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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syeah Jan 11. 2023

결혼 두달전 파혼했습니다_1

결혼에 미쳐있다 결혼에 미치려다 결혼에서 해방된 일기


내 인생에서 이렇게 격려와 칭찬을 많이 받은 적이 있었나? 아무 사정도 모르는 사람들도 내가 파혼했다고 말하니 잘했다고 엄지를 치켜들었다.

“잘했어, 이혼보단 파혼이지, 그리고 날잡고 헤어지는거 요즘 빈번해. 그냥 사귀다 이별한거지 뭐”

“네가 행복하다면 그게 맞는길이야, 지금 너 되게 후련하고 행복해보여“


헤어질지 말지 고민할때 인터넷에서 수도없이 본 말이었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들으니 진한 위로가 되어 나를 감쌌다.


어마어마한 뒷 얘기가 있을법하지만, 사실 아니다. 파혼의 이유는 단 한가지다. 우리는 더이상 사랑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남은건 결혼식 이라는 허울좋은 껍데기 뿐, 그 안의 알맹이인 사랑, 배려, 이해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남아있지 않은지 오래였다.




우리는 일년전 처음 소개팅으로 만났다. 내가 34살, 상대방은 35살 이었다. 둘 다 결혼에 고팠고 결혼에 미쳐있는 하이에나였다.

나는 친구들이 진작에 다 결혼을 해버렸기에 더욱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고 그는 원래 인생목표가 35살 결혼인 사람이었다.

게다가 이 나이에 소개팅으로 만나서 이렇게 서로 케미가 딱 맞고 맘에 드는 사람 만나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서로의 니즈가 딱 맞아떨어진 우리는 사귀고 나서 얼마 안있다가 결혼얘기를 시작했고, ‘불요불급’ 이라는 말처럼, 결혼에 ‘미친’ 우리는 결혼에 ‘미치기’ 위해 약 100일정도만에 식장을 덜컥 예약해버렸다.

조금 빠른가 싶다가도 ‘아니야 누구 아는 언니는 6달만에 식장 들어갔는데도 지금 애낳고 잘살아’, ‘나 아는 오빠는 3달만에 한 사람도 있어’ 라는 주변의 도시전설 같은 이야기를 좋은 쪽으로만 해석하며 듣고 싶은 얘기만 듣고 있었다.


사실, 속으로 걸리는게 많았지만 무시했다.

명절에 시골에 내려가서 전부치는 며느리가 되어야 했던것, 그리고 그와 그의 가족들과 잘 지내려면 그 정도는 흔쾌히 감수하는 유연한 여자가 되어야 했던 것.

형편이 어렵고 자식들에게 받기밖에 모르는 그의 아버지에게 금전적인 도움이 되어드리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했고,

잠귀가 예민하지만 같이 자기를 원하는 그를 맞춰주기 위하여 코고는 그를 참아야 했고,

두 명의 돈을 모아 24평 정도의 전세에서 시작하고 싶은 나와 달리, 모은 돈은 투자를 하고 빌라 월세를 살고 싶어하던 그를 이해해야했고,

일년에 한번정도는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를 하고 싶은 나와 달리 기념일이든 생일이든 일년 365일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무심한 그를 받아들여야했다.

데이트할때 아무 계획도 없고 그때그때 발생하는 돌발상황에서 항상 한량처럼 아무생각없이 있는 그를 인정하면서도,

본인은 말을 함부러 하면서 내가 하는 말엔 사사건건 트집잡는 그를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야했다.

(물론 이건 내관점이라 상대방도 내 성격을 감당하느라 적잖이 힘들었겠지)


물론 1년 여를 만나면서 잘맞는 점도 많았다. 그의 외모는 정말 내스타일이었다. 나보다 25센치나 더 큰 키, 떡 벌어진 작각 어깨, 시원시원하게 뻗은 팔다리, 그리고 내가 가장 매력을 느끼는 포인트인 길게 뻗은 가는 손가락.

거기다 개발자라는 한창 핫한 직업 또한 그 매력을 배가 되게 했다. 그는 개발자 중에서도 꽤 능력이 있는 편으로, 그 긴 손으로 까만 화면을 켜놓고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타자를 치며 코딩을 하는 것을 보면 뭔가 뿌듯하면서도 마음속에 단단한 믿음이 생기는 것 같았다.


또 우리는 티키타카가 잘되서 같이 있으면 시간 가는줄 모르게 이야기를 했고, 티비를 볼때면 같은 것에 같은 생각을 갖고있는 경우가 많았다. 전반적인 세상을 바라보는 옳고 그름이 비슷했달까?

그는 어딜가나 공손하고 예의발라서, 내가 조금 버릇없게 굴더라도 나를 아이처럼 혼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성실하고 검소했다. 자기일에 열심히고 돈을 열심히 모았다. 나에게는 잘 쓰지않지만 돈 모으는 재주 하나는 비상했다.

또한, 그는 여자문제를 절대 일으키지 않을만한 사람이었다. 어딜 내놔도 절대 신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강했다.


수많은 장점과 수많은 단점을 저울질 했지만, 나는 그때까지도 이 사람과 결혼을 해야하는지 답을 내리지 못했고, 그냥 결혼이라는 그 빛나는 단어 자체에만 눈이 멀어서 내가 앞으로 받아들여야 할 수많은 것들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래, 남들 다 입어보는 드레스 입고, 사진도 예쁘게 찍고, 좋은데 신혼여행도 가고, 좁은 오피스텔에서 벗어나서 좀 더 넓은 보금자리에서 사람답게 좀 살아보고 싶었다.




마치 고장난 자동차처럼 결혼을 향해 질주하던 우리는 갑자기 어떤 계기로 싸움을 시작한다. 처음은 명절에 시골에 내려가는 문제였다.

그는 아버지를 만나고 올때마다 나에게 걱정어린 말투로 물었다. 결혼하면 명절에 시골에 내려가서 일을 해야 할 수도 있을거라고. 할수 있겠냐고..

우리집의 문화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계셔도 시골에서 다 형제끼리 모여서 제사를 지내는 문화고, 결혼한 친척 형들도 다 한데 모여서 며느리들이 시어머니를 돕는다고..


결혼에 대해서 환상에만 젖어있던 나에게 어찌보면 찬물을 확 끼얹는 발언이었다. 물론, 어느정도의 희생은 각오하고 있었지만, 명절에 깡시골에 내려가서 그 가부장적인 분위기 속에서 제사음식을 만들고, 음식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는 종년노릇을 하라니…


나는 어렸을때부터 명절에 처가엔 발도 못들이면서 시댁에 가서 3일내내 맏며느리로서의 노동을 한 엄마를 기억했다.

고모들의 잔소리를 들으며, 집안일엔 관심도 없는 아버지의 도움없이 혼자서 시부모님을 비롯한 모든 시댁식구를 케어하던 엄마의 모습이 내 마음속에 짙게 남았다.

그래서 어렸을때 부터 하던 ‘난 절대 절대 엄마처럼은 살지 말아야지, 여자가 경제력이 없으면 저렇게 사는구나’라는 생각이 마치 타투처럼 내 마음속에 아직도 깊게 박혀있다.

나는 여자로 태어난 것이 원망스럽지 않으려고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고, 함께살든 혼자살든 걱정없을 정도로 경제력있는 직장과 배경을 갖게 되었다. 이런 내게 명절, 시골, 노동은 지금까지의 내 가치관과 삶의 목적을 모두 무너뜨리는 말이었다.


“아니 결혼하면 아버님의 서울댁이 이제 큰집이 되어서, 오빠네 누나 부부랑 우리부부랑 같이 거기서 명절을 지내는거지, 왜 굳이 할머니 할아버지도 안계신데 시골에 내려가야해?”


“나는 아버지를 설득할 자신이 없어. 그리고 아버지는 그런거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이야, 이게 우리집 문화고 결혼하면 원래 그런걸 받아들여야 하는거야”


“아니 근데 그걸왜 나한테 강요하냐구, 오빠 반대로 우리집이 그런상황이라서 오빠가 시골에 내려가서 우리집 모든 친척들이 다 모이는데서 하루종일 잔소리들으며 노동할 수 있겠어? 내가 그렇게 강요하면 좋아? 그리고 오빠 누나네도 안내려간다며 근데 왜 내가 내려가야해?”


“나라고 명절에 거기 가는게 마음이 편하겠어? 나도 그 사람들이랑 편하지 않고, 아빠랑도 친하지 않은데 너까지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화내면 어떡해?나 너가 이렇게 반응하면 너무 힘들어”


라는 식의 평행선을 달리는 싸움이 이어졌다. 계속되는 싸움에 나는 시간을 가져보자고 했고, 그는 그럼 시간을 가지는건 가지는 거고, 식장 무료취소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일단 식장을 취소하자고 했다. 나는 싫다고 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그렇게 우리는 결혼 준비중 처음 이별을 한다.


결혼 예정일 약 반년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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