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문화 진단 회고 3편
분석하는 담당자 입장에서는 최대한 자세하게 인적정보를 수집하고 싶다. 소속 부서, 직급, 연차, 나이, 성별 등등. 하지만 이렇게 자세하게 수집하면 설문을 응답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자신의 신상이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마케팅 부서-대리-5년 차'로 응답하면 누가 응답했는지 정보 범위가 좁아진다. 이런 신분 노출의 두려움 때문에 솔직하게 응답하지 않을 확률이 높아진다. 따라서 최소한의 정보만 수집하기로 했다.
특히 소속 기관을 어느 정도로 자세하게 수집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마케팅파트, 경영지원 파트처럼 기관별 데이터를 수집하면 각 기관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기관을 나눠서 정보를 수집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각 기관별로 비교를 해서 진단 결과가 나오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점수가 낮게 나온 기관의 리더는 나쁜 피드백을 듣게 된다. 부정적 피드백을 받은 기관의 리더는 진단 결과를 받아들이기보다는 진단 자체에 대해 선입견부터 가진다. 그리고 다음에 진단을 한다고 하면 과거의 부정적 경험 때문에 조직원들에게 무언의 압박을 넣을 수 있다. 그러면 진단 점수는 올라가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바뀐 게 없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런 줄세우기를 피하고자 아예 기관 정보를 수집하지 않았다. 대신 인원 비중과 업무 특성의 차이가 두드러지는 사무/영업/제조로만 분리를 했다.
(정말 최소한의 정보만 수집했지만 그래도 신상이 노출될 수 있다는 직원들의 의견이 많았다)
조직문화 진단, 이름은 좋지만 뭔가 딱딱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미 과거에도 다양한 설문들을 직원들이 겪었기 때문에(그리고 과거의 설문들에 직원들이 별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좀 더 말랑말랑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 그렇다고 조직문화 진단이라는 단어를 아예 뺄 수는 없었는데, 조직문화 진단이라는 단어만큼 이번 설문이 무엇인지 단번에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온 이름이 바로 '2020 조직문화 진단 너.목.들(너의 목소리를 들려줘)'다. 조직문화 진단을 하는 이유 자체가 직원들의 목소리를 듣겠다는 것이었기에 회의 중에 이 단어를 듣고는 마음에 들었다. 예전에 드라마 제목으로도 쓰여서 아예 처음 듣는 이름이 아니라는 것도 선택하는데 한몫했다.(아이디어 내준 J님 고마워요!)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부드럽게 전달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다.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아이디어는 데이나 님의 조직문화 진단 후기에서 얻었다)
설문은 회사 사내 시스템을 활용해 강제적으로 직원들이 참여하게 했다. 그랬더니 응답률 90%라는 어마무시한 데이터가 나왔다. 참여인원은 약 3,900명. 이 정도면 거의 전 직원이 참여했다고 봐야 했다. 열심히 한 땀 한 땀 엑셀을 통해 피벗을 돌리며 기초 데이터를 정리했다. 5점 만점 척도를 활용했고 점수 분석 지표는 긍정 응답률을 활용하기로 했다. 그렇다(4점), 매우 그렇다(5점)을 함께 묶어서 비율을 구한 다음 한눈에 볼 수 있게 표로 정리했다. 그랬더니만........
문항별로 긍정 응답률이 80%는 기본이고 90%를 넘는 항목도 수두룩했다. 객관식 데이터를 기반으로 본다면 우리 회사는 조직문화에 아무런 문제도 없어야 했다. 하지만 문항 개발 과정에서 했던 인터뷰와 주관식 응답은 달랐다. 분명히 공통되게 발견되는 문제점들이 있었다. 만약 4점과 5점을 묶은 긍정 응답률 지표를 가지고, 우리 회사는 조직문화가 우수하다고 보고한다면 경영진은 그 결과를 진짜라고 납득할 수 있을까? 아니 경영진을 떠나서 나는 그 결과가 정말 현재 우리 회사의 조직문화를 잘 보여주는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이번 진단은 망한 것일까?
결과를 놓고 고민하던 때 인사이트 모임에 나갔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여기서 5점 지표만 긍정응답으로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는 조언을 들었다. 사실 5점 척도의 '그렇다'는 '보통이다'에 가깝고, '보통이다'는 부정에 가깝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라 응답하기 망설여질 때 '보통이다'를 선택하는데, 그러면 '보통이다'는 사실상 '그렇다가 아니다', 즉 '아니다'의 뜻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다'는 오히려 '보통이다'의 의미가 된다. 따라서 '매우 그렇다'만 긍정응답이 된다.(굉장히 헷갈리게 써놓았지만 천천히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다)
다음날 회사에 출근해서 허겁지겁 '매우 그렇다(5점)'만 긍정응답으로 체크해서 다시 결과를 뽑아봤다. 그랬더니 문항 간에 의미 있는 차이가 보였다.(오예!) 설문 응답자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말해주지 않은 게 아니다. 내가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이번 진단 분석은 매우 그렇다(5점)을 주요 지표로 활용해서 분석했다.
진단 결과를 작성하는 데 있어 나는 처음에 시각화된 리포트를 생각했다. 데이나 님의 글을 많이 참고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결과물 산출에 있어 리포트를 생각하게 됐다. 하지만 부장님의 의견은 달랐다. 부장님은 평소에 작성하는 보고서의 형태를 원했다. 부장님은 핵심 메시지를 중시했고, 분석 결과는 핵심 메시지를 위한 근거자료일 뿐이었다. 텍스트로 된 메시지가 중요했기에 결과 값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래프는 자리만 잡아먹어서 보고서의 양만 늘린다고 생각했다.
'시각화된 리포트 vs텍스트가 중심이 된 보고서' 부장님과 나의 기본 생각 차이는 처음에는 미묘한 틈이었지만, 나중에는 건널 수 없는 강 수준이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부장님 의견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만약 진단 결과를 구성원 전부에게 공유해서 조직 전체의 변화를 요구하는 거였다면 시각화된 리포트로 구성원의 이해를 돕는 게 맞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번 진단의 목표는 경영진의 생각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었다. 실제로 진단 결과 나온 과제들 대부분이 조직 내 리더들이 변해야만 바꿀 수 있는 문제였다. 부장님 의지를 꺾기에 내 짬밥이 너무 안된다는 것도 있었지만...ㅋㅋ원래 목적과 어긋나지 않아서 부장님 의견을 따랐다.
나중에 중간관리자급에게 공유할 때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래프가 들어간 리포트를 다시 만들었다. 텍스트가 중심이 된 보고서를 그대로 쓸 수도 있었지만... 이해도를 높이려면 시각화된 자료가 필요했다. 못다 한 시각화 리포트 작성의 한을 푼 것도 있다. 살짝 자랑하자면 시각화 자료 만드는 건 아무도 안 시킨 일이지만 내가 자발적으로 열심히 만들었다. 아무도 나의 이런 노력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여기서라도 셀프로 칭찬해야지.
진단 보고서를 쓰면서 가장 불안했던 건 '경영진이 내가 적은 메시지에 얼마나 공감해줄 것인가?'였다. 기껏 고생해서 만든 진단 보고서가 아무 반응도 이끌어내지 못하고 조용히 사라질까 봐 솔직히 걱정됐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 생각 이상으로 경영진의 공감이 있었다. 특히 임원회의 자리에서 내 보고서를 보고 "우리 리더들이 바뀌어야 한다"라고 회사 No.2 임원이 발언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좀 짜릿했다. 단순히 의례적으로 하는 발언이 아니라, 꽤 긴 시간 조직문화 진단 결과에 관해 이야기했다고 들었다.
긍정적인 후폭풍도 있었다. 몇몇 기관에서는 자체적으로 조직문화 개선방안을 수립하기도 했고, 결과에 대해 더 세세하게 묻는 임원들도 있었다. 현재 우리 조직의 문제점과 개선방향에 대해 경영진의 공감대를 이끌어 낸 것만으로도 이번 진단은 성공이었다.
위에서 이 정도로 이야기했으니 당연히 후속 활동에도 힘이 실릴 수밖에 없다. 경영진의 관심도가 커진 만큼 부담감도 있지만 그래도 스폰서십을 획득한 게 어디겠는가. 올해 남은 기간에 원래 계획한 방안들을 잘 실행하는 것만 남았다.
조직문화 진단은 기획, 실행, 결과 분석, 후속방안 수립까지 프로젝트의 모든 사이클을 혼자서 이끌었다. 솔직히 내가 가진 역량 이상의 도전적인 업무였다. 입사 후에 해본 일 중에 가장 어려웠고, 가장 장기간 동안 해본 일이었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적도 솔직히 여러 번이었다.
대신 그만큼 성취감도 컸다. 회사에 들어와서 해본 일 중에 '짜릿하다'라고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가능하다면 이런 짜릿함을 앞으로도 자주 여러 번 느끼고 싶다. 그러려면 쉬운 일 보다 도전적인 일을 선택해야겠지.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재밌고 즐거운지, 이번 진단을 통해 찾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