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일상) 처음 마음

처음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가

by 오동희

2017년 1월 16일. 서울역에서 포항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오랫동안 원했지만 쉽게 허락되지 않았던 승진의 시간이 마침내 나에게도 미소를 지었다. 부장으로 승진하고 1년 정도 지방 근무를 하기 위해서 전날 미리 내려가는 길이다. 승진의 기쁨을 누리며 며칠을 보내다가 막상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는 걱정이 찾아왔다. 이제 막 관리자로 첫발을 디디는데 잘할 수 있을까. 같이 일하게 될 직원들은 어떤 분들일까. 당장 내일 만나는 직원들과의 첫 만남에서 무슨 말을 하여야 하나. 준비한 것도 없이 막막 하기만 하다.


깜빡 잠이 들었다 깨어나서 시계를 보았다. 그 순간 며칠 전 문유석 판사님이 신문에 쓰신 “전국의 부장님들께 감히 드리는 글”이 생각났다. 부장 승진이 확정된 날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밑줄을 긋고 읽었던 “저녁 회식 하지 마라. 젊은 직원들도 밥 먹고 술 먹을 돈 있다. 친구도 있다. 없는 건 당신이 뺏고 있는 시간뿐이다.”에 대하여 이야기 해보자.


나의 시간을 돌아보았다. 승진을 위하여 희생된 많은 것들, 승진을 위한 기회비용이라 하기에는 인정하기 싫었던 장면들이 떠올랐다. 일을 잘하는 것은 당연하고 거기에 사람과의 관계를 위하여 쏟아야 하는 시간들, 상사와 저녁자리까지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불이익을 볼까 노심초사해야 했던 순간들. 그러면서도 ‘나는 부장이 되면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했었다.


‘그래, 이것을 나의 초심으로 하자. 내가 부장으로 있는 동안은 어쩔 수 없는 공식적인 자리 외에는 회식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처음 마음으로 하자.’


이때의 마음으로 살고 있다. 외지에서 혼자만의 생활이 가져다 준 자유이지만,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여유와 시간이 많아졌지만, 약속을 한번 어기면 다시 시작 할 자신이 없어 그 한번의 시작을 하지 않으려 하였다.

물론 걱정은 있었다. 소통의 문제였다. 술자리에서 대화하며 꼬였던 업무를 풀기도 하고 끈끈한 사람관계를 맺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 왔으니까. 이런 관계가 단절되면 사회생활의 어려움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였다. 오랫동안 익숙해진 직장에서의 생존법이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점심식사를 같이 하고 커피와 차 한잔을 나누다 보면 더 많은 생각이 교류되고 관계의 사다리가 되었다. 술을 못하거나 저녁 자리에 참석이 어려운 직원들은 더 좋아하였다. 그런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기 때문에 받을 불이익은 없을 거라고. 사실 술을 즐겨하는 사람은 부서 전체에서 소수에 불과하다. 어떤 사람에게는 술자리 그 자체로도 스트레스가 된다. 상사와의 자리가 마냥 편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 자리는 편한 자리가 아니라 필요한 자리일 것이다. 잘 보여야 할 자리, 조직생활을 위하여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자리, 내 필요에 의해서, 아니면 상사가 그 지위와 알량한 권력에 따라 누리는 자리, 그 이상의 것을 보지 못하였다. 물론 정말 필요한 자리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소통과 좋은 관계 맺음이 술을 빌어야 할 일인가. 술을 못하거나 참석이 어려운 다수의 직원을 배제할 만한 중요한 의미가 있나.


첫날, 예상대로 나를 위한 환영의 식사자리가 있었다. “저만을 위한 저녁식사 자리는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라는 말로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내가 생각한 처음 마음과 다짐을 이야기 하였다. 모두 당황한 표정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외지의 부장이 와서 처음하는 말이 예상 밖의 말이었을 것이다. ‘잘해보자’거나 ‘같이 노력하자’ 또는 ‘잘 부탁한다’가 아니라 식사를 하지 않겠다니!


그렇게 포항에서 1년을 보내고 떠나는 마지막 날, 그동안 많이 친해진 직원이 와서 말하였다. “부장님. 지사에 온 첫날에 ‘아 참 별난 부장이 왔구나.’, ‘힘든 부서생활이 되겠네.’라고 다들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그래봤자 며칠이나 가겠어.’라고 생각하며 궁금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 초심을 품은 지 9년이 지나고 있다. 아직 그럭저럭 잘 지키고 있다. 많이 느슨해져 때로는 저녁 자리를 할 때도 있고 마지 못해 붙들려 가는 척하며 술자리에 참석하기도 한다. 나도 모르게 어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내가 먼저 술자리를 만들지는 않겠다는 그 약속만은 지키고 있다. 나도 친구가 있고 술 마실 돈이 있는데 직원들과 함께하면서 나만 편하게 저녁 먹을 이유가 뭐가 있나. 때로는 외롭지만 그래도 괜챃다. 부탁할 일도 부탁받을 일도 없는 편안함이 좋다.


이제 퇴직을 몇년 남겨 놓고 있다. 더 높은 승진의 기회는 사라지고 부장으로 퇴직할 것 같다. 아마도 부장으로서의 초심을 마지막까지 가지고 이 회사를 떠날 것이다. 금년에도 9년 전 그때의 마음으로 보내야겠다. 첫 마음이 끝 마음이다.


(샘터 2026년 1월호에 실렸습니다. 브런치 글은 제가 쓴 원문을 수정한 글로서 샘터 글과 차이가 있습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