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하게 자서 산뜻한 아침을 맞이 했어. 조식을 먹지는 않지만 오늘은 점심 먹을 시간도 빠듯하기에 주는 조식을 마다하지 않기로 했어. 조식 시간이 거의 끝날 즈음에 내려가니 몇 분만 식사를 하고 있었어. 빵이랑 수프, 베이컨, 과일 정도로 해서 먹었어. 유럽의 빵은 정말 맛있어서 거를 수가 없지.
같은 테이블에 동양인 아주머니께서 인사를 하셨어. 중국인이라고 물어보는 건 처음이라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난 한국인이라고 대답했어. 아주머니가 중국인이라 그렇게 물어봤데. 혹시나 같은 나라 사람이길 바랬던 거 같았어.
친퀘테레를 보기 위해 왔냐고 물어봐서 그렇다고 했지. 아주머니는 친퀘테레가 너무나도 아름답다고 중국에도 다양한 풍경이 있지만 이곳은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다고 하셨어. 이곳의 여러 가지 팁도 전해주시고 특히 체크아웃하고 이곳에 짐을 맡기고 가면 된다고 하셨지. 그래서 매니저분에게 짐을 맡기고 가겠다고 대신 말씀까지 해주셨어. 대화가 점점 길어지고 날 보낼 줄 기미가 보이지 않아 가야 할 시간이라고 말하고는 인사 후, 프런트에 짐을 맡기고 역으로 고고고!!
계획과 기대감 그리고 체리
친퀘테레는 이탈리아어로 다섯 개의 땅이라는 뜻이야. 이곳에는 리오마조레 (Riomaggiore), 마나롤라 (Manarola), 코르닐리아 (Corniglia), 베르나차 (Vernazza), 몬테로소 알마레 (Monterosso al mare)라고 불리는 다섯 개의 해안마을이 있어. 이곳은 두 발과 기차로 여행할 수가 있지. 이탈리아에서 잠시 살았던 친구가 친퀘테레를 포함하여 두 곳을 추천해줬어. '이탈리아인이 일생에 한 번은 반드시 간다는 휴양지'라고 반드시 가보라고 말이야. 그래서 어떤 매력이 있길래, 이탈리아인이 반드시 간다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 궁금했어.
그래서 하루를 끼워 넣었지. 어차피 물놀이를 하지 않을 거라 하루면 충분할 거 같았어. 문제는 오늘 안에 로마에 가야 해서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 길어야 5~6시간 남짓. 계산상 한 마을에서 1시간 정도 보내면 되는데 이동시간이 있으니 1시간 이하로 구경을 해야 할 거 같았어.
마을끼리 해안으로 이어진 하늘색의 길이라는 등산로가 절경이라고 들었어. 하지만 그렇게 걸으려면 하루로는 힘들 거 같아. 그래서 이번에는 기차로만 다니기로 마음먹었어. 솔직히 추천받았지만 기대감이 없어서 하루만 잡은 거였어. 사진으로 확인했을 때는 왠지 우리나라의 어디와 비슷한 풍경이었거든.
역으로 걸어가다 작은 새벽 시장 같은 곳이 보였어. 개인 상인들이 모여 채소랑 과일을 이른 아침에 잠깐 파는 곳이었어. 둘러보다 한국에서 비싼 체리가 잔뜩 쌓여 있었고, 가격표에 2, 5, 10유로로 쓰여있었어. 그래서 2유로만큼을 주문했지. 예상과 달리 아주머니께서 큰 검은 봉지를 꺼내셔서 끊임없이 담는 거야. 말릴 사이 없이 엄청난 양의 체리를 주셨어. 내가 마지막 손님이어서 다들 시장이 정리되고 있었고, 나는 그라찌에 하고 그곳에서 나왔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오늘 점심은 체리로 해야 했어. 그런데 체리는 정말 맛있더라. 체리에 시큼한 맛없이 그냥 달아~ 무슨 설탕처럼 달아! 그렇게 커다란 검은 봉지를 들고 체리를 하나씩 꺼내먹고 꼭지는 다시 봉지 속으로 넣는 행동을 반복했어. 친퀘테레 내내 체리를 먹었어. 지금 생각해보니 동양인 남자가 커다란 검은 봉지를 들고 체리를 먹으며 관광하는 모습은 특이해 보였을 거 같아.
라 스페치아
어느새 라 스페치아 역에 도착했고, 친퀘테레 카드를 사러 갔어. 이 카드는 기차와 등산로를 이용할 수 있는 입장권 같은 거야. 여기서 중요한 건 일반 매표소에 가면 팔지 않아. 친퀘테레만을 이용할 수 있는 카드를 파는 곳이 따로 있어. 다섯 개의 역에 모두 있어. 하지만 대부분 친퀘테레 1일, 2일 사용권을 사기 때문에 라 스페치아에서 사지. 한국에서 검색할 때 이곳을 못 찾아 헤매는 시간이 많다고 들었어.
헤매지 말고 초록색으로 된 출입구가 있는 곳을 찾으면 돼. 어렵지 않게 역에서 금방 찾아서 들어갔어. 매표소라기보다는 기념품 가게인 거 같아. 카드도 관광상품이니 그런 거겠지? 들어가서 1일 이용권을 샀어.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고 10유로 내외였던 거 같아. 이 카드에 아까 말했던 등산로 이용료도 포함되어있어. 카드 수입은 마을에 쓰인다고 해.
카드와 함께 지도와 기차 시간표를 받고 간단한 설명도 들을 수 있었어. 이때, 게임 NPC처럼 들을지 말지 선택할 수 있어. 초보자니까 당연히 들어야겠지. 지도와 기차 시간표 보는 법 같은 기초적인 것에서부터 등산로가 돌아가며 출입을 막아 놓기에 현재 어디가 막혔는지 말해주셨고, 추가적으로 한 군데는 지금 공사 중, 한 군데는 재해로 인해 갈 수 없다고 말해주셨어. 그리고 카드 뒤편에 이름란이 있어서 반드시 이름을 적으라고 하셨지. 아니면 유효하지 않다고. 아마 이미 사용된 건지 아닌지 구분하기 위해서 일거야. 일련번호가 있기는 하지만 사용 날짜가 표기되어있지 않았거든. 열차 안에서 승무원이 종종 확인하니까 이름 적인 카드를 보여주면 된다고 했어.
마지막으로 이해했냐고, 궁금한 거 물어보라고 하셨으나 머 간단한 사항이니 바로 그라찌에 하고 기차 타러 고고~ 관광객을 맞이하는 분이시라 그런지 친절하셨어. 내 앞에 일행에게도 똑같이 말했을 텐데 하루에 몇 번을 반복할까? 똑같은 말 하면 지루하겠다. 그래도 여행에 기대찬 눈빛을 보면 보람 있을 거야?
리오마조레 역
얼마 기다리지 않아 친퀘테레 완행열차가 도착했어. 기차 시간표와 지도를 확인, 다섯 마을은 가까운 거리라 각각 기차로 5분 거리이고 라 스페치아는 기차로 10분 거리야. 그동안 기차 시간표를 보면서 계획을 짰어. 계획대로라면 가장 멀리 있는 마을인 몬테로소 알마레부터 가서 점점 라 스페치아와 가까운 마을을 들리려고 했지. 마을끼리는 가깝지만 끝 마을에서 라 스페치아로 오려면 30분이 걸리니까 혹시나 여행하다 시간을 놓쳐 마지막에 시간이 촉박해지면 대응이 빠를 수 있도록 말이야.
하지만 기차를 타고 그런 생각은 접었어. 기차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서 가기도 힘들 정도였어. 친퀘테레 기차는 다섯 마을만을 왕복하는 기차가 아냐. 일반적으로 이 구간을 달리는 기차가 다섯 마을에 정차하는 것뿐였어. 따라서 친퀘테레를 여행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다른 행선지를 향하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던 거야. 결국 가장 가까운 마을인 리오마조레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어.
리오마조레
10분이었지만 바깥공기는 상큼했어. 출근 지하철도 아니고 무슨 상황이람. 내리는 사람도 제법 많았어. 그래도 타고 있는 사람들 비하면 거의 내리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였지.
사람들은 대부분 플랫폼을 건너 마을로 갔어. 그래서 해안 등산로가 봉쇄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어. 사람들을 따라가 타일로 장식된 터널을 지나 플랫폼 반대편으로 도착해서 마을로 들어갈 수 있었어. 시작하는 마을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다들 길에 서서 대화를 나누더라고. 머 딱히 내 눈에는 특별할 게 없었어. 이런 풍경 어디서 본 거 같았거든.
얼마 걷지 않아 너무 많은 사람들에 치여서 라 스페치아랑 가까우니 다른 곳 갔다 시간 남으면 다시 오지 하고 역으로 돌아갔어.
역에서 보는 풍경이 이뻐. 특히 역 아래, 아까 지나갔던 터널 아래로 강이 흘려. 그래서 터널을 지날 때 작게 울리는 물소리를 들을 수 있어. 역에서 목을 빼꼼히 내밀어 아래를 보면 물이 흘려 나오는 걸 볼 수 있었어. 시간표를 보고 맞춰서 역으로 가니 지하철 타듯이 딱딱 맞춰와서 좋았지.
마나롤라
이내 두 번째 마을 마나롤라에 도착했어. 이번에는 내리는 사람이 많지 않았어. 그래서 조용해서 마을을 올라가 봤어. 앞에 마을처럼 플랫폼을 건너 마을의 큰길을 따라가다 보니 작은 골목들이 나왔어. 인터넷이나 가이드 사진에서 본 풍경을 보려면 등산로로 가야 하지만 난 골목을 구경할 겸 마을을 내려다보고 싶어서 마냥 올라갔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어디서 봤던 느낌이 계속 드는 건 왜일까? 특히 좁은 골목으로 들어오자 그런 느낌들이 강하게 들었어.
마나롤라
어느덧 골목은 끝나고 산으로 오르는 꼬불꼬불 차도에 도착했지. 거기서는 마을과 바다가 함께 보였어. 좋은 풍경에 욕심이 나서 그 차도를 따라 더 오르다 한 곳에서 멈춰 섰어. 바다 바람이 불어오며, 시원하고 사람 소리 없어 조용해서 좋았어.
차가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게 절벽을 막아주는 보호대? 방지대? 그런 구조물이 우리나라에서 보듯이 있어서, 그곳에 걸터앉아 마을을 내려다보며 체리를 먹었지. 역시 이런 절경에는 체리(?)지.^^
예상과 달리 기차에서부터 많은 사람들 때문에 조금 당황했지만 이곳에서 앉아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졌어. 바로 밑에는 포도 팥이 잔뜩 있었어. 밭이랑 집들을 구경하는데 누군가 쳐다보는 느낌이 났어. 그 존재는 포도밭 사이 계단에 앉아 있는 고양이. 이런 내가 신기한 건지 체리를 먹고 싶은 건지 쳐다보더라고. 그런데 내가 보고 있으면 고개를 돌리며 딴청 하며 밀당하더라.
마나롤라
그곳에 앉아 한참 마을을 구경하다 체리를 반 이상 먹을 만큼 시간이 지났어. 얼른 일어나 고양이가 있는 계단을 통해 좁은 골목으로 마을을 가로질러갔어. 그리로 가면서 수줍어하는 고양이를 사진에 남겨두었지.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작은 광장이 있고, 그곳에서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어. 나도 끼고 싶을 만큼 재밌어 보였어. 생각해보니 여기는 이탈리아. 축구에 살고 죽는 남자들이기에 장난 아니겠지. 그리고 그 위에 벽화가 마음에 들었어. 수준급이야. 이탈리아 국기와 유로기가 있는 걸로 봐서는 동사무소 같은 관공서가 아닌가 싶어.
밀땅하는 고양이
벽화와 이탈리아 국기, 유로기
몬테로소 알마레
다시 기차를 타고 다음 역으로 고고! 도착한 곳은 베르나차가 아니라 몬테로소 알마레. 베르나차에서 정차하지 않는 기차였어. 기차에 탔던 사람들 대부분이 이곳에서 내렸어. 얼마 걷지 않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지. 앞의 마을들과 달리 큰 해변이 있어서 이곳에 물놀이를 왔던 거야. 하지만 막상 해변보다는 바위 근처에서 다이빙하거나 그 밑에서 잠수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거 같았어. 특이하게 해변 모래색이 노란색이기보다는 회색에 가까워. 주위 돌들이 까만색이기 때문이겠지.
몬테로소 알마레
해변에서 등산로가 보여서 베르나차로 걸어가기로 했어. 하지만 이내 다시 돌아오고 말았지. 길이 너무 좁은데 사람은 엄청 많아. 거기다 사람들이 종종 서서 사진을 찍기 때문에 강제 감상 타임을 가져야 했지. 이러다 시간 모자라겠다 싶어서 돌아갔어.
돌아가는 길에 남자아이들이 다이빙하며 놀고 있는 표정이 기억에 남아. 다들 개구쟁이처럼 장난기가 가득하고 즐거워 보였어. 그 표정을 그림으로 남기면 명화가 될 거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말이야.
몬테로소 알마레 해변
레반토
막상 역으로 돌아갔으나 베르나차로 가는 기차를 한참 기다려야 했어. 그래서 시간표에 있는 친퀘테레가 아닌 여섯 번째 마을인 레반토 (Levanto)로 가보기로 했어. 궁금하잖아. 이렇게 친퀘테레 카드면 기차로도 갈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곳에 가면 이탈리아 시골의 한적한 여유를 즐길 수 있을 거 같았어. 그래서 즉흥적으로 레반토로 가버렸어.
역시나 내리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 역을 나오자 한국 바닷가 시골 같았지만, 역 앞의 작은 다리를 지나니까 확실히 이탈리아 마을이란 걸 알 수 있었어. 산에 지어진 마을이 아니라 길은 반듯이 나와 있고 유럽의 예스러움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었어. 유럽인들에게는 이런 마을이 평범해 보일지 모르겠으나 유럽에, 이탈리아에 처음 오는 나에게는 이런 마을이 오히려 더 새로운걸.
정말 사람이 없었어. 상가 거리를 지나 큰 공원이 보였고, 그곳을 통해 큰 차도 밑으로 굴을 지나 해변으로 갈 수 있었어. 그곳에서는 아이들이 공놀이하고 있었고, 중고등학생 아이들은 스케이드 보드를 타고, 또래들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관광지가 아니라 정말 그냥 평범한 이탈리아 마을이었어. 다들 친퀘테레만 보고 이곳에는 오지 않는 거 같았어.
그래서 이 마을이 더 궁금해졌어. 그리고 조용히 산책하기 좋아서 거주지 쪽으로 가봤어. 아직 일할 시간이라 사람들은 없고 조용했지. 라 스페치아에서 봤듯이 5층 정도의 빌라들이 있었고, 다른 특이한 점은 없었어. 그리고 이탈리아는 국기를 테라스에 걸어놓은 집이 상당히 많았어. 엄마랑 자전거 타는 아이들, 손녀와 놀아주는 할아버지, 할머니 모습은 어느 나라에서든지 웃게 만드는 거 같아.
그렇게 조용한 마을에서 딴생각들을 하느라 사진을 찍지도 않고 이 거리를 저 거리를 마냥 걸었어. 이곳은 예정에 없는 곳이라 구글맵에 저장해놓지 않았지. 그래서 그냥 지레짐작으로 걸어갔어. 그러다 보니 레반토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됐어. 서둘러 베르나차로 가야 했지.
역에서 영어가 들리고 동양인들도 있었어. 아까 크고 하얀 호텔을 봤었는데 이곳에서 숙박하고 친퀘테레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제법 되는 듯했어. 마을도 그렇고 호텔도 이뻐서 친퀘테레 관광하고 여기서 여유를 즐기면 좋을 거 같았어.
레반토와 주민들
베르나차
네 번째 마을, 베르나차에 도착했어. 베르나차 역은 좀 특이해 보여. 경사가 있는 곳에 지어져서 밖에서 보면 먼가 플랫폼이 떠 있다 해야 하나? 비탈길에 역이 얹혀 있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 들어. 엄청난 인파에다 좁은 골목에서 번들 렌즈 각으로는 역을 도저히 사진을 찍을 수 없었어.
이 마을에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좁은 길을 지날 때마다 옆으로 걸어야 했지. 그래서 성당도 줄 서서 들어가야 했어. 들어간 성당은 작지만 아늑했어. 역시 유럽 성당만의 느낌. 유럽의 성당들은 엄청 시원해서 좋아. 더운 날 나에게 안식을 주거든. 주변의 돌로 만들어서 내부가 까만색이었어. 레반토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서 성당을 나와 빠른 걸음으로 마을의 높은 쪽으로 올라갔어.
베르나차
올라가다 이곳에서 느낀 익숙함의 이유를 깨달았어. 부산의 감천문화마을을 아니? 바닷가 산에 알록달록한 집들이 빼곡히 있는 마을 그리고 어린 왕자와 여우가 있는 곳 말이야. 이 당시에는 감천마을을 가 본 적은 없었지만 그 근처에 친척집이 있어서 어릴 적부터 다니곤 했어. 감천마을처럼 알록달록 하지는 않아도 다양한 색 바랜 벽들의 집이 있고 부산 바다와 영도가 보이는 그곳. 상당히 비슷해.
유럽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감천마을을 가봤는데 친퀘테레가 기억나더라. 그리고 나랑 같은 구조물에 앉아있는 어린 왕자 모습도 비슷했어. 체리만 없을 뿐.^^ 그래서 친퀘테레가 몇 백 년 앞서 만들어진 곳이지만 나에게는 익숙함이 묻어나는 곳이었어.
베르나차
하지만 이제 돌아가고 싶었어. 이곳의 사람들의 큰 말소리는 어느 정도는 적응이 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체취와 바다향이 섞인 스멜은 음....... 어서 돌아가야 했지. 코르닐리아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어. 시간도 여유가 없었고 생각보다 많은 인파가 작은 골목길에 있으니 밀도가 상당했기에 그만큼 내 체력은 급격히 떨어졌어. 그리고 코르닐리아 역에서 상당한 개수의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해서, 떨어진 체력으로 시간 맞춰 관광하기에는 어려울 거 같았어.
베르나차 역에서 본 마을
라 스페치아에서 로마로
라 스페치아에 도착해서 얼른 호텔로 돌아가 짐을 받고는 다시 역으로 향했어. 친퀘테레에 비하면 확실히 크다는 느낌이 들었어. 길도 건물도 크고 정돈된 깔끔한 모습이야. 이제 역에서 기차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어.
그런데 역무원이 와서 말을 걸었어. 그래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하자 위를 가리켰어. 위에 있는 모니터는 내가 탈 기차가 연착된다는 걸 표시하고 있었어. 역무원에게 얼마나 연착되냐고 물었더니 대답은 'I don't know'. 그럼 누가 아니? 이탈리아에서 흔하다는 도착시간을 모르는 연착, 어이없었어.
못 갔던 코르닐리아로 가고 싶었어. 하지만 짐을 맡길 곳이 없고 언제 기차가 올지 모르는 걸. 플랫폼의 벤치에 앉아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멍 때렸어. 기약이 없다는 것 말고는 괜찮았어. 빨리 도착 시간만이라도 알려줬으면 했어. 그렇게 계속 확인하다 드디어 연착 시간이 떴어. 무려 1시간 35분, 난 우리나라에서 이런 걸 겪어본 적이 없어. 안 그래도 완행이라 4시간을 가서 도착하면 한밤중. 그곳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데 어쩌나 싶었지.
연착 시간
짐을 끌고 다시 호텔에 맞기고 찾아오고 하면 30분 가까이 지날 거 같아서 코르닐리아는 못 가고 짐을 끌고 역 가까이 마을 구경이나 했어. 이곳을 멀리 뜰 수 없는 이유는 연착 시간도 확실한 게 아니라는 것. 도착 시간에서 1시간 35분 뒤인지 지금부터 1시간 35분 뒤인지도 모르겠어. 역무원한테 물어봐도 나도 모른다는 제스처만 취할 뿐이었지. 그냥 여기 묶여 있어야 했어.
이 완행 기차를 타는 사람이 드문지 기다리는 사람도 적었어. 하지만 많은 열차들이 지나가도 타지 않는 사람을 보면 이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일 거라고 짐작했지. 그중에 한 여성분이 큰 백팩을 나에게 맡겼어. 한국이라면 그러겠지 싶었지만 여기는 남의 짐 들고 가는 일이 흔한 곳인 걸. 이 짐들을 팔면 어쩌려고? 그분은 플랫폼을 지하로 건너지 않고 철길을 그냥 뛰어 넘어가더니 역으로 들어갔어. 몇 분 있다 다시 돌아와 땡스 하며 대화를 나누었지만 안타깝게 둘 다 영어가 짧아. 더욱이 난 처음 보는 사람은 낯가리는 걸. 특히 이쁜 여자분에게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기차가 도착했고 그분은 나에게 다시 땡스 하고는 기차를 탔어.
나랑 같은 기차를 기다리는 게 아니었어. 낯설어도 플랫폼에 혼자 있는 건 좀 쓸쓸했는데 어느덧 혼자 남았어. 해지기 전에 도착하기는 글렀으니 해지기 전에 타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싶었어. 휴대폰을 꺼내 영상도 보고 지나가는 기차, 사람 구경을 하다 내가 타야 하는 기차보다 2시간 늦게 출발하는 기차들을 보내고서 기다리던 기차가 도착했어.
라 스페치아
기차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몇 개의 역이 지나 한 가족이 탔어. 내 자리는 당연히 짐 놓는 곳 앞자리라 맞은편에는 좌석이 없는 곳이었어. 노을이 질 무렵, 그곳에 노을과 비슷한 머리색을 가진 어린 남매가 뛰어와 둘이서 기차 창밖을 구경하는 모습이 귀여웠어. 오빠를 쫓아다니는 게 어릴 적 여동생이랑 비슷해 보여서 어린 시절이 떠올랐어. 들고 온 캐리어도 동생 꺼, 그 캐리어에 짐을 싸준 것도 동생이라 캐리어를 보니 더 생각났어. 그렇게 그들처럼 창밖 풍경을 보며 옛 기억에 잠겼어.
그러다 해가 완전히 지고 밤이 되었어. 기차 안에서 다행히 wifi가 되어서 카톡이 왔어. 만날 형이 도착해서 게하에 들어왔다고. 난 연착해서 늦는다고 말해줬고, 형은 게하 가까운 역 출구에서 기다린다고 했어. 아주 깜깜한 밤이 되어서 드디어 로마 테르미니(떼르미르)역에 도착했어.
라 스페치아
로마 역은 역시나 엄청 크더라. 한참을 걸어가 플랫폼을 나갈 수 있었어. 역에 쇼핑몰이 있어서 그쪽으로 가야 약속했던 출구로 나갈 수 있었어. 밤이기에 당연히 쇼핑몰은 영업이 끝난 상태여서 너무나 어두웠지. 그리고 걸어가는 사람은 나 하나. 마네킹들이 좀 무섭더라. 출구를 찾아 나오니 만나기로 한 형이 서 있었어. 몇 달 만에 만나 반가웠지.
그런데 여기서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어. 예약했던 게하가 오버부킹이 되었다나. 그래서 게하 사장이 다른 게하로 옮겨줬데. 그래서 예약했던 곳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갔어. 가서 인사를 하고 짐을 푸는데 너무 피곤하더라. 예상외로 좋았던 건 6인실을 예약했지만 게하를 옮기는 바람에 3인실이 되었다는 것.
정말 오늘은 계획대로 된 거라고는 친퀘테레를 구경하고 로마에 왔다는 것뿐. 친퀘테레에서의 여행 경로, 로마행 기차, 로마에서의 게하. 뭐 하나 계획대로 된 게 없구만 싶어서 조금 웃음이 났어. 라 스페치아에서 멀뚱히 시간이 보낸 게 다소 아깝긴 하지만 그래도 다른 건 괜찮았거나 더 좋았던 거 같아. 어차피 자세한 계획은 세우지도 않은 편인 데다가 세워도 그때그때 수정해서 하는 스타일이니까 상관없었어.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불쑥불쑥 일어나는 게 여행이니까.
형과 오랜만에 만나 열흘간의 여행 이야기를 했어. 그리고 근 한 달간 형의 계획에 얹혀가는 여행을 기대하고 긴 하루를 마무리하며 잠들었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게 인생이고 여행이라더니 신기하네요. 그래도 원하는 목적을 이루고 더 좋은 것을 얻었으니 좋은 변화겠지요.
여행을 시작할 때 사진보다는 눈에, 머리에, 가슴에 담아오자고 마음먹었던 기억이 나요. 글을 쓰다 보니 사진을 정말 얼마 찍지 않았다는 느껴졌어요. 사진이 더 있었으면 독자분들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하지만 상상할 수 있다는 게 글의 장점이잖아요. 어서 코로나가 끝나면 이곳도 들려보기를 추천해봅니다. 그리고 폴라로이드 형태의 사진 말고는 보정하지 않은 사진을 올렸어요. 인터넷에 나오는 사진을 보고 여행을 하신 분들 중에 다소 실망하시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본 그대로도 충분한 매력이 있어 원본 사진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