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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진 Jan 12. 2021

성여

다큐멘터리 리뷰


성여


뭐든 잘 흘려보내는 내가 살면서 딱 한번 기절이란 걸 해본 적이 있다. 누구에게 둔탁한 흉기로 정신을 잃어버린 그런 경험은 아니다. 때로는 아니 어쩌면 거의 모든 케이스가 외상보다는 내상이 치명적인 대미지를 준다. 원인은 바로 억울함 때문이었다. 이게 정말 신기한 게 너무 억울해서 피가 거꾸로 솟을 정도로 내가 어찌 말 한마디 풀 수조차 없다고 판단되는 순간 정신과 육체를 이어주는 회로가 진짜 사무라이들이 볏짚을 배듯이 잘려나가고 눈앞에 보이는 형체가 화이트버네팅 지는 것 저럼 똑딱! 사라진다. 나에게는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면 나는 정말 잘 흘려보내는 사람이라서.


부정부패와 폭언 폭행이 만연했던 최전방 부대에서 있었다. 특전사나 해병대가 보기엔 그까이거가 될 수도 있고 상대적으로 육체가 편한 보직이 본다면 와 우리 부대는 그나마 다행이다 할 수 있다. 독립부대라 독립된 시설 같은 게 꽤 많았는데 그중 막사보다 한 중턱 위에 돌계단을 올라가면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가려져 잇는 체력단련실이 있다. 줄여서 체단실. 보통 하루에 한 번 적게는 한 달에 한 번은 체단실로 집합을 했다. 운동을 하기 위해 쓰이는 여러 도구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바벨도 있고 아령도 있다. 체력단련을 위해 쓰이는 장비들은 집합 때면 고스란히 흉기가 되었고 우리는 얼토당토않는 이유로 혼이 나야만 했다. 운전병이기에 정신이 해이해지면 사고로 이루어지고 그 사고는 인명피해를 뜻하기에 항상 정신 차리라는 명목 하에 선대부터 내려오던 어떤 인수인계 중 하나였던 것이다. 아주 명백히 틀린 말도 아니고 어느 정도는 사람에 따라 필요성도 있다고 생각되어 그들이 당했던 보복심리에 열심히 어울려 주었다. 이런 수모도 거뜬하게 받아 냈던 내가 고작 누나에게 몇 시간 꾸중 좀 들었다고 기절했다면 나에겐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생각을 되짚어 봐도 이건 억울함 때문이라고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나는 각 잡은 자세로 침대 위에서 내가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추궁과 심한 비약을 들어야만 했다. 화장실도 갈 수 없었고, 일관된 표정을 짓고 있어야 했으며, 대답은 오직 '네 잘못했습니다.'로 통일해야만 했다. 그래야 이 고통스러운 시간이 조금이라도 단축될 것 같은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나의 항변은 불같이 화가 난 누나에게 닿기도 전에 한 줌에 재가 되었다. 논리나 이성이 성립 되지 않는 상태라 판단되었고 그저 하늘을 집어삼킬 듯 뿜어내는 활화산 앞에 바짝 엎드려 비가 내리기를 기도하는 무력한 난민이 된 기분이었다. 악마든 신이든 애용이든 뭐든 간에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면 그 어떤 더러운 손이라도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억울함이란 위험한 상태라 생각했다. 신기한 건 내가 뭐 때문에 억울했는지 이제는 기억이 나지 않고 그냥 억울했다는 사실만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영원히 나에게만. 


특히 선량하게 살았다 자부하는 자들에게는 억울함은 더욱더 견디기 힘들다.


여기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억울함을 낙망하지 않고 30년 세월을 버틴 사람이 있다. 윤성여씨다. 성여씨는 30년 전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8차 용의자로 20년간의 수감생활과 10년간의 손가락질 생활을 얼마 전 청산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윤성여씨는 출소하고 나서도 어디도 나갈 수 없다 했다. 나가면 또 어떤 일에 휘말릴까 봐. 이 말이 나를 너무 아프게 했다. 20년 전과 지금은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라 카드 쓰는데만 3년이 걸렸고 메뉴판이란 걸 처음 봤다고 했다. 그의 시간은 30년 전 그대로 멈춰있다가 얼마 전 드디어 초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의외로 한없이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이었다. 밝은 척하는 게 아닌 고통의 밑바닥까지 가본 사람만의 초연함 그런 걸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걸 보면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준다는 말은 다른 의미에서 맞는 말일 수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과거에 연연하며 살 수밖에 없는데 그는 애써 지나간 세월을 악착같이 잡고 있지는 않다. 그저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오늘을 웃을 뿐이다. 보통사람은 하지 못할 일이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다시는 억울한 사람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가 살아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가족조차도 외면해 버린 상황에서 돌아가신 엄마의 대한 떳떳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모두가 손가락질할 때 한 사람만은 오직 그를 신뢰하고 믿어주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종교적인 믿음 덕분이었을까? 모르겠다. 사람이 살고 죽는 데에는 이유가 없기도 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절대악도 없고 절대선 또한 없다. 다만 상식이란 게 통용되는 세상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상식의 개념도 개인마다 다를라나....


                                                                                                                       

https://www.youtube.com/watch?v=QV9TdWdd6v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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