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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화문덕 Mar 10. 2019

절망 속 나는 병든 게 아니야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유고작 '상실 수업'을 읽고

내 인생 속 지침서가 될
'상실 수업'

복잡한 감정에 대해 조금 더 깊게 다가서고 싶었다. 더 이상 내 안의 감정을 억누르고 통제하기보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복잡 미묘한 감정들을 이해하자고 생각했다. 그러다 알게 된 '상실 수업'.


이 책을 차근차근 읽어나가면서 느낀 것은 위로다. 내 마음속 뒤엉켜 있는 감정들을 저자는 이해할 수 있다고 나를 다독여주는 듯했다.


이 책을 고른 것은 지금 내게 정말 행운이었다. 마흔이 되어 내 마음속 감정들의 대혼란 시기를 겪고 있는 내게 이 책은 읽는 내내 내 마음을 보듬어 줬다.


두고두고 계속해서 읽고 싶은 책이다. 내 마음이 혼란스럽고 슬픔과 절망 속에서 내가 헤어 나오지 못할 때 이 책을 펼치게 될 것 같다. 당분간 이 책은 내 삶의 지침서가 될지도 모르겠다.


책의 핵심은 '상실의 고통으로 인한 감정의 변화가 '슬픔→분노→타협→절망→수용'의 5단계를 거친다'다. 쉬운 예시를 통해 이성적으로 뿐만 아니라 감성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쓰인 글이어서 읽는 내내 깊은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너의 슬픔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만 해.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데이비드 케슬러와 함께 이 책을 집필했는데, '상실 수업'을 집필하기 시작했을 때 엘리자베스가 데이비드에게 한 말이다.


"데이비드, 당신의 슬픔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만 해요. 그렇다면 이 책에 생기가 불어넣어질 거예요"

내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으며 처한 상황에도 불안해하지 않고 모든 걸 놓아버리는 순간이 되면 난 내가 떠나야 할 시간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게 될 거예요. 내가 배워야 할 두 가지는 인내심과 사랑받는 법을 익히는 거지요.

지난 9년 동안 인내심을 배워왔고 내 육체가 점점 쇠약해지고 침대에 더 오래 누워있게 될수록 사랑받는 법을 더 많이 배우게 된답니다. 받아들이는 법을 깨우치는 곳에 결국 이르게 되면 난 이 곳을 떠날 수 있을 거고 이 생애 너머에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가게 될 거예요.

난 내가 겪은 이 고통을 이해하는 척하지 않습니다. 대신 내 상황에 대해 신에게 분노할 겁니다. 물론 신에게 화를 내는 것은 분노 단계의 일부입니다. 슬픔을 예감하면 다 그럴 것입니다. 신은 내게 딱 맞는 시점을 이미 계획하셨고 그때가 되면 나는 '네'라고 대답하며 그것을 따를 겁니다. 그리고 나비가 누에를 벗고 날아오르는 것처럼 나도 내 육체를 두고 떠날 것입니다.
첫 단계 '슬픔'

우리가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 우리에게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것은 슬픔이다. 마치 바다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큰 슬픔을 느끼게 된다. 누구와도 연락이 되지 않는다.

슬픔은 우리가 상실에서 도저히 헤어 나오지 못하도록 만든다. 인생이 무의미해지고 감당할 수 없게 느껴질뿐더러 삶이 이치에 맞지 않아 보인다. 충격과 부정의 상태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점점 정신이 무감각해져 간다. 어떻게 살아갈지, 살아간 해도 왜 살아가야 하는지 의문스럽다가 그저 하루를 견뎌낼 방법을 찾게 된다.
영혼을 보호하는 본능
'부정'과 '충격'

슬픔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해주는 우리의 방어 본능은 바로 충격과 부정이다.

부정과 충격은 상실을 극복하고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해 준다. 부정은 슬픔의 감정이 몰아닥쳐오는 속도를 더디게 해 준다. 그것이 인간이 감당할 만큼만 허락하는 신의 방식이다. 충격과 부정은 중요한 감정이다. 그것은 영혼을 보호해주는 장치다.
두 번째 단계 '분노'

슬픔이 지나가고 나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누군가를 향할 수도 있고 자신을 향할 수도 있다. 분노가 안에서 부글부글 끓게 두지 마라. 화를 내라. 분노는 사랑의 강도를 나타내는 또 다른 표시다.

분노 아래는 고통, 다시 말해 나의 고통이 숨어 있다. 소외되고 버림받은 기분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우리 사회는 분노를 두려워한다. 분노가 잘못됐고 부적절하며 부적합하다고들 말하며, 심지어는 거칠고 너무 지나치다고도 한다.

분노를 다루는 법을 모른다면 그건 그들의 문제다. 불행하게도 그들도 언젠가는 상실의 분노를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당신은 당신의 분노를 허락하고 존중해주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혼자만의 공간을 찾아 분노를 밖으로 꺼내보라.

배게에 대고 크게 소리 질러보라. 당신과 다른 누군가가 다치지 않으면서 분노를 밖으로 꺼낼 방법을 찾아보라. 산책을 하고 수영을 즐기며 정원을 손질하라. 운동은 분노를 구체적으로 형상화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분노하고 있다는 것은
치유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수면으로 올라오기에는 너무 이른 감정들을 내가 서서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판단하지 말고 의미를 찾으려 하지 말고 분노 그대로를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삶은 불공평하다. 분노는 상실의 불공평함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분노는 당신이 가장 외로울 때 친구나 가족을 당신 곁에서 떠나버리게 만든다.
죄책감도 '분노'

죄책감은 자신을 향한 분노다.

당신은 책임이 없다. 상황을 바꿀 수 있었다면 그렇게 했겠지만 당신은 그럴 힘이 없었다. 당신은 느낄 수 있고 정말 사랑했었고 상실했다는 사실들이 분노를 통해 확인된다.
분노를 통해 발견하는 '상실의 고통'

화를 허락하면 할수록 마음속 깊이 감춰진 감정들을 더욱더 찾게 된다. 보통은 상실의 고통을 발견하게 된다.

분노의 강도가 감당하기 버거울 수도 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잃어버린 사랑의 양과 비례하기 때문이다. 고통 속으로 들어가면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고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국 반대편 출구로 나오게 될 것이다. 고통은 가라앉고 상실의 감정들은 다시 형태를 바꾼다. 다른 이의 시선 때문에 분노를 무시하지 않도록 하라. 누구든 당신의 분노를 비난하도록 두지 마라. 심지어 당신 자신이라 할지라도.
세 번째 단계 '타협'

'만일 그랬더라면...'이라는 타협의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물론 타협에 수반되는 감정은 '죄책감'이다. 분노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가정'과 '희망' 사이에서 자신의 잘못을 발견하고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던 부분을 생각한다.


심지어 고통과도 타협을 시도한다. 상실의 고통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과거의 기억 속에 남아 고통으로부터 빠져나갈 길을 생각해내는 것이다.

타협은 마음이 상실의 어느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동하도록 돕는다. 타협은 우리가 각 단계에 적응할 수 있도록 시간적 여유를 주는 중간 정거장이다. 강한 감정들이 지배하고 있는 공간들이 각각 거리를 두고 유지되도록 그 간격을 타협이 채워준다. 어쩌면 마구 흐트러져 있는 혼란상태에 질서를 부여해준다고 느껴지게 한다.
네 번째 단계 '절망'

타협 단계가 지나면 우리의 관심은 '현실'로 이동한다. 그리고 우울과 절망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 절망의 단계는 영원히 지속될 것 같다.

공허감이 드러나고 슬픔이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깊게 침투한다. 강력한 슬픔이 안갯속에 혼자 남겨진 채로 삶에 소외되어 애써 세상을 살 의미가 있는지 의문스럽다. 왜 굳이 살아가야 하는가?

아침이 오지만 개의치 않는다. 침대에서 일어날 시간이라며 속삭이는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리지만 그렇게 할 열의가 없다. 그럴 이유도 없다.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마음이 침울하며 자꾸만 뭔가를 뺏기는 기분이 든다.

하루를 버텨내기 위한 행동들을 보고 있으면 그 모든 것이 하나같이 공허하고 의미 없어 보인다. 왜 먹어야 하나? 왜 먹지 말아야 하나? 모든 일에 신경 써야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정신병이 아니다

이 절망감은 정신병 조짐이 아니다. 크나큰 상실을 겪고 나서 나타날 수 있는 반응이다. 슬픔이 치유되는 과정이라면 절망은 그 과정에서 꼭 지나쳐야 하는 단계 중 하나다. 고통이 혹독한 만큼, 절망은 역설적인 방식으로 치유될 수 있다.

상실 후에 찾아오는 절망을 병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사랑한 사람을 상실한 일은 매우 절망스러운 상황이며 절망은 극히 정상적이고 적절한 반응이다. 상실감이 영혼 깊숙이 자리 잡으며 그 사람이 이번에는 회복될 수 없으며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걸 실감하게 될 때 절망이 찾아오는 것은 극히 당연하다.

정상적인 절망은 삶 속에서 일정 기간 동안 느끼는 슬픔이며 흔히 걸리는 마음의 감기와 같다.

물론 치료받지 않은 임상적 우울증은 정신 상태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 우울증은 장기간 또는 극도의 절망 상태로 간주되는 질병의 하나다. 정상적인 절망이 전문가의 도움이 요구되는 임상적 우울증으로 진전되었을 경우에는 항우울제가 일시적으로 도움이 되기도 한다.

더 심각하고 오래 지속되는 절망 상태일 경우에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가 어렵다. 이런 경우 항우울제 복용은 도움이 될 수 있고 끝없는 절망의 수렁에서 건져줄 것이다. 단 슬픔에 잠긴 이의 상황을 잘 아는, 올바르게 교육받은 의학 전문가만이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있다.
절망이란 이름의 방문객

환영받지 못한 방문객이지만 내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방문할 자다.

절망을 초대해 난로 앞 당신 옆으로 의자를 마련해, 피할 방법을 강구하지 말고 다만 함께 앉으라. 슬픔과 공허함으로 인해 정화된 순수함 속에서 상실을 바라보라. 절망을 느끼도록 마음을 놓아두면 상실 안에서 목적을 달성한 절망은 곧바로 떠날 것이다.
절망 속 특정한 슬픔

상실 뒤에 오는 절망 안에는 원인을 알 수 있는 특정한 슬픔이 있다.

슬픔에 잠긴 이는 삶 가운데 있지만 삶이라 일컫는 활동들에 전혀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짜증이 밀려오며 집중할 수도 없다. 주위에 무엇이 있든 외로움을 느낀다. 마치 저 밑바닥으로 내던져진 기분이다. 다시 옛 감정들이 살아날지 알 수 없고 이런 삶이 영원히 지속될까 불안하다
마지막 단계 '수용'

수용은 '괜찮음'이 아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현실이 영원한 현실임을 인정하는 단계다.


치유되고 있는 것은 있었던 사건들을 기억하고 회상하며 다시금 하나씩 돌이켜보는 것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곳이고 나는 다시 적응해야 한다.

새로운 현실을 결코 좋아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헤쳐 나가 보려고도 하겠지만 결국 받아들이게 된다. 이 새로운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이 새로운 규범을 가지고 사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상실의 고통으로부터 도저히 치유될 것 같지 않다고 여겨지더라도 치유와 적응이 확고히 자리매김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수용의 단계다. 사랑한 이가 이제 떠나야 할 때였음을 슬프게도 깨닫기 시작한다.

사랑한 이가 남기고 간 역할들을 어떻게 새롭게 조정할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며 또는 자신이 맡을지를 배워야 한다. 물론 사랑한 이와 깊이 연결되어 있어 자신과 하나가 되어버린 부분이 많을수록 이렇게 하기는 더욱 힘들다.
수용을 통한 치유

치유되는 동안 우리가 어떤 존재이며 삶에서 사랑한 이는 어떤 존재였는지를 깨닫게 된다. 찢겨 나간 조각들을 제자리에 붙이며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하기 시작한다.

아쉬움은 늘 있게 마련이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더 많이 볼 수도 있었고, "사랑해"라고 한 번 더 말할 수도 있었으며, 몇 번 더 그를 방문할 수도 있었다.

뭐든 영원히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또한 모든 걸 다 이룰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아쉬움은 마음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며, 더 많은 것을 갈망하는 것이고, 항상 더 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아쉬움은 항상 과거에 속한다.

시간이 영원할 거라는 착각에 서로의 소중함을 일찍 깨닫지 못한다. 잃은 것을 진실로 깨닫게 되는 죽음 앞에서 그 가치는 더욱 커진다.
마지막 문구는

이 책의 3번째 장인 '눈물의 샘이 마를 때까지 울라'의 도입부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생각조차 못한 상실이 일어났다. 그것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혀 이성을 마비시키고 극심한 고통을 맛보게 한다. 누구든 살아가면서 많은 상실을 경험하지만 사랑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공허감과 깊은 슬픔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다. 당신의 세계는 그대로 멈춰버린다. 사랑한 이가 죽은 정확한 시각을 또는 그 소식을 접한 순간을 그대로 기억한다. 그것은 마음 깊이 새겨진다. 당신의 세계는 무력함과 환상으로 점령당한다. 마음의 시계는 이미 멈춰있는데 세상의 시계는 여전히 앞을 향해 가고 있는 사실이 그저 낯설게만 느껴진다.

소중한 책을 내주시고 만들어주신 분들에 대한 예의라 생각되어 아래 책에 대한 소개를 붙여 넣습니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책 소개

상실 수업

저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  데이비드 케슬러  | 역자          김소향

출판 이레  

저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의사, 소설가    

인간의 죽음에 대한 연구에 일생을 바쳐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이 '20세기 100대 사상가' 중 한 명으로 선정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1926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세 쌍둥이 중 첫째로 태어났다. 자신과 똑같은 모습의 다른 두 자매를 바라보며 일찍부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시작한 그녀는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평생 놓지 않았다. 스위스 시골에서 자란 엘리자베스는 아버지의 친구가 나무에서 떨어져 죽은 것을 보면서 죽음에 대해 일찍부터 생각하게 되었다. 공포에 직면하여 죽기 전, 그 남자는 이웃의 아이들을 그의 방으로 불러, 그의 아내와 아이들이 농장을 꾸려 나가는 것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이 경험은 어린 엘리자베스에게 '큰 자부심이자 기쁨'으로 남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열아홉의 나이로 자원봉사 활동에 나선 엘리자베스는 폴란드 마이 데넥 유대인 수용소에서 인생을 바칠 소명을 발견한다.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사람들이 지옥 같은 수용소 벽에 수없이 그려 놓은, 환생을 상징하는 나비들을 보고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취리히 대학에서 정신 의학을 공부한 엘리자베스는 미국인 의사와 결혼하면서 뉴욕으로 이주한다. 이후 뉴욕, 시카고 등지의 병원에서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정신과 진료와 상담을 맡는데, 의료진들이 환자의 심박수, 심전도, 폐기능 등에만 관심을 가질 뿐 환자를 인격체로 대하지 않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그녀는 앞장서서 의사와 간호사, 의대생들이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마음속 이야기를 들어주는 세미나를 열고, 세계 최초로 호스피스 운동을 의료계에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죽어가는 이들과의 수많은 대화를 통해 어떻게 죽느냐는 삶을 의미 있게 완성하는 중요한 과제라는 깨달음에 이른다. 그녀가 말기 환자 5백여 명을 인터뷰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 써낸 《죽음과 죽어 감 On Death and Dying》은 전 세계 25개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될 만큼 큰 주목을 받았고, 그녀는 '죽음'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된다. 이후 20여 권의 중요한 저서들을 발표하며 전 세계의 학술세미나와 워크숍들로부터 가장 많은 부름을 받는 정신의학자가 된 그녀는 역사상 가장 많은 학술상을 받은 여성으로 기록된다. 말년에 이르러 온몸이 마비되며 죽음에 직면하는 경험을 한 엘리자베스는 70세가 되던 해에 쓴 자서전 《생의 수레바퀴 The Wheel of Life》를 이렇게 시작한다. "사람들은 나를 죽음의 여의사라 부른다. 30년 이상 죽음에 대한 연구를 해왔기 때문에 나를 죽음의 전문가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내 연구의 가장 본질적이며 중요한 핵심은 삶의 의미를 밝히는 일에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죽음에 관한 최초의 학문적 정리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삶에 대해서도 비할 바 없이 귀한 가르침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그 가르침을 전하며 살았다. 그녀가 살아가는 동안 얻은 인생...


목차

책을 시작하며| 작별의 문 앞에서


1 신은 감당할 만큼만 고통을 준다
2 슬픔에게 자리를 내어주라
3 눈물의 샘이 마를 때까지 울라
4 떠나간 이가 해왔던 것, 그것을 하라
5 사랑을 위해 사랑할 권리를 내려놓으라
6 몸이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주라
7 슬픔에 '종결'은 없다는 것을 알라
8 상실의 밑바닥까지 발을 디뎌보라
9 신의 이해를 구하지 마라
10 '상실'은 가장 큰 인생수업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내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상실
데이비드 케슬러| 상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다
옮긴이의 말| 삶이라는 학교에서 배우는 상실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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