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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진 Aug 24. 2020

캄다운


캄다운


누나와 샌프란시스코 도심 한복판에서 쌍욕을 주고받으며 싸운 적이 있다. 전쟁의 서막은 이러했다. 어떠한 목적지까지 도달하는 방식이 너무나도 달랐다. 나는 여행을 자주 다녔던 터라 대충 지도를 보고 이렇게 저렇게 가면 되겠다 싶어 누나에게 권했다. 누나는 샌프에 오기 전에 미리 모든 루트와 시간 동선까지 블로그와 책 그밖에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자기 기준에서는 완벽하게 준비를 해 왔던 터라 내가 권한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나는 비효율적인걸 극도로 싫어했고 세계여행의 마지막 여행지여서 더욱더 지쳐있던 터라 평소 같았으면 뭐든 양보했겠지만 그러지 못했고 짜증을 냈다. 순간 누나의 공기가 바뀌더니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누나는 자기감정에 솔직한 사람이고 당장 그 감정을 해소하지 못하면 하루가 힘든 사람이었다. 본인 플러스 모든 사람들이. 덕분에 나는 주변의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대응하는 테크닉이 꽤 대단하다고 자부한다. 이 테크닉은 누나가 하사한 스트레스의 산물인 셈이다. 내 인생을 통틀어 받은 스트레스의 팔할은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최전방 부대에서 근무하면서도 각종 부당한 일과 폭언, 정신교육(똥 군기)에도 버텨 냈던 사람인데 누나의 참 교육에 침대에서 그대로 기절한 사건도 있었다. 참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같은 가정에서 같은 부모의 교육을 받으며 꽤 같은 시간 속에서 살았는데 우리는 정반대의 사람이 되었다. 누나의 모든 말들이 나는 스트레스였고 피하고 싶었지만 우린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묶여 있다. 누가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했던가 이거 정말 위험한 발언이다. 그분에게 우리 누나를 한 달만 빌려 주고 싶다. 나는 모든 일에 원인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고 그 원인이 충분하게 설명이 된다면 납득하고 모든 처사를 달게 받는 사람이지만 누나와의 에피소드들은 깡그리 통하지 않았다. 누나의 입장에서는 모든 원인과 설명을 충분히 했다고 믿고 있지만.


그때 당시에는 여러 컨디션이 좋지 못해 감정적으로 대응했지만 지나고 생각해 보니 모든 원인은 서로가 서로를 정의 내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누나와 나는 여섯 살 터울이다. 누나는 언제나 나를 손아래 사람으로 생각하고 대화하고 행동한다. 누나에게 나는 케어해야 하는 대상이었고 나는 누나를 여행력? 이 부족한 사람으로 정의 내리고 있었다. 두려움이 많은 누나는 자신이 그려지지 않는 루트로 가면 위험하다 생각했다. 장녀인 누나는 책임감이 무거워 이런 상황에서 항상 완벽하게 안전한 곳을 택하고 싶었던 거였고 나는 그런 부분에서 안일했던 것이다. 그날 하루를 망치고 숙소에 들어와 동생과 누나가 아닌 사람대 사람으로 대화를 하니 갈등이 해소되었다. 세상의 좋고 나쁨은 내 안에 있듯 누나는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지 나쁜 사람은 아니다. 나는 정말이지 누나를 사랑한다. 나에게 고통을 준만큼...


세상의 모든 갈등도 이런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도 무수히 많은 갈등들이 존재한다. 세대 간의 갈등, 성별 간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 정치적 이념 대립 , 종교적 신념의 차이 그밖에 그 안에서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갈등이 많다. 갈등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찰이 없는 관계는 가고 있는 방향이 낭떠러지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과정 속에 성장했고 지금의 편의 로운 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렇듯 난 갈등을 할 수 있는 경우가 생긴다면 일부로라도 해보려는 사람이다. 특히 사랑이 기본 베이스인 관계에서는 분명 더 필요하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경우를 많이 봐왔다. 당사자들끼리는 아예 인지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있고 알고서도 침묵으로 묵살하는 경우도 있다. 저 사람은 원래 그래.

크리스천이니까, 페미니스트니까, 좌파니까, 전라도니까, 흑인이니까, 꼰대니까, 단언컨대 원래부터 그런 사람은 없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두려워하는 부류의 사람이 이런 사람들이다. 타인을 완벽히 이해했다고 믿는 사람들. 타인의 오감으로 그 사람의 인생을 살아 본 적 없다면 절대 알 수 없는 것이다. 자만하지 말자. 수시로 자기 객관화를 하며 거울 앞에 서는 연습이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여기저기 모든 갈등들이 가열되어 가고 있다. 정말이지 진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다르다. 다시 말해 다르다는 말은 불공평한 부분은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말이다. 또 세상이 왜 꼭 모든 게 평등해야 하는 가하는 반문도 할 수 있다. 뭐든 내가 속한 집단과 영역 안에서 문제가 되지 않더라도 다른 영역에서는 문제가 야기될 수 있기 때문에 소리를 질러야 한다. 나 여기 아프다고 알리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감정적 호소는 샌프에서 보인 추한 모습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소신을 이야기하고 생각하고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노력이 기반이 된 서로의 이야기를 진정한 상태로 들어 본다면 이해 하지 못 할 것도 없다.


물론 모든 갈등이 영화 같이 모두가 만족하는 환상적인 결과로만 도출되지는 않는다. 누나와 지금 내가 싸우지 않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수시로 서로 스트레스를 주고받고 그럭저럭 아름답지 않은 모습으로 살고 있다. 그 여행은 누나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같이 간 여행이 되었지만 항상 당하고 참기만 하던 내가 처음으로 소리친 날이라 누나도 그 이후로 조금은 인식을 하게 되었다. 영화 같지 않으면 어떠한가 영영 판타지를 꿈꾸며 사는 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다. 분명 나 또한 누군가에게는 그러한 존재일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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