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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리어드 Sep 18. 2023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

8년 개띠의 공부도전기 (3)

사람이 살면서 반드시 찾아오지만 자신에게는 오지 않을 거라고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죽음‘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죽는다. 그러나 젊었을 때는 죽음은 나와 무관한 사건처럼 보인다. 나이가 들어도 마찬가지다. 내일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불안해서 살지 못할 것이다.  죽음이 나한테는 찾아오지 않는다는 착각에 하루하루 마음 편히 사는 것이다.    

  

죽음과 마찬가지로 월급쟁이가 빠지기 쉬운 착각 중 하나가 ‘퇴직’이 자신에게는 오지 않을 거라고 믿는 것이다. ‘퇴직’은 다른 사람에게나 해당하는 일이지 나에게는 상관없는 것 같은 착각에 산다. 그러나 언젠가는 퇴직을 해야 한다. 물론 자영업자도 본인의 건강이나 자발적 의사에 의해 하던 일을 그만두지만, 월급쟁이는 언젠가 반드시 회사를 떠나야 한다.   

  


나에게도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착각한 퇴직이 찾아왔다.

나이 오십이 넘어서면 ‘가슴에 사직서를 품고 산다’라는 말이 있다. 누구나 할 수만 있다면 정년까지 채우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나 그게 마음대로 되는가?

40대 초반에 외국계 기업의 임원이 되었다. 흔히 임원은 ‘임시 직원’이라고 자조적인 말을 하는 것처럼 실제로 임원들은 보장된 임기가 없고 매년 고용 계약을 한다. 회사가 고용 계약을 연장하지 않으면 그대로 보따리를 싸야 한다. 50대 후반에 회사는 더 이상 계약을 연장하지 않았다.     


퇴직이 결정된 후 처음에는 긴가민가 했다. 한 마디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퇴직이 결정된 후 퇴직까지 3개월의 기간이 있었는데, 밤에 잠자리에 누울 때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하는 생각에 잠을 설치곤 했다. 오래 전에 먼저 퇴직한 선배를 만나 소주 한잔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선배는 “나름대로 퇴직을 준비한다고 했는데 막상 퇴직이 닥치고 보니 아무 것도 준비한 것이 없다”라는 말을 했다. 당시 현역에 있던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그러나 나도 그날이 닥치다 보니 ‘준비한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았다.      


대부분의 월급쟁이는 회사생활을 하면서 항상 ‘언젠가 퇴직을 하는 데 뭔가 준비를 해야지’하는 마음을 갖지만 바쁜 회사생활에 시달리다 보면 하루하루 떠밀려 생활하고, 결국 그날이 닥치면 망연자실하게 된다.     

50대 후반에 임원으로 퇴직했으니 할 만큼 했다고 위로를 하지만 뭔가 허전하다. 아직 몸도 마음도 젊은 것 같은데 뒤로 밀려난 느낌이다. 퇴직 후 고된 직장생활에서 벗어났다는 홀가분한 마음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살지 하는 걱정이 스물 스물 올라온다. 방법은 재취업인데 불과 몇 년 더 일하자고 다시 취업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평생 회사인으로 살았는데 이제부터는 좀 더 나를 위해, 그리고 독립된 나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군데 회사에서 매력적인 제안이 들어와 고민이 되었지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사실 나는 50대에 들어서면서 내가 가진 업무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었다. 당시 나는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 한국지사에서 영화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50대 초반에 직장을 다니면서 대학원에 입학하여 석사과정을 밟았다. 주경야독한 셈이다.    

 

한 달의 고민 끝에 재취업은 포기하고 대학원 박사과정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아직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상태에서 공부하기로 마음먹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아내는 나의 결정을 지지하면서도 ‘우리 집에 학생이 세 명이네’하고 한숨을 쉬었다.     


60세 가까이에 박사과정에 들어가 아들뻘 학생들과 공부를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젊어서 학생 때 공부할 때보다 훨씬 더 힘은 들었지만 공부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쁘고, 즐거웠다. 어려서는 대학에 가기 위한 공부를, 젊어서는 승진을 위한 공부를 했지만 이제부터는 정말 하고 싶은 공부를 하기 때문이다.      

다소 생계에 대한 걱정도 있었지만 퇴직금을 가지고 버티기로 하고 공부를 하는 데 석사과정 시절 지도교수로부터 영화산업 경력이 있으니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해 보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렇게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으로 일하게 되었고, 그 후 영화산업에서 30여 년 일한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 현장의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강의에 학생들의 반응도 대단히 좋았다. 처음 한 대학에서 시작한 강의는 3개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겸임교수로 위촉되었다.     

퇴직 후 별 볼일 없이 지내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지금은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 대학교 겸임교수, 그리고 신문사 교육센터에서 영화산업에 대한 강의, 영상산업투자에 관한 심사 등 3-4 개의 일을 하며 정신없이 보내고 있다.     


돌아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 중 하나가 퇴직 후 공부를 하기로 한 것이다. 만약 재취업을 했다면 나이를 고려해 볼 때 불과 2-3년 더 일했을지는 몰라도 그 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박사과정을 하면서 영화 마케팅에 관한 책을 출판하였고, 박사학위 취득 후 더 새롭고, 다양한 기회를 얻게 되었다. 

퇴직 후 인생 2막, 새롭게 시작한 공부가 나에게 새로운 인생을 선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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