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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자괴감

가슴속에 화만 남았다

by 이지안

오늘도 어김없이 수정사항이 빼곡하게 적힌 보고서가 되돌아왔다. 내가 보고서에 적은 문장의 조사, 단어를 이런 식으로 수정하라고 연필로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000 운영(안)_v6’ 보고서는 6번째 버전을 넘어갔고, 첫 보고서를 쓴 날로부터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나한테는 단어 하나, 조사 하나 선택할 권한이 없는 건가?’ 초등학생 취급을 받는 느낌이었다. 보고서의 방향성이나 관점, 실행 안의 타당성 등에 대한 지적은 언제든지 오케이였다. 그건 일의 완성도를 높이는 거니까. 하지만 문장 하나 조사 하나에 관한 부장의 지적은 동의하기 힘들었다. 그걸 바꾼다고 해서 더 나은 보고서가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벌써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지금 보고서에 이렇게 목맬 상황이 아닌데, 결과물을 만들려면 지금부터 액션에 들어가도 늦는데.’ 오늘 다시 한번 보고서 수정사항을 부장과 이야기하던 중 가슴에서 뭔가가 확 끓어올랐다. 최대한 자제하려 했지만 가슴에 묵은 무언가가 조금은 입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어느덧 이야기가 잠잠해지고 발언권이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갔을 때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손 안의 볼펜만 만졌다.

이상한 패배감 때문이었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말했더라면 기분이 나았을까? 상급자에 대한 예의를 지킨다는 이유로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며 말했다. 하지만 그 덕에 켜켜이 쌓인 감정은 분출되지 못하고 고스란히 앙금으로 남았다. 퇴근하고 지금도 마음이 괴로운 건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억지로 삼킨 화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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