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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진 Aug 13. 2017

쓰기 위해 쓰지 않는다.

브런치 × 어라운드







쓰기 위해 쓰지 않는다.



 여름에 한 중턱에 제주도에 내려왔다. 쓰기 위해 내려온 제주도인데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아이러니함을 의아해하며 하루하루 잔잔한 파도 같은 제주 라이프를 즐기고 있다. 제주공항에 내려 숙소로 가는 길. 먼가 그리운 바람이 계속 스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숙소에 가는 많지 않은 버스를 꽤 긴 시간 기다린 끝에 드디어 올라탔다. 흔들의자에 앉아 제주의 풍경을 빨리 감기로 감상하며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 비틀비틀 내려왔다. 정류장 건너편에 있는 편의점 골목으로 들어가서 길 따라가다 보니 흰색에 깔끔한 숙소가 보였다. 높이도 제각각인 돌담을 손으로 쓸면서 자연이 곱게도 빗어 놓은 화강암의 표피를 느끼며 걸었다. 도시가스가 아직 들어오지 않아 집집마다 가스통을 지붕 위에 올려 쓰고 있었고, 가스통이 있는 지붕 위로는 전깃줄이 넓은 물결모양으로 씌어져 있었다. 지금은 해와 달이 근무교대를 하는 시간. 정겨운 제주 시골 풍경에서 그리운 바람의 정체를 '아~'하며 짧은 한숨으로 밝혀 내는 순간이었다.



 숙박객을 위해 아침에 커피를 내려놓는데, 항상 큰 유리잔 바닥에 남아있는 커피를 보면 아쉬움이 남는다. 찌꺼기가 돌아 쓴맛이 강해 인기가 별로인가 보다. 남은 커피는 버려진다. 오늘도 어김없이 버려진 커피를 몽땅 얼음이 가득 찬 유리잔에 따르고 밖으로 나와 회색 비치의자에 눕다시피 앉았다. 나는 커피의 최하층을 가장 좋아한다. 커피의 불순물이 모여 식감도 생기고 커피의 진한 쓴맛이 풍미 있게 남아 있다. 입안 한 가득 넣고는 바로 삼키지 않고 마치 와인 마시듯 입안 모든 표면에 정성스레 고루 바르고는(모르는 사람이 보면 조금 더러워 보일 수도) 이때다 싶을 때 한 번에 삼켜 버리는 버릇이 있다. 칙칙푹푹 찌는 제주의 여름. 막이 찢어질라 구애하는 수컷 매미들의 끝없는 노래의 클라이맥스에 커피 한입을 머금고 잔을 내려놓았다. 파도소리가 한번 들리면 따뜻한 바람이 한번 불었다. 유리 글라스는 제주의 따듯한 파도바람을 잡아 이슬방울을 만들어 내렸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고개를 저쳤다. 불규칙하게 서있는 전봇대는 하늘에 바다를 걸어 놓았다.



 어릴 적에 많은 전봇대 중 하나를 잡아 숨바꼭질을 하거나 맨홀 뚜껑 정가운데 빈 깡통을 올려놓고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차고 놀았었다. 여름과 가을의 사잇길에는 동네 친구들과 구멍 송송 뚫린 형광색 캡 모자를 푹 눌러쓰고 어깨에는 채집통을, 다른 쪽 어깨에는 잠자리체를 언고, 곳 잘 뒷산에 노래 부르며 올라갔었는데. 내 키에 3배쯤은 되어 보이는 잠자리체를 이리저리 잘도 휘둘렀다. 휙! 하고 체를 휘둘러 땅에 패대기를 쳐놓고는 혹시라도 도망갈까 체와 봉을 연결하는 부분의 철사가 끊어지도록 힘을 주었다. 잡은 잠자리는 날지 못할 때까지 날개를 손으로 꽉 잡아 빵부스러기며 사탕이며 이것저것 잘도 먹여 보았었다. 그러다 머리가 날라가거나 날개가 꺾이면 미안해하며 무덤을 만들어 덮어 주거나 급하게 놔주고는 했었다. 공사판 자제로 아지트를 만들어 놓고는 소중한 학종이와 포켓몬 딱지 같은 것들을 채워가며 세상 다 가진 함박웃음을 지어 보이곤 하였는데. 뒷동산은 미지의 세계였고 작은 몸으로 탐험하지 못한 곳도 천지였다. 하루하루 우리들만의 영역을 넓혀 나갔다. 뒷산이 상률초등학교 뒤에 있는 약수터까지 이어져 있었을 때는 조금 충격이었지만, 어쩌면 미국까지도 갈수 있지 않을까 세계정복의 꿈도 꾸었다. 그 시절 나는 어느것 하나 신경 쓰이지 않는 것들이 없었다. 세상에 중심이 아마 나였기 때문이었겠지.


 아빠가 양산에서 처음 잡아준 잠자리를 잊지 못하는 건 이제 와서 왜일까. 추억의 풍선은 터질때 까지 멈출 생각을 않네. 회고의 마음이란 소멸시키고 싶어도 그리 간단히 소멸 되는게 아니라는 깨닳음을 얻었다. 코앞에서 듣는 파도 소리보다 이렇게 사라질랑 말랑한 소리의 찢꺼기가 좋았다. 필사적으로 달리고 달려서 도달한 소리들이 말이다. 오늘은 그 소리로 인해 나른한 잠과 함께 지난 기억도 찾아 왔다. 외삼촌과 삼촌 친구와의 대화에서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빠가 안쓰러워 대뜸 '우리 아빠야!' 소리쳤던 기억이 났다. 그 후 삼촌들이 '그래도 아들이 최고네 봉주(아빠 본명)! 하하하' 하며 한바탕 웃음거리가 되고는 씩씩거리며 아빠의 손을 꼭 부여잡고 잠을 잤다. 잠잠한 파도가 연주하는 자장가가 들렸다. 편안하고 따뜻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게 익숙했던 난데 그날은 꽤 늦잠을 잤다. 놀러 간 바다에서 신나게 놀아 피곤했기 때문인지, 아빠의 품이 따뜻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중에 삼촌에게 들었다. 아빠는 잠에서 깨어 나서도 일어나지 않고 자고 있는 어린 나를 흐믓하게 한참을 바라보았다고. 생각해 보면 그 날의 기억을 혼자 각색한 건지도 모르겠지만(확인해 볼 방법도 없을뿐더러). 기억이란 감정에서 태어나는 소설 같은 거니까. 같은 책을 읽어도 스스로에게 깊이 남겨지는 장면은 모두 다르듯.


 

갑자기 이런 생각에 잠긴 것은 지금 잠자리들이 하늘에 쓰고 있는 잔상들을 쫓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겐 조금 비릿한 내음도 나기 때문일 것이다. 돌담 사이로 빠져나온 바람들은 언제까지고 나를 감싸 구름 위에 앉게 할 듯했고 돌담 위로는 참깨꽃이 피어 바람 가는 대로 흔들거리고 있었다. 유리 글라스 속 얼음들의 자리다툼에 청아한 소리가 들렸다. 이슬방울은 표면 장막을 깨고 흘러내렸다. 시계는 오후 4시를 향해 천천히 걷고 있어 마음에는 여유라는 꽃이 피었다. 평생 이런 삶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부는 바람이 언제 반대로 불지 모르니 녹녹지는 않다. 마음이 느긋해서인지 그늘막 햇살이 따스해서인지 매미의 소리도 자장가처럼 들려 스르륵 눈이 감겼다.



식물에게는 맑은 물과 비옥한 토지가 필요하고, 사람에게는 밥과 사랑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재료들이 필요하다. 쓰기 위해서도 재료들이 필요하다. 나에게 쓰기 위해 필요한 재료는 쓰고 싶은 마음과 경험이 중요하다. 그래서 난 쓰기 위해 쓰지 않고 있다. 도움닫기를 오래 하는 것도 문제지만 전혀 하지 않는 것은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고의 재료가 모여도 디자인을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기 때문에 오늘도 쓰고 또 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내려다보니 커피잔에는 3분의 1 정도 커피가 남아있었다. 남아 있는 커피를 한입에 털어놓고는 미적지근한 커피를 와인 마시듯 향을 음미하면 조금 깊게 인상을 쓰며 삼켰다. 해와 달이 교대하는 시간. 제법 쌀쌀한 바람에 옆구리에 노트북을 끼고 잔을 들어 일어났다. 이른 해질녘이 앉은 세상은 온통 연보라색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구름과 마을을 파노라마 담듯 정성 들여 보고는 일어났다. 몇 발자국을 걷고 뒤를 돌아 앉아있던 원목 비치의자로 시선을 옮겼다. 커피잔을 놓았던 바닥에는 어린아이가 놀았던 흔적처럼 무수히 많은 발자국이 어디까지고 찍혀 지워지지 않는 얼룩으로 남아 있었다.


내일은 쓰고 있는 소설을 조금 더 전진시켜야지. 

오늘 하루 쓰기 위해 쓰지 않고 쓰고 싶은 마음을 다진다.

나의 설렘은 정성을 담아 준비하는 마음에서 피어나기 때문에.





Authorling  |  Ja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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