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동진 Jul 05. 2020

옥에티

차이나 드림을 품었던 젊은 디자이너_ EBS / 브런치


옥에티


가장 첫 실패는 대학 입시였다. 공부를 끔찍이 싫어하여 재수는 생각하지 않았다. 미성년에서 탈출하면 난 정말 망나니처럼 살기로 마음먹었다. 인정받는 망나니로 사느냐 죄인 된 망나니로 사느냐는 입시에 달려 있었다. 무엇이 날 그리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참 막연하게 잘 될 거라는 믿음 같은 게 있다. 낙천을 넘어 낙관에 가까운 그 성향은 지금도 날 괴롭히는 패시브중에 하나다. 그래서 상향지원을 했나 보다. 불합격했다는 메아리를 몇 번 듣고 나니 정신이 들었다. 추가모집으로 들어간 지방에 국공립학교에 입학 날. 나는 인생에 첫 좌절이라는 걸 느꼈다. 모든 게 낯설었고 사람도 장소도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꽃을 들고 있는 부모님께 어떤 표정을 지어 드려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망만 다녔던 것 같다. 그 당시 난 정말 인정이란 걸 할 줄 모르는 아이였다. 다시 공부는 하기 싫고 그렇다고 원하지 않는 장소에서 공부하고 싶지도 않았으니 그렇담 인정하고 학교라도 잘 다녔어야 했는데 다른 길을 찾았고 그 길로 도망갔다. 1년 정말 시원하게 놀고 군대를 다녀와 자퇴를 했다.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고하고 자퇴 후 패션전문대학교를 들어 갔다. 일차 적으로 옷을 좋아했고 두 번째로 겉보기에 괜찮지 않나 라고 생각했다. 지나칠 정도로 남에 시선을 신경 쓰는 시기였다. 있어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도 하지 말라고 하는 걸 내 의지로 했으니 책임지고 싶었다. 부모님에게 다시는 그런 표정 지어드리고 싶지 않았다. 사람이 살기 위한 필수 3요소 의. 식. 주 중에 의 하나 아닌가. 너무 불손한 마음으로 시작한 공부라 그런지 생각한 것보다 너무 어려웠다. 그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분야였고 대충 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오는 어려움이었다. 옷을 좋아하는 마음이 크니 어렵더라도 유지력이 말도 못 하게 올라갔다. 여기서 큰 깨닮음을 얻었다. 좋아하는 걸 하자. 학교생활을 하며 모델일도 하고 성적도 여차여차 잘 받았다. 거기다 운이 정말 좋게 졸업과 동시에 중국 브랜드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이십 대의 중반 정말 좋았다. 그때만 해도 차이나 붐이 세계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키는 시기였고 월급이 대기업 직원들보다 많았으니 얼마나 들떴겠는가. 동기들의 부러운 시선, 노골적으로 친해지려고 들이대는 사람들, 나를 팔아 이손실을 챙기는 친구들 자랑스러워하시는 부모님 아마 이 시기에 관계의 대한 내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회의적으로. 내 뒤에 쓰여있는 이 조건들이 사라지는 순간 과연 내 옆에 몇 명의 사람이 남아 있을까. 


차이나 드림을 품고 첫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순간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멋진 중국인 친구들을 사귀고 여행을 좋아하니 주말이 되면 근교든 좀 멀리 비행기를 타고 가든 멋진 곳에 가서 인증샷도 남겨야지. 시장조사 차원에서 멋지게 차려 입고 대형 백화점에 가서 쇼핑도 하는 거야. 더 많은 문화를 접하니까 지금보다 생각의 폭이 더 열린 사람이 될 거야. 업종에 특성에서라도 세련된 사람이 많겠지.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큰 법이라더니. 광저우에서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정말 낙후된 곳이 많았고 대형 기업이라고 해도 기업문화가 부족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한국에 있던 브랜드를 삭제하고 중국문화에 맞는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어야 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밤낮없이 바빴다. 처음에는 버티다 보면 분명 내가 원했던 삶을 살 수 있을 거야 마음을 다 잡았지만 일 년이 가도록 나아지지 않았다. 그 당시 중국인들 월급이 우리나라 돈으로 30만 원이니 나와의 월급 차이는 천지 차이였다. 기업가들은 멍청하지 않다. 그만큼 일을 해주기를 원했고 그게 당연했다. 나는 지금 중국에 있으니 말이다. 체력전이 되었고 주말은 고사하고 일을 했다. 적은 인원으로 많은 일들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일 년이 되던 해 성과를 내지 못하니 우리 팀은 한순간에 공중분해되었다. 그렇게 중국에 오기 전에 품었던 꿈들도 말이다. 정말 노력했는데 건강도 챙겨가지 못할 정도로 하고 싶은 것들 다 뒷전에 두고 노력했는데 마음과는 다르게 현실은 냉담했다. 돌아갈 날이 확정되고 나니 모든 게 싫어졌다. 빨갛고 노란 대형 간판들도 싫었고 시끄러운 중국어도 천박하게 느껴졌고 깨끗하지 않은 그들도 너무 다 싫어졌다. 광저우의 우기가 끝나갈 무렵 그대로 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 한 달 정말 시체처럼 살았던 것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집에만 있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두 번째 실패가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아빠를 많이 이해하기 시작한 것 같다. 인생은 정말 내 의지와는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을 아빠의 회사 모습은 어땠을까 말도 못 하게 힘드셨겠지. 회사에서 고졸 출신으로 부장을 다셨을 때 많은 유혹을 뿌리치고 지켜낸 건 무엇이었을까. 신만이 아는 아빠만의 사건들도 많겠지. 술만 드시면 승진 첫날 화환으로 온방이 꽃밭이었다며 고졸 출신에게 희망의 상징이었다며 자랑스럽게 말하는 걸 왜 귀찮게 들었을까. 회사에서는 그렇게 위엄 있으면서 집만 들어오면 가장 작은 존재가 되니 이 참 얼마나 불쌍한 인생인가. 시골에서 10만 원 들고 와서 지금 우리 가정을 이루셨으니 정말 치열하게 사셨구나. 그러니 자식들에게 대하는 방식이 서툴 수밖에 배운 적 없으니 어느새 다 커버린 자식들에게 어떻게 말과 행동을 건네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정말 모르는 것이다. 왜 그때 알아 드리지 못했을까.


돈 만지는 일을 하셨던 아빠는 항상 007 가방을 들고 다니셨다. 한창 회사에 다니던 시절에는 그 가방에 항상 신권 화폐가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그 가방은 아빠의 자신감이었다. 한 회사에 20년 넘게 근무하시고 퇴직하셨지만 지금도 일을 다니신다. 건강이 좋지 못함에도 다니시는 이유를 지금의 나로서는 절대 알지 못한다. 그런 아빠가 중국에서 들어와 빈둥거리던 다 큰 아들이 얼마나 한심해 보이셨을까. 나중에 이야기했지만 그런 마음 절대 가지지 않았다고 너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몰라 네가 스스로 일어나 주기만을 기다렸다고 그렇지 않으면 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하셨다. 마치 절벽에서 자식을 떨어 뜨리고 그걸 지켜보는 어미새의 마음으로. 


굳게 닫힌 내 방 문 너머로 식구들이 출근 준비로 전쟁을 치르고 있으면 그 현장 소리가 나를 끝없이 괴롭힌다. 그러다 온 집이 쥐 죽은 듯 조용해지면 거실로 기어 나와 그 참혹한 현장을 하나 둘 정리하기 시작한다. 주섬주섬 쓰임세에 맞는 사물들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고 체 다 먹지도 못한 잔반을 처리한다. 버려진 옷가지들을 세탁기에 넣고 청소기를 돌린다. 아빠방을 들어가니 잘 보이는 구석에 007 가방이 있다. 다른 곳은 몰라도 007 가방만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외관을 유지하고 있다. 호기심에 가방을 열어보니 더 이상 빼곡했던 현금은 없다. 결혼할 때 만든 한지로 된 청첩장 더미와 수첩 그리고 카메라 외 잡동사니들이 있다. 수첩 안을 열어보니 시와 문장들이 빼곡하다. 특전사 출신이었던 아빠의 이미지. 나에게는 인간미 없는 사람이다. 연도를 보니 전부 내가 태어나기 전이다. 그 가방 안에는 내가 모르는 아빠의 모습들이 너무 많았다. 사진과 글들을 보고 있자니 우리 아빠 참 감성적인 사람이구나. 내가 오해를 하고 있었구나. 사람의 인생이란 정말이지 잔혹하게도 나 이외에는 그 아무도 알아줄 수 없는 거구나. 실패나 성공이나 진정한 의미는 결국 나만이 누리고 아파 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게 편해졌다. 너무 체면을 차리고 살 필요는 없구나. 사람이 사회 속에서 산다는 것은 분명 체면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밸런스는 내가 마음 먹이에 따라서 충분히 편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직장을 다니고 여러 관계를 가지며 살아가지만 큰 요동 없이 지내고 있다. 사회생활에서 내가 배운 것은 시선을 조금 바꾸면 이 세상에 의미 없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다만 내가 원하는 의미만 있을 뿐이다. 그건 정말 불행한 인생에 지름길이다.


내가 되고자 했던 모습을 서른 초반에 포기하는 것도 속단일 수 있지만 나는 편해 지려한다. 고뇌의 시간이 길고 깊었던 만큼 내가 나를 지키는 방법도 확실해졌다. 사람은 속에서부터 썩어 밖으로 증상이 보인다면 이미 손 쓸 수 없을 지경일 경우가 많다. 그러니 마음 관리가 정말 중요하다. 마음관리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은 누구의 탓도 하지 않고 오로지 내 탓으로 돌리며 인정하면 된다. 사람 죽지 못할 이유가 남아있다면 어떻게든 살아간다. 내가 탓 했 던 모든 요소들은 사실 내가 원했던 의미에서 온 불합리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그들인 모습으로 있었을 뿐인데 내가 멋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그 모습에서 멀어지자 힘들어했던 것이다. 사실 옥에 티는 나였는데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