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진의 와인에 빠지다] 6화 - 와인의 점수
"이번 주는 실적 평가 기간입니다"
팀장님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씀하신다. 올 한해가 벌써 지나갔구나란 생각과 함께 올해 나의 평가점수는 몇 점일지 머릿속이 복잡해져 온다.
사람도 점수가 매겨지는 때가 있다. 바로 지금, 평가 시즌이다. 직장인에게는 매년 인사고과(人事考課)가 매겨진다. 이를 바탕으로 한 해의 실적평가가 이뤄지고 이것은 내년도 연봉을 결정하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직장인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승진도 고과 점수에 따라 가능성 여부가 갈린다. 고과 점수가 공개되면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웃는다. 고과 점수는 판을 휘젓기도 한다. 어떤 이는 어디론가 적을 옮겨야 하고, 어떤 이는 더 나은 점수 따기 위해 옮기기도 한다.
사실 점수란 것이 사람 그 자체를 평가하는 지표가 될 수는 없다. 그해의 여건과 환경으로 인해 그가 지닌 자질보다 고평가되기도, 저평가되기도 하니 말이다. 하지만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평가란 것은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존재임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와인에도 점수가 매겨진다. 세계 와인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와인 평론가로 불리는 이들로부터다. 와인의 점수는 빈티지, 즉 포도 수확 연도에 따라 달리 매겨진다. 한 해의 여건과 환경에 따라 그해의 포도 품질이 정해지고, 포도의 작황은 와인의 품질에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매년 포도 수확 시즌이 되면 각 와인 산지의 빈티지 평가가 진행된다.
와인을 시작하거나, 즐기는 이들의 경우 와인을 선택함에 있어 와인의 점수를 중요한 지표로 삼는다. '고득점=고품질'일 것이라 여겨져서다. 이 때문에 많은 와인 마케터들이 와인 점수를 활용한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기도 한다. '싸고 좋은 와인'으로 포장해 대중에게 알리기에 가장 직관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런 상술이 도가 지나쳐서 문제가 됐던 때도 있었다. 지난 2007년의 일이다. 우리나라 한 대형 유통매장에서 유명 와인 평론가 이름을 내건 와인 코너를 마련하고 대대적인 프로모션을 진행했는데 "소비자를 기만했다"는 비난에 휩싸였다. 90점대 높은 점수를 받은 와인을 판다고 했지만, 이중 절반 이상의 빈티지가 높은 점수를 받은 빈티지와 다른 빈티지를 판매했다는 것이다. 와인은 빈티지에 따라 다른 점수를 받을 뿐 아니라, 가격도 차이가 나는데, 이에 대한 정보를 속이고 판매에만 열을 올렸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와인 애호가 정도 되면 와인을 빈티지별로 꼼꼼하게 따져가며 사겠지만, 일반인이 그렇게까지 하면서 와인을 고르기는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세계의 와인 시장을 쥐락펴락하는 유명 와인평론가가 매긴 와인 점수는 참고할 만한 정보로써의 숫자는 맞다. 좋은 점수를 받은 와인은 가격도 함께 뛰기 시작한다. 그만큼 찾는 이들이 많아져서 일 것이다. 하지만 높은 점수를 받은 와인이라고 해서 나에게도 멋진 인상을 줄 것이란 보장은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람을 평가하는 것도 사람이고 와인의 점수도 결국 사람이 매긴 숫자일 뿐이다. 평가자의 주관적인 성향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모두 각각의 취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개성이라고 부른다. 와인을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와인의 점수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바란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은 와인이라고 해도 그건 그 사람 기준에서지, 내 기준은 아니다. 나는 감히 권하고 싶다. 와인을 즐기고자 마음먹었다면, 다양한 와인을 많이 경험해보자. 우리가 끊임없이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인생을 배워나가듯이 말이다. 그게 점수가 높은 와인이든 점수가 낮은 와인이든 와인이 주는 경험은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