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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화문덕 Dec 21. 2018

#38. 누군가가 그리워질때

[신동진의 와인에 빠지다] 8화 - 와인, 그리고 어울림

'퐁'

식탁에 앉아 와인 하나를 연다. 와인 셀러에 한 달 정도 모셔뒀던 와인이다. 지난달 지인과 와인주점에 그날의 감동을 잊을 수 없어 결국 한 병을 사 들고 집까지 왔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거실은 고요하다. 오로지 와인과 나 둘만의 공간이다. 조명은 당시 주점만큼 어둡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밝지도 않다. 잔잔한 음악도 없다. 지금은 와인에만 집중하기에 딱 좋은 그런 밤이다.


'흐음...'

와인을 보니 지난달에 느꼈던 감동이 다시 올라오는 것 같다. 처음 맛봤던 날의 감동이 설레발을 치며 침샘을 자극한다. 이미 머릿속은 과거의 경험을 끄집어내어 기대감을 한창 끌어올리고 있다.


'또르르르륵'


와인을 잔에 따른다. 얇은 물줄기를 만들려 애쓴다. 이제 막 딴 와인이지만 조금 더 풍부한 향과 맛을 느끼고 싶은 욕심에서다. 와인 잔에 짙은 루비색의 영롱한 붉은 빛이 감돈다. 와인의 향이 공기를 타고 비강 안으로 파고든다. 기대감이 점점 고조된다.


두 손가락을 가로로 눕혔을 때 정도의 알맞은 양의 와인이 잔에 담겼다. 흔히 와인의 향을 최고로 끌어올릴 수 있는 와인의 양이 바로 손가락 두 개 정도다. 와인 잔에 따라진 와인이 아름답게 보이는 비율이기도 하다.


잔 입구에 코를 가져가 '킁킁' 거려 본다. 혼자이기에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향을 맡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어 좋다. 아주 미세하게 달콤한 향이 느껴진다. 복잡하지도 않고 강렬하지도 않다. 연지 얼마 안 돼서 일까 아직 향은 피어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수차례 코를 벌렁거리며 향을 콧속 깊이 끌어들이려 애쓴다. 차근차근 와인이 가진 매력에 집중하고 싶다.


갈증이 밀려온다. 인내심은 이제 바닥을 쳤다. 잔을 들어 입안으로 와인을 흘려 넣는다.


'헉, 강렬한 단맛이다'


혀 위로 잘 익은 풍성한 과실이 한가득 들어왔다. 묵직하고 진한 초콜릿의 달고 쌉싸름함에 잔을 내려놓았다.

기대와 전혀 다른 맛에 흠칫 놀랐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한 달 전 맛봤던, 내 기억 속 와인과 전혀 다른 맛이다. 똑같은 빈티지이고 심지어 구매처도 같음에도...


'너무 달다. 난 이토록 단맛을 좋아하지 않는데...'


사람들과 함께 마셨던 그 날이 그리워졌다. 아마도 그날의 분위기와 음식,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지면서 내 뇌는 와인의 향과 맛을 전혀 다르게 인지했을지도 모르겠다.


미안하게도 둘만 이렇게 있으니 이 와인은 전혀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문득 우리가 살아가며 맞닥뜨리는 '사람과의 관계'가 떠올랐다. 우리는 늘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집안에서는 가족과의 관계, 집 밖을 벗어나면 학교, 직장, 그리고 공적이든 사적이든 만남을 강요당하는 사회 속에서 말이다.


나 역시도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찾으려 애쓸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러할수록 더욱 공허해지는 것을 느끼곤 했다. 만나면 기분이 좋은 사람도 있지만,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고통스러움을 주는 이들도 있어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가 좋아하는 이들만 만날 수 없다. 좋다는 감정을 느끼는 것도 상대적이니 말이다. 사실 내가 좋다고 해서 상대에게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보장이 없다.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완벽하게 좋음이란 이상일 뿐이라는 걸 우리는 살아오면서 이미 알고 있다.


결국 우리는 현재 나와 나를 둘러싼 환경을 받아들임으로써 부정적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사람과의 관계가 좋을 때도 있고 안 좋을 때도 있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짐으로써 마음의 평온을 유지할 수 있다.


요즘 명상을 하면서 생각하곤 한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다 내가 받아들여야 한다고. 그것이 인생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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