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진의 와인에 빠지다] 10화 - 와인과 사기
“우리 사랑은 영원할 거야”
흔히 우리는 ‘사랑’을 할 때 ‘영원’을 속삭이곤 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 순간 알게 된다. ‘사랑’, ‘영원’이란 단어는 현재를 열렬히 사랑하는 이들이 앞으로도 그들의 사랑이 영원하길 바란다는 바람을 서로에게 확인받고자 하는 바람일 뿐이라는 것을.
사랑은 영원할 수 없고 영원하다고 약속할 수 있는 속성의 것이 아니다. 그저 사랑이 변할까 두려워하는, 사랑에 상처를 입었거나 트라우마가 있는 상대를 안심시키기 위한 목적에 충실한 단어일 뿐. 오늘도 어제까지 ‘사랑’과 ‘영원’을 속삭이던 수많은 연인이 이별했을, 이별 중일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랑’과 ‘영원’이란 언약은 너무도 쉽게, 허무하게, 그리고 찰나의 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결국 그들에게 달콤했던 사랑고백도 무수히 많은 날을 함께 하자고 두 손가락 걸고 약속했던 매 순간들도... 그저 지키지 않아도 되는 그저 한낱 단어에 불과했던 것이다. ‘사기’처럼 말이다.
사기의 속성이 그러하다
모든 걸 다 책임질 듯이 약속해놓고 결국에 가서는 배신감으로 인해 당한 사람은 근간이 무너지게 된다. 아픔과 고통만 남긴 채... 버텨야 하는 것은 사기친 사람이 아니라 사기를 당한 사람이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는 몫이 된다.
‘사랑’과 ‘영원’을 속삭이며 달콤한 말로 ‘우리는 함께할 날이 많으니’라며 모든 것을 다 이해해주길 바라던 이로 하여금 갑작스럽고 일방적인 이별 통보 당했을 때의 허탈함과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별을 통보한 입장에서는 무슨 이유에서든 떠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상대를 떨궈버린 현실 자체가 홀가분할 수 있겠으나, 이별 통보를 받고 수용하지 못하는 입장에서는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운 나날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다는 분노 속에서 밤잠을 설칠 지도 모른다. 과거 사랑과 영원을 믿으며 그 또는 그녀와의 핑크빛 미래를 꿈꿨던 자신을 자책하며 심지어 자신의 삶, 미래까지도 망가뜨리는 시도를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와인계 위대한 개츠비
와인계에서도 와인애호가들의 마음을 빼앗은 사건이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 “닥터47”이라고 불렸던, ‘루디 쿠니아완’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는 2012년 3월 위조 와인 사기로 체포돼 2014년 8월 미국 맨해튼 연방지방법원에서 10년 징역형을 받고 현재 복역 중이다.
그는 2006년 와인 경매에서만 1만2000병, 우리나라돈으로 약 450억 원(3500만 달러어치) 가량을 팔았다고 전해진다. 미국 검찰 측은 루디가 2004년부터 2012년 사이 와인 수집가, 경매사 등을 상대로 위조 와인을 넘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의 집에서는 1947년 라플레어, 라피트, 로마네 콩티, 1950년 페트뤼스 등 인쇄된 와인 레이블 수천장과 컴퓨터 안에 스캔된 레이블 이미지, 위조와인에 쓰인 빈병과 코르크 등이 발견됐고, 심지어 위조 방법이 적힌 노트까지 발견됐다고 한다.
저렴한 와인 몇 가지들을 섞은 병에 껍데기를 씌워 그야말로 명품 와인으로 ‘탄생’시킨 것이다. 수많은 와인 애호가들은 루디가 만든 허상의 와인에 열광을 한 것이고 말이다. 이처럼 대담한 사기 행각을 벌인 루디가 대체 몇 병의 와인을 팔아치웠는지, 얼마나 생산을 했는지는 추산이 불가능할 정도다.
와인 업계에서는 그를 ‘와인계의 위대한 개츠비’라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넷플릭스에는 그의 얼굴이 그대로 담긴 다큐멘터리(Sour Grape)가 올라와 있다.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 와인 경매장을 통해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어나갔다고 한다. 그는 엄청난 돈을 지불하며 와인을 매입했고, 그런 그의 모습은 와인 애호자들 사이에서 회자됐다. 루디는 고가의 희귀와인을 수집하는 애호가들과 어울리게 됐다. 그리고 루디는 그들과 어울리는 자리에 고가 와인을 기꺼이 오픈했다고 한다. 그의 그런 모습에 와인애호가들은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은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고 증언한다.
위조 와인의 역사
사실 와인업계에서 사기, 그러니까 위조 와인의 역사는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다. 거슬러올라가면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로 추산된다.
사실 위조 와인이냐, 불량 와인이냐의 구분은 오랫동안 무의미했다. 와인의 품질이나 원산지, 등급에 관한 대략적인 기준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18세기를 지나 전문가들 사이에서 품질에 관한 기준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1899년 프랑스 정부에서 와인은 포도주스를 발효한 음료로 법적으로 규정하게 된다. 이 때가 되어서야 법적으로 올바른 와인과, 그렇지 않은 위조 와인의 구분이 생긴 것이다.
이 후 와인 애호가들을 속이려는 위조범들과 진품을 감별하는 전문가들의 전쟁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와인이 전세계인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면서 명품 와인을 구하려는 이들은 많아지고, 몸 값도 올라가다보니 이를 노린 위조범들, 루디와 같은 이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위조를 넘어 범죄로 확대
위조를 넘어 생명을 위협하는 범죄까지 일어났다. 와인에 자동차에 사용하는 부동액을 넣은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바로 1985년 오스트리아의 부동액 와인 사건이다.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깊고 단맛이 있는 와인이 고가로 판매됐는데, 이러다보니 오스트리아의 일부 생산자가 더 깊은 단맛을 궁리하다 해서는 안되는 일을 저지르게 된다. 인체에 유해한 디에틸렌글리콜(자동차 라디에이터용 부동액으로 단맛과 향미를 증진시키는 물질이나 인체에는 위험하다)를 와인에 첨가한 것.
이 사건은 오스트리아의 한 와인 생산자가 세금을 돌려받기 위해 부동액의 구입비용 영수증을 국세청에 제출하는 바람에 들통났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산 와인의 명성과 신뢰를 회복하는데 오래 걸릴 정도였다.
와인 뿐 아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배신하기도 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혹은 미래의 잠재적 위험을 피하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자위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배신’은 정당화될 수 없다.
서로 함께 하며 마음을 나눴던 순간들, 그 기억들로 인해 더욱 괴로운 나날을 보낼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길거리를 지나다니다보면 지하철안에서 우두커니 서서 멍한 눈으로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는 이들을 보곤 한다. 얼마나 가슴아픈 사랑을 겪었길래... 어떤 배신을 당했길래... 저토록 혼이 나간 상태로 눈물이 마르지 않는 샘이 되었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나까지 가슴이 저며올 때가 있다.
나는 어땠을까
난 요즘 나의 과거의 순간들을 되돌아보곤 한다. 부끄러운 과거도 있고 내 삶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날들도 있다. 가슴이 시리도록 사랑하며 행복했던 순간들도 있고, 떠올리는 것 자체만으로도 끔찍하리만큼 아픈 사랑의 흔적도 있다. 수년이 지나도 여물지 않았음을 깨닫고 냉큼 기억으로 통하는 문을 닫아버린다. 하지만 이미 한번 열린 문 사이로 물밀듯이 밀려오는 아픔의 흔적들로 손쓸새 없이 내 머릿속은 그녀와 얽힌 상념들로 가득차버린다.
그럴 때 난 내게 되묻는다. '그 때 내가 했던 사랑이 진짜였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한 것 아닐까... 그걸로 된거지...'라고 말이다.
되돌릴 수 없다면 선택해야 한다.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길 것인지 아니면 영영 기억속에서 지워버릴지를...
사랑을 앓고나면 모든 사랑이 사기같고 물거품같게 느껴질 때가 있다. 배신감에 온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애증에 휩싸일때도 있다. 상처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순간이 진심이었다면... 그 순간이 진짜였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라고 나 스스로를 달래야 한다. 지나간 것에 집착하면 할수록 더욱 더 망가지는 것은 나이기 때문이다. 나를 지키기 위해선 그래야만 한다.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길 수 없다면 놓아주어야 한다. 내 기억속에서 사라질 수 있도록...
결국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곁에 둘 수 있는 건 단 하나 뿐이다. 와인도 사랑도. 다 마실수도 없는 많은 와인을 소중하게 품어 안은채 생명이 꺼져가도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마실 수 있는 건 단 한모금의 와인. 아무리 많은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았다 하더라도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곁에 둘 수 있는 사랑은 단 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