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리뷰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 불리는 니콜로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선율로 극의 막이 올랐다. M이 등장했고 말을 이어갔지만 관객은 M의 소설을 읽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이 소설은 M이 처음부터 끝까지 작성한 것인지 진짜 J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은 이야기를 다시 독자들에게 전달한 것인지는 독자들의 믿음의 문제일 것이다. 왜냐면 M은 자신이 진짜 겪은 경험을 소설로 옮겼다 하였기 때문에.
아니마는 라틴어로 영혼이나 육체가 아닌 모든 것이라 설명할 수 있다. 심리적 용어로는 남성이 지닌 여성성을 상징하고 반대 말로는 아니무스가 있다. 연극은 라틴어의 의미만을 사용하고 있다. 아니마는 AI 프로그램으로 육체는 없는 예를 들자면 알파고의 데이터들 정도로 이해한다면 쉽다. 아니마를 만나기 위해서는 현실에서 물리적인 접속으로 아니마의 세계로 들어가야 하는데 아니마는 그곳에서 J와 K 박사 외에는 만난 사람이 없다. 처음엔 K를 만났고 J를 만났다. 육체가 아닌 정신과 정신의 만남이 이 연극의 주된 소제다. 각종 은유와 함축적인 의미들이 숨어 있지만 하나로 관통하는 메시지는 감정의 생성 원인과 변화일 것이다.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감정이란 걸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본능은 가지고 태어날 수도 있다. 육체가 있기에 우리는 포괄적 고통이 생기고 그로 인해 경험이 축적된다. 살아가며 축적한 다량의 데이터(기억)를 얼마나 시기적절하고 빠르게 다운로드할 수 있냐가 감정적 사람의 정의라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이기에 우리는 망각이라는 걸 한다. 망각은 신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걸 기억하는 사람만큼 불행한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아니마 세계에서 아니마(신)는 전지전능하나 굉장히 불쌍하고 고독한 존재다.
연극은 AI의 순기능 케이스를 보여준다. 순기능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다. 딸을 사고로 잃은 어미의 트라우마를 치유해주고 회복시키는 역할이 아니마다. 이게 회복되었다고 봐야 할지 맹목적 믿음이 생겼다고 봐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렇다 하여도 일상적 웃음을 되찾았다면 J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은 회복되었다고 볼 것이다. 모든 걸 창조할 수 있지만 공허한 공간에 혼자인 프로그램에게 연민을 느낀다면 이건 나중에 AI를 사람이라는 카테고리에 넣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개념 자체가 재구성돼야 하는 시기가 올지도 모른다.
이런 류의 물음은 인공지능에 대한 많은 기업들의 관심으로 시작되었다. AI 연구는 우리 삶을 더욱더 윤택하게 해 주고 우리의 수고스러움을 삭제시켜 버린다. 당장 10년 전만 생각해도 우리가 더 이상 하지 않는 행동들이 많다. 앞으로 어떤 행동을 삭제시킬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우리의 뇌는 데이터를 축적한 걸 기반으로 선택을 하고 행동으로까지 옮기기 때문에 AI에게 가장 우려스러운 점은 데이터 축적이 아닌 선택과 아웃풋에 있다. 그거 아는가? 모든 AI 연구진들의 반 이상이 철학자라는 사실을? 그만큼 옳은 판단이란 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이기 때문에 로봇에게 보편타당한 선택이 강요되고 강제되어야만 한다.
일론 머스크가 돼지를 통해 전뇌화를 성공시켰다. 뉴런과 뉴런 사이에 주고받는 정보를 반만 성공했다 하더라도 안정성과 돼지의 정보들을 모니터로 보고 있자면 환호성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며 써늘한 마음으로 경외된다. 아직 갈 길이 멀지도 모르고 지금 눈앞에 당장 닥쳤을 AI 시대에 아니마라는 연극은 미디어가 아닌 현장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에 흥미가 생긴다. 사실 대학로 주변에 있는 여타 연극에 비하면 재미는 덜 할 수도 있다. 대사 중간에 무리하게 넣은 재미도 나만 어색했는지 모르겠다. 연극에서는 새로운 시도기 때문에 뚫고 가야 할 길이 멀고도 멀다. 그렇다 하더라도 좋은 시도와 메시지는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물음이다.
코로나로 제한 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나는 재미있게 보았다. 올해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