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부터 알던 여자 아이가 있었다.
그녀는 얼마 살지 않은 나의 인생에서
꽤 깊은 관계를 가진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다.
학창 시절 유독 단 둘이 이야기 하자는 여자 아이들이 많았다.
나는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는데 가끔 떠오른 말들이
그들에게 꼭 필요했던 말이었나 보다.
그중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친구가
결혼한다는 모바일 청첩장을 보내왔다.
십여년전 아득하다면 아득한 중학생 시절.
그녀는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애의 대한 상담을 원했다.
나와 친한 친구였다.
당시 나는 그녀를 남몰래 짝사랑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의 웃는 모습만 있다면 멀리서 지켜본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많은 것을 도와줬다. 나와 친한 애였고 괜찮은 애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녀와 그의 큐피트 역할을 무사히 완수하고 밀려오는 이상한 기분을 카오스(게임)로 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너에게 늦은 밤 문자가 왔다.
집 앞 초등학교 앞에서 잠깐 볼 수 있냐고
문이 닫혀 있는 초등학교의 정문을 요란하게 넘어 들어갔다.
정막이 내려앉은 운동장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거기엔 너와 나 둘 뿐이었다.
나와 가장 친한 친구의 험담을 하면서
고작 일주일 만에 자기가 생각한 모습이 아니었다며
해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설명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그중에 반이 남자고
그중에 단지 한 명일 뿐이야! 나는 좋은 애 인 줄 알았어... 미안해.
힘내! 맞아 우리 전교생 305명 이잖아.
아마도 그중에서 한 명은 너에게 좋은 사람일 거야!
너는 동그란 눈으로 '누구?'라는 메세지를 보냈다.
나도 모르게 두 엄지를 내 방향으로 가리키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관된 빙구의 표정으로 너의 표정을 살폈다.
뒤늦게 얼글을 붉히며 있지도 않은 별이 참 많지 않냐고 딴청을 피웠다.
너는 그 늦은 밤 고요한 초등학교의 적막을 내 고막과 함께 짖을 듯 웃었다.
너를 보며 난 그걸로 좋았다. 일단 웃었으니까.
너의 눈을 보자 보이지도 않은 많은 별들이 난 그 자리에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허공에 손을 뻗어 살짝 쥐며 미소를 지었다.
별을 제외 하면 경박했던 너의 웃음만 남았던 그 밤을 시작으로
우리는 친구도 아닌 그렇다고 연인도 아닌 그렇다고 가족은 더더욱 아닌 관계를 거쳐갔다.
하루는 자기가 아무래도 정신병자 같다는 말을 했었다.
때로는 정신없이 밝다가도 이유 없이 우울해지고
남자애들과도 잘 놀다가도 수녀가 되고 싶고
꼭 오래 살아야지 결심했다가도 순식간에 죽고 싶은 말을 서슴없이 하는 자신을 보면
정상은 아니구나 라고 말이다.
난 무슨 말인지 잘 몰랐지만 무조건 괜찮다고 말했다.
너무 보통이라 다행이라고 나도 똑같은 경험이 많다고 거짓말을 했다.
쓰레기를 아무 곳에 버릴 때 죄책감을 가지지 않고 다정 누나를 생각하며 자위를 한적도 있다고 했다.
엄마의 자랑거리가 되기 위해 하기 싫은 것도 잔뜩 해가며 속으로 불만이 많다고.
우리는 좋은 모습이란 걸 강요받아가며 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니 지금 너의 고민은 지극히 평범하다고 걱정할 거 하나도 없다고.
너는 안심했고 경박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우리는 고등학교에 가서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좋아하는 가수, 영화감독, 아티스트 그리고 꿈의 대한 이야기도 나누며 빠른지도 모르게 흘러갔다.
자주 만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만남은 언제나 자유로웠다.
너와 내가 서로 외로울 때마다 외로움을 달래주는 사이가 된 것은 어쩌면 필연적 일이었다.
어떠한 약속도 없이 통보하듯 날짜와 시간을 던져 놓고는 어차피 나 올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다는 조련사처럼 자발적으로 굴로 들어가는 나를 그렇게 매일 꺼내 냈다.
상기되어 마구 흔들어 대는 꼬리를 감추기에는 그 당시 내가 스키니를 좋아했으니까
너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점점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언제나 너는 나를 잊지 않고 찾아온다는 막연한 확신이 있었다.
그렇게 너는 나의 사춘기를 가져갔다.
위험한 관계 속에서 우리는 그런 스릴을 즐겼는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 나만이 너를 특별하게 만들어 줄 수 있었고 너만이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 줄 수 있었다고 믿었다.
서로의 연인도 있었지만 나에게 연인이라는 관계는 언제나 자유롭지 못했었으니까. 너도 그럴 거라 믿었다.
부모님은 아들의 사춘기가 뭔지도 모르게 지나갔다고 주변분들에게 자랑하시고는 하셨다.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도 모든 걸 알 수는 없다는 것을 그때 많이 느꼈다.
대학교를 입학 후 우리는 정말 자연스럽기 그지없이 각자의 삶을 걸어갔다.
왕래가 끊긴 다리에 이끼가 가득 매이듯 아주 자연스럽기 그지없이.
메세지를 왼쪽으로 밀어 넘긴다. 빨간 박스 안에 '삭제' 버튼이 등장한다.
엄지손가락은 착륙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비행기처럼 주변만 맴돌았다.
누가 봐도 단체 메세지 이기에 보낼 사람, 보내지 말아야 할 사람 구분 지어서 보낸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나는 너에게 그런 구분된 사람이 아니게 된 것이겠지. 설사 구분된 사람이라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알 고 있으니까. 다시 이어 붙일 수도 끌어당길 수도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알 고 있다. 그러기를 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고맙고 앞으로도 잘 견뎌지기를 기원할 뿐이었다. 행복해질 수 없기에 행복하다는 말을 자주 한 너에게 말이다.
여러 의미를 담아 요란한 '축하해요' 메세지가 적힌 봉투를 골라 오만 원을 보냈다.
답장 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아무 말 없다면 조금 씁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1"이 이끼 낀 자욱한 다리를 건널 때쯤 사라지고 답장이 왔다.
나는 아주 오랜만에 경박하게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