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나이가 들어 공부를 하다보면 때때로 “나는 왜 공부하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도달한다. 고등학교까지는 대학을 가기위해 공부를 했고, 대학에서는 취직을 위해 공부를 했다. 그리고 직장을 다니면서는 승진을 위해서거나, 업무에 필요한 지식을 쌓기 위해서 공부를 했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젊었을 때에는 뭔가를 이루기위해서 ‘수단으로서의 공부’를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무슨 이유로 공부를 하는가? 얼마 전 이런 질문에 대해 ‘아는만큼 보인다’라는 말에서 답을 구한 것 같다.
세상은 아는만큼 보인다.
이 말에 대해 나의 어머니 이야기를 하고 싶다. 85세의 나의 어머니는 나이 60세 가까이까지 문맹으로 지냈다. 어머니는 어릴 적 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나의 할아버지는 그 당시 관습에 따라 여자들을 학교를 보내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문맹으로 고생하시던 어머니는 어느 날 용기를 내어 동사무소에서 하는 한글교실에 다니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다니는 손주의 도움을 받아가며 정말 열심히 공부하셨다. 어머니는 한글을 깨치신 후 세상이 새롭게 보인다고 말씀하시며 마치 장님이 눈을 뜬 기분이라고 했다. 우리는 문맹을 까막눈이라고도 한다. 눈은 떴지만 글자를 해독하지 못하기 때문에 장님과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어머니가 글자를 깨친 후에 느낀 세상은 마치 심봉사가 눈을 뜬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원시시대 우리 조상은 천둥번개가 치면 신이 노했다고 생각하고 두려워했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으로 천둥번개는 음이온의 구름과 양이온의 구름이 충돌할 때 발생하는 현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천둥번개는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 종교가 지배하던 중세 암흑기를 지나 과학과 이성이 눈을 뜬 계몽시대가 도래하자 사람들은 더 이상 무지와 미혹에서 고통받지 않게 되었다. 이성과 과학이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주고 새로운 세상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사진출처: 조선닷컴)
높이 오를수록 멀리 볼 수 있다.
공부를 하는 것은 등산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평지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은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더 넓게, 그리고 더 멀리 볼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부를 하면 할수록 세상을 더 넓게, 그리고 더 멀리 볼 수 있게된다. 퇴직 후 공부를 하면서 세상이 새롭게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특히 인문학을 하면서 세상에 대한 관점이 새로워졌다. 고전을 읽으면서 세상사, 특히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과거에 대한 이해로 미래에 대한 통찰력이 생기는 것 같다. 그리고 예술, 특히 미술을 공부하면서 과거에는 보이지 않던 아름다움美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나이들어 공부를 다시 시작하면서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 결과 나의 삶이 전보다 한층 더 풍성해지는 느낌이다. 결국 내가 공부하는 이유는 더 풍요로운 삶을 누리기 위해서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