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스파클링 와인(샴페인) 잔은 볼 폭이 좁고 긴 형태인데, 찬 온도를 유지하면서 뽀글뽀글 올라오는 기포를 오랫동안 보면서 즐기게 하기 위해서다.
만약 "그냥 마시면 되는 거지"라는 의문이 든다면 종이컵이나 머그잔에 와인을 따라 마셔보며 와인 잔의 와인과 어떻게 다른지 경험해 보길 권한다. 종이컵에서 나는 종이 냄새가 와인 향에 미치는 영향, 머그잔의 두툼한 입구에 입술이 닿았을 때의 둔탁한 촉감, 원통형 용기 모양이 담아내지 못하는 와인 향 등이 와인을 마시는 즐거움을 반감시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즘은 이런 상상도 해본다. 머지않은 미래(KT 5G 세상)에는 '와인 온도와 당도 등을 알려주는 와인 잔에 투명 디스플레이가 장착된 스마트 잔이 나오지 않을까'라고 말이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와인을 마시며 느끼는 다양한 향과 맛, 그리고 그 안에서 느끼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대체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건 삶을 살아가며 느낀 희로애락 속 나만의 추억이 투영되어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